마왕성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마왕이 아니다.
이곳에 취직한 지 제법 지난 나에게 누가 묻는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할 수 있었다. 마왕은 적어도 기분이 나쁘면 표정으로 표시한다. 결재 문서는 그러지 않는다. 웃는 낯으로 접수됐다고 뜨다가 석 달 뒤에 '첨부 서류 미비'라는 칼을 등에 꽂는다.
오늘 아침 내 책상 위에는 정확히 열일곱 장짜리 열람 신청서가 놓여 있었다.
"왜 이렇게 많습니까?"
내가 묻자 몰트가 뼈마디를 짤그락 울렸다.
"공동 계정의 소관 기관이 세 곳이기 때문입니다. 각 기관이 자기 몫의 증빙을 요구하지요."
"그러면 세 곳에서 합쳐서 한 번만 보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 의견을 제안하려면 제안서가 열두 장 필요합니다."
나는 펜을 내려놓았다. 이세계가 멸망한다면 사유는 마왕의 침공이 아니라 신청서의 증식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들여다보려는 것은 `00-성전`이라는 공동 정산 계정이었다. 왕국과 마계와 천계의 오래된 기록을 쫓다 보면 기어코 마주치게 되는 이름. 어젯밤 제6정산금고의 봉인물 6-17에서 나온 대조표에도 그 번호가 적혀 있었다. 다만 그 옆의 단어는 '참조'였다. 돈이 오갔다는 뜻은 아니었다.
나는 그 차이를 흘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누가 돈을 냈고 누가 받았는지 확인하지 않으면 사람의 이름을 가지고 거래했다는 의혹이 또다시 소문으로 굳어질 테니까.
"신청 목적은 어떻게 쓰셨습니까?" 몰트가 물었다.
"봉인물 6-17의 보존 비용과 `00-성전` 계정의 실제 지급 관계 확인."
"좋습니다. 신청인은요?"
"한도윤."
"직책은요?"
"마왕성 회계 담당."
"기관 대표자는요?"
"마왕 제르칸."
몰트가 펜을 멈췄다.
"대표자를 그렇게만 적으면 이름 옆에 적을 수식어가 없어 폐하께서 기분 상하실 겁니다."
"최고경영자라고 적을까요?"
"무한한 암흑을 지배하는 절대군주를 선호하십니다."
"칸이 일곱 글자인데요."
우리는 한동안 신청서의 좁은 칸을 노려봤다. 피코가 옆에서 기웃거리더니 근사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마왕' 두 글자만 써요. 나머지는 그림으로!"
"그림은 전산 인식이 안 되잖아."
"그럼 폐하 얼굴을 도장으로 찍으면 되죠."
마침 문을 열고 들어온 제르칸이 그 말을 들었다.
"내 얼굴을 찍는다고? 허락한다! 크게 찍어라!"
"작게 찍어야 승인됩니다."
"무엄하다."
"왕국 공문 양식이 그렇습니다."
왕국이라는 말을 듣자 마왕의 표정이 온순해졌다. 적국의 양식 앞에서 마왕이 순해지다니. 내가 회계학 교과서를 쓴다면 반드시 사례로 싣고 싶었다.
신청서를 들고 회계소에 들어서기 전, 나는 마지막으로 서명란을 확인했다. 그때 피코가 손가락으로 첨부 목록을 짚었다.
"도윤 님, '신청인의 의사 확인'이 두 장이에요. 왜 두 번 확인해요?"
"첫 번째는 내가 신청했다는 확인이고, 두 번째는 다른 사람이 내 대신 신청하지 않았다는 확인이래."
"그럼 둘 다 도윤 님이 사인해요?"
"그래."
"똑같은 글씨가 두 번 있으면 또 복사했다고 할 텐데요?"
나는 펜을 든 손을 멈췄다. 참으로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우리는 복사본과 원본을 구별하려고 얼마나 많은 회의를 했던가. 내 손으로 두 번 쓴 이름을 보고도 직원이 복제 흔적을 의심한다면 끝이 없었다.
피코는 아예 내 손등을 살폈다.
