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새로운 증인이 나타난 건 아침 식사 시간이었다.
마왕성 식당에서 피코가 마지막 빵을 집으려는 순간, 문지기가 뛰어 들어왔다.
“한도윤 님! 옛 중립 운송조합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피코가 빵을 입에 문 채 물었다.
“사람이 왔으면 밥부터 드려야죠.”
“맞는 말이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님 식권 한 장 부탁합니다.”
문지기는 황당한 얼굴이었다. 아주 중요한 사람이 찾아왔을 수도 있는데 식권부터 끊으라는 회계사라니. 그러나 우리 성에선 이 절차가 가장 빨리 사람을 앉히는 방법이었다.
손님은 키가 작은 노인 여성이었다. 이름은 소렌. 손등에 낡은 화상 자국이 있었고, 오른손의 새끼손가락이 조금 굽어 있었다. 나는 베르가 묘사한 손을 떠올렸지만 표정은 바꾸지 않았다.
“혹시 오래전에 새벽등이라는 배를 아십니까?”
소렌은 스튜를 한 숟갈 떠먹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죠. 내 젊은 시절 대부분을 그 배에서 보냈어요.”
“당시 긴급 문서가 하나 전달됐다고 들었습니다.”
“문서는 많았어요. 전쟁통이었으니까.”
“글자를 읽을 수 없는 배달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눈빛이 변했다.
“베르가 아직 살아 있나 보군요.”
“네. 항구에서 정비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 바보 녀석은 매듭도 제대로 못 지었는데.”
피코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희는 배웠어요!”
소렌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자네가 베르보다 낫겠군.”
나는 피코가 얼마나 기쁜지 말하기 전에 질문을 이어 갔다.
“그날 문서를 누가 포장했는지 기억하십니까?”
“기억은 나지. 하지만 그 문서가 자네가 찾는 것과 같은지는 모르겠네.”
“그 차이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소렌은 빈 그릇을 내려놓았다.
“우리 배는 종종 이름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을 태웠어. 상처 입은 병사도 있었고, 낯선 나라 말을 하는 여행자도 있었지. 그날은 폭풍이 너무 심해서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정신도 없었다네.”
“문서가 물에 젖었습니까?”
“젖기 직전이었지. 작은 천 가방에 들어 있었는데 바깥쪽이 찢어졌어. 내가 방수 실로 묶었네.”
내 심장이 빨라졌다. 하지만 나는 입을 다물었다. 같은 매듭을 사용한 가방이 여럿일 수 있다.
“그 가방에 어떤 표식이 있었습니까?”
“동그라미 셋이 아니라 작은 바늘 모양이었어. 정확히 기억하는지 자신은 없지만.”
우리가 찾는 금고 봉투에는 점 세 개가 있었다. 소렌이 기억한 바늘은 전혀 다른 모양일 수도 있었다.
“포장할 때 안쪽 종이도 보셨나요?”
“일부가 밖으로 나왔지. 나는 읽지 못했어. 동그란 글자였고, 글자 사이에 작은 네모가 있었던 것 같네.”
베르의 설명과 비슷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나중에 서로 이야기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당시 누가 그걸 부탁했습니까?”
“정확한 이름은 몰라. 부상자들을 돌보던 사람이었어. 그 사람은 배가 도착하면 문서를 중립 기록소에 맡겨 달라고 했네.”
“왕국 금고가 아니라요?”
“맞아. 왕국에는 보내지 말라고 했던 것 같아.”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금고 봉투는 결국 왕국에 들어갔다. 그게 우연인지, 보관 장소가 바뀐 것인지 더 확인해야 했다.
“왜 왕국을 피하려고 했죠?”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한 이유는 모른다네. 내가 들은 게 정확한지도 장담 못 해.”
그녀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한도윤 씨, 내가 틀릴 수도 있어. 오래전 일이니 그 점을 잊지 말게.”