"그냥 도윤 님이 여기 왔다고 말하면 안 돼요?"
"그래서 신분증과 입회인이 필요한 거야."
"그럼 말하면 되잖아요."
"그 말이 맞긴 한데…"
말문이 막혔다. 내가 한국에서 일할 때도 그랬다. 현장 직원이 당연한 질문을 하면, 사무실에서 만든 규정은 갑자기 난처해졌다. 규정은 필요한데, 규정이 사람을 밀어내면 다시 고쳐야 한다.
접수 창구 담당자는 놀랍게도 우리의 설명을 금방 이해했다. 이름을 두 번 쓰는 대신 첫 장에 자필 서명을 하고, 두 번째 장에는 현장 입회 확인을 추가하면 된다고 했다. 피코는 아주 만족한 얼굴이었다.
"봐요. 사탕 두 개도 하나만 먹었다고 적으면 안 되거든요."
"그건 비슷한 것 같으면서 다른 문제야."
"회계는 너무 어려워요."
"나도 가끔 그렇게 생각해."
접수 담당자가 서류를 넘기다 고개를 들었다.
"열람 대상을 정확히 특정하셨네요. 이런 신청은 드뭅니다. 대개 '관련 자료 일체'라고 써서 오시거든요."
"그렇게 쓰면 어떻게 됩니까?"
"서른아홉 개 부서에서 거절 통지를 보냅니다."
"그럼 그쪽도 힘드시겠네요."
"네. 그래서 대상 자료를 좁혀 주신 게 고맙습니다."
나는 아침에 마왕의 이름을 좁은 칸에 적느라 고생했던 게 조금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왕국 공무원도 사람이었다. 서류의 공격을 우리보다 먼저 맞고 있을 뿐이었다.
그날 준비해 온 자료 중에는 봉인물 6-17의 은화 열 닢 표시가 있었다. 피코가 그 서류를 펼쳤다.
"그러면 이 돈도 오늘 찾을 수 있어요?"
"모르지. 은화 열 닢은 문서 보존 보증금일 수도 있고, 이 계정과 관계없는 다른 예치금일 수도 있어."
"같은 숫자는 아니잖아요? 여섯 닢이랑 열 닢인데."
"그래.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섞으면 안 돼."
나는 두 서류를 나란히 놓고 서로 다른 색의 표식을 붙였다. 은화 열 닢은 봉인물 보존 기록. 금화 여섯 닢은 공동 계정의 실지급. 단위도 다르고 용도도 아직 같지 않았다. 둘을 적당히 합쳐 버리면 아주 그럴듯한 음모론 하나가 나오겠지만, 그건 우리가 찾는 사실이 아니었다.
몰트가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당신은 갈수록 장부를 오래 들여다보는군요."
"예전에는 숫자가 맞으면 된 줄 알았습니다. 지금은 그 숫자가 누구의 것인지 먼저 봐야 해요."
"좋은 회계 담당자의 대답입니다."
"그 말씀을 인사평가에 적어 주세요."
"그러죠. 단, 자기평가 칸도 직접 채워야 합니다."
나는 다시 펜을 내려놓았다. 칭찬 하나 받으려면 문서가 또 늘어난다. 참 이상한 직업이었다.
입회 직전 라델이 내게 작은 고지서를 내밀었다. 공개 자료를 열람할 때 보존실의 마력 조명 유지비를 신청인이 일부 부담할 수 있다는 안내였다. 금액은 은화 한 닢 미만이었다.
"실제 비용입니까, 구형 자동 청구입니까?"
"오늘 보존실 담당자의 근무와 장치 가동 비용 중 열람에 필요한 부분입니다. 지급처도 기록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문제없습니다. 다만 동의하기 전에 금액부터 확정해 주세요."
피코가 옆에서 활짝 웃었다.
"이번에는 버튼 있어요?"
"있으면 내가 먼저 누를게."
작은 비용을 정당하게 지불하는 일과, 모르는 돈을 자동으로 빼앗기는 일은 달랐다. 그 당연한 구분을 처음부터 지켰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덜 고생했을까.
점심 무렵 우리는 공동 보증 회계소의 작은 열람실에 모였다. 왕국 조사관 라델, 중립 기록관 아레인, 보존 전문가 이스카, 관리단 협의관 루멘까지 참석했다. 그동안 얼굴을 자주 본 덕분에 이제는 적국 대표들이 같은 주전자를 놓고 차를 마시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자연스럽지 않은 것은 열람실 문이었다. 유리창 위에 '허가받은 세 사람만 입장'이라고 쓰여 있는데 참석자는 여섯 명이었다.
"규정대로면 세 명은 복도에서 기다려야 합니까?" 내가 물었다.
라델이 난처하게 웃었다.
"세 주체의 대표 세 명이라는 뜻입니다."
"그럼 통역과 보존 전문가는 투명 인간 취급이군요."
이스카가 냉정하게 말했다.
"전문가가 빠지면 문서를 펼칠 수 없습니다."
"그렇죠. 문구를 고칩시다."
이런 일 하나를 수정할 때마다 나는 이상한 뿌듯함을 느꼈다. 거창한 마법도 아니고, 사람 수를 제대로 세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걸 하지 못해 수십 년간 불편을 겪는 사람이 있었다.
라델이 신청서를 훑더니 특정 문장에 손가락을 올렸다.
"`00-성전` 전체 원장 공개 요청은 안 됩니다. 여기에는 전투 보급과 개인 의료 기록까지 섞여 있습니다."
"전체 원장은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신청한 건 6-17 참조번호가 붙은 거래의 상태와 수취 기관입니다."
"수취 개인 이름도 필요한가요?"
"지금은 기관명만요. 개인이면 비식별 표기로 충분합니다."
라델의 어깨가 조금 풀렸다. 옛날의 나는 자료를 많이 받으면 많이 받을수록 좋은 줄 알았다. 이곳에 오고 나서는 알게 됐다. 남의 기록을 함부로 많이 가지면, 지킬 책임도 무턱대고 커진다는 걸.
이스카가 봉인 문서의 인증 사본을 책상 위에 놓았다. 그 아래에 내가 어제 읽었던 한국어 문장의 번역본이 있었다.
'먼저 사람의 대답을 들으세요. 기록에 이름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허락한 것은 아닙니다.'
나는 잠깐 문장을 바라보았다. 누가 썼는지는 여전히 몰랐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가 서류를 한 장 더 써야 하는 이유를 이보다 정확히 설명하는 문장도 없었다.
루멘이 가져온 것은 천상 관리단의 오래된 계정 참조표였다. `6-17-A`라는 번호에는 '보존 지원 대상 후보'라고 적혀 있었다. 후보라는 단어에 밑줄을 두 번 그었다.
"이 돈이 실제로 제6정산금고에 들어온 적 있습니까?"
"우리 쪽 예산서는 지출 예정이라고 말합니다. 지급 장부는 별도로 확인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정은 예정으로 남깁시다."
루멘이 어색하게 웃었다.
"회계 담당자 앞에서 그런 말씀을 듣게 될 줄은 몰랐군요."
"천사도 결재 대기에서는 자유롭지 않더라고요."
그날 첫 번째로 열람된 표에는 세 개의 열이 있었다. 책정, 지급 승인, 실지급. 그 아래로 수십 개의 숫자가 늘어서 있었다. 내 머릿속에서 익숙한 소리가 울렸다.
[절대 감사: 정산표의 금액 상태가 서로 일치하지 않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듣는 듯한 느낌이었다. 사실 자주 듣는다. 오늘도 아침 식당에서 빵 네 개 추가 주문이 '금 접시 네 개 신규 구입'으로 입력된 걸 발견했으니까.
나는 능력이 가리킨 줄을 따라 읽었다. 보존 준비금으로 금화 마흔 닢이 책정돼 있었다. 승인은 이십 닢. 실지급은 여섯 닢. 세 숫자는 서로 달랐지만, 그것만으로 횡령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집행 시기가 다를 수도 있었다.
"이 여섯 닢의 수취처는 어디입니까?"
라델이 제한 화면을 돌려 보여 줬다.