나는 고개를 숙였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확정된 사실과 기억을 나눠 적겠습니다.”
소렌은 한참 나를 바라보다 웃었다.
“그래. 그럼 얘기할 만하군.”
소렌이 떠나기 전 피코는 그녀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고 싶어 했다. 자기 월급으로 산 새 사탕 두 개였다.
“할머니, 이거 드세요.”
소렌은 사탕을 바라보더니 웃었다.
“내 나이에도 사탕을 먹어도 될까?”
“누가 못 먹게 했어요?”
“아무도.”
“그럼 드시면 돼요.”
나는 그 둘의 대화를 들으며 웃었다. 우리가 복잡한 동의 규정을 배우는 동안 피코는 가장 중요한 질문을 잊지 않고 있었다. 누가 금지했느냐보다 당사자가 원하는가.
소렌은 사탕 하나를 받고 다른 하나는 피코에게 돌려줬다.
“하나는 나중에 먹거라. 오늘 내게 줬다고 네가 다 잃을 필요는 없지.”
피코는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소렌은 우리가 출입 서류를 정리하는 모습을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젊을 땐 저런 종이가 다 쓸모없다고 생각했어. 위험할 때는 누가 서명을 하나. 그냥 사람부터 싣고 떠나는 거지.”
“그때는 맞는 선택이었을 겁니다.” 내가 말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어떤 사람은 배에 탔는지도 남지 않았더군.”
그녀는 손등의 화상 자국을 가만히 쓸었다.
“남기려고 쓴 글이 오히려 사람을 다치게 할 때도 있었어. 그래서 기록을 안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지.”
“기록을 없애면 나중에 도움받을 길도 사라질 수 있습니다.”
“맞아. 살아 있는 사람에게 그걸 선택할 기회를 줘야 했겠지.”
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소렌이 바로 한국어 원문을 지킨 사람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어도, 기록과 사람 사이에서 수없이 고민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였다.
그녀가 돌아갈 마차를 기다리는 동안 루시아가 손등의 화상 자국을 보고 물었다.
“전쟁 중에 다치셨습니까?”
“구호선 화덕이 넘어졌어. 바람이 심했지.”
“치료는 제대로 받으셨나요?”
“그땐 물자가 부족해서 그냥 버텼어. 시간이 지나니 이렇게 남더군.”
루시아는 잠시 그녀의 손을 바라봤다.
“제 검에 남은 흠집은 자랑했는데, 누군가의 상처는 그러지 못하는군요.”
소렌은 뜻밖에도 크게 웃었다.
“자랑해도 괜찮아. 난 그날 화덕을 붙잡아서 배에 불이 안 났거든.”
루시아는 눈을 크게 떴다.
“그렇다면 아주 훌륭한 전투였군요.”
“검은 한 번도 안 들었는데?”
“사람을 지켰잖아요.”
둘은 한참 웃었다. 나는 제르칸에게 보여 줄 만한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기사단장이 사람을 구하는 일을 최고의 전투라고 부르고 있었다.
소렌은 마차에 오르기 직전 나를 불렀다.
“한도윤 씨. 그 문서가 결국 자네 것이라 해도, 오래된 사람들이 했던 일을 전부 죄라고 생각하지는 말게.”
“죄라고 단정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잘못된 선택이 있었다면 바로잡고 싶습니다.”
“그렇겠지. 그게 젊은 사람의 몫일 테니까.”
나는 머리를 숙였다. 소렌의 마차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남긴 것은 기록보다 먼저 사람을 바라보는 태도였다.
그녀가 돌아간 뒤 우리는 곧장 중립 기록관에 연락했다. 아레인은 당시의 중립 기록소 접수장을 보존하고 있었다. 기록을 대조하려면 옛 항구 지도를 확인해야 했는데, 현재 도로와 부두 배치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루시아가 큰 지도를 탁자 위에 펼쳤다.
“이 길을 따라가면 기록소가 있나?”