[수취 기관: 경계 회신보전소. 지급 사유: 미응답 통지 보관 및 재발송 비용.]
나는 숨을 멈췄다.
"회신보전소요?"
"오래전에 중립 경계선에 있던 시설입니다." 아레인이 설명했다. "왕국과 마계 사이에서 서로 배달되지 못한 통지를 보관하던 곳이지요."
"지금도 있습니까?"
"문을 닫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적어도 제가 가진 명부에는 그렇습니다."
"폐쇄 기관에 돈이 갔다고요?"
베실이 기록을 다시 확대했다.
"지급 당시에는 운영 중이었을 수 있습니다. 연도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흥분하면 쉬운 것부터 놓친다. 기록에 적힌 날짜는 오래전, 보전소가 공식 폐쇄되기 두 해 전이었다. 수취 기관 자체는 말이 됐다. 이상한 것은 그 옆이었다.
[서비스 종료 조건: 수취인의 직접 응답 수령 시.]
"사람이 답할 때까지 보관한다는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레인이 말했다.
"그러면 답이 안 오면요?"
"기한이 지나면 폐기했어야 합니다. 적어도 지금 규정이라면요."
원장 맨 아래에는 작은 각주가 달려 있었다. 옛 규정에 따라 '응답 대기 건은 회계상 계속 유효'라고 쓰여 있었다. 종료 규칙이 서로 달랐다.
나는 의자에 기대앉았다. 사람의 대답을 기다리기 위해 만든 제도가 대답이 없다는 이유로 영원히 돈을 받게 된 걸까.
"실제로 계속 지급됐다는 뜻은 아닙니다." 내가 먼저 말했다.
"맞습니다." 베실이 받아 주었다. "지금까지 확인된 지급은 여섯 닢 한 건뿐입니다."
피코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도윤 님, 대답 안 하면 간식 계속 쌓이는 거예요?"
"간식이면 좋겠는데, 여기선 청구서가 쌓일 수 있다는 게 문제야."
"그건 싫어요."
"나도."
우리는 우선 확인 가능한 건만 종이에 옮겼다. 금화 마흔 닢 책정, 이십 닢 승인, 여섯 닢 실지급. 그리고 실지급 수취처는 폐쇄 전의 경계 회신보전소. 나머지 열네 닢은 지급 여부를 더 확인해야 했다.
막 열람이 끝나려 할 때 제르칸에게서 마법 통신이 왔다.
"한도윤! 큰일이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공격입니까? 화재입니까?"
"점심 메뉴에 버섯이 없다!"
회의실의 모든 사람이 나를 보았다.
"폐하, 그건 주방장님과 협의해 주세요."
"주방장은 예산이 부족하다고 한다. 네가 마왕인데 버섯 하나 못 구하면 되겠느냐!"
"제가 마왕은 아니고요."
"내 대신 버섯을 구하라는 뜻이다!"
나는 통신을 끊고 열람실 벽에 이마를 기댔다. 은화 한 닢보다 마왕의 버섯이 더 시급한 세상. 그래도 그걸 걱정할 수 있는 회사라면 아직 희망이 있겠지.
돌아가는 마차에서 라델이 말했다.
"한 가지 자료는 신청 목적 범위 안에서 바로 드릴 수 있습니다. 회신보전소의 최종 관리 책임자 등록부입니다."
"개인 이름까지요?"
"기관장의 이름은 공개 명부에 있습니다. 단, 그가 지금도 같은 일을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나는 서류를 받아 펼쳤다.
[최종 운영 책임자: 감독관 대행 에르반.]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그 밑에는 폐쇄 후 이관 기관이 적혀 있었다.
[경계 회신업무 통합관리실. 현행 연락처: 미확인.]
나는 내 수첩에 한 줄을 남겼다.
'돈을 받은 곳은 찾았다. 이제 그곳이 사람의 대답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확인할 차례.'
그때까지만 해도 이 기록을 따라가면 오래된 제도의 실수를 하나 고치게 될 줄 알았다. 그 이상은 예상하지 못했다.
내일 아침, 내가 적어 놓은 기관 이름이 아직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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