“옛 기록소가 있었던 자리입니다.” 라델이 말했다.
“지금은 뭐가 있지?”
“작은 학교가 있습니다.”
우리는 수업이 끝난 뒤 학교를 찾았다. 낡은 기록소 건물의 벽 일부가 교실로 쓰이고 있었다. 교장은 처음에는 출입을 망설였지만, 학생들이 없는 공간에서 건물의 이전 기록을 확인하는 조건으로 허가했다.
“아이들 교육에 지장이 없도록 해 주세요.”
“당연하죠.”
피코가 물었다.
“여기서도 사탕을 팔아요?”
“학교 앞 가게에서만 팝니다.”
“나중에 꼭 가 봐야겠네요.”
나는 피코의 관심사를 학교와 별도로 관리해야 할 것 같았다.
교실 뒤편 창고에는 오래된 접수대가 남아 있었다. 나무 서랍에는 몇 장의 낡은 출입장이 있었고, 날짜별 방문 건수가 적혀 있었다.
[긴급 문서 1건 / 중립 기록소 임시 접수.]
“번호가 없네요.” 내가 말했다.
“당시 폭풍으로 접수번호 발급 장치가 고장 났다는 부기가 있습니다.” 라델이 설명했다.
우리는 기록의 다음 줄을 확인했다.
[수령 대기자 미확인 / 이동 보관.]
“어디로 이동했습니까?”
“‘왕국 관할 안전 보관’이라고만 적혀 있습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뜨며 종이를 읽었다. 소렌의 기억과 문서가 어느 정도 만났다. 중립 기록소에 임시 접수된 서류가 왕국의 안전 보관으로 이관된 기록이 있었다. 다만 이것이 6-17인지 여전히 확정할 수는 없다.
그때 창고 밖에서 아이들 목소리가 들렸다. 방과 후 청소 당번이 남아 있던 것이다. 작은 소년이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저씨들, 여기서 보물 찾으세요?”
루시아가 대답하려는데 피코가 먼저 말했다.
“응! 아주 오래된 편지 보물!”
“그럼 왜 슬픈 얼굴이에요?”
아이는 내게 물었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보물을 찾으면 좋은데, 누가 잃어버린 건지 아직 모르거든.”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주인을 찾으면 되겠네요.”
간단한 말이었다. 어른들이 여러 번의 심의와 금고 열람을 거쳐 겨우 도달한 원칙을 아이가 한 번에 말했다.
그날 학교에 필요한 수선 비용과 역사 기록 보존 비용도 따로 검토하기로 했다. 오래된 기록소 건물이 무너지면 학교 아이들이 먼저 위험해진다. 기록을 지키겠다고 건물을 불편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마왕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루시아가 말했다.
“그 여자가 말한 부상자 돌보는 사람, 한국인일까?”
“모르겠어요. 한국어를 읽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고, 누가 맡긴 물건만 전했을 수도 있죠.”
“그래도 실마리는 있군.”
“네. 중립 기록소를 거친 서류가 왕국 금고로 이동했다는 경로는 생겼어요.”
학교에서 나온 뒤 교장은 우리를 작은 운동장으로 안내했다. 옛 기록소의 깃대가 아직 남아 있었는데, 아이들은 그것을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미끄럼틀 기둥이라고 불렀다.
“여길 문화재로 보호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장이 말했다. “그런데 보호 구역으로 지정되면 아이들 운동 공간이 줄어들까 걱정입니다.”
나는 깃대와 놀이터를 번갈아 봤다.
“원형을 남기는 방법과 아이들이 안전하게 쓰는 방법을 함께 찾으면 좋겠습니다.”
루시아가 기둥을 만지더니 말했다.
“위쪽 연결부가 조금 흔들리는군.”
교장의 얼굴이 굳었다.
“위험합니까?”
“당장 아이들이 기대지 않도록 표시해야겠어요. 정확한 점검은 시설 기술자가 해야 합니다.”
우리는 임시 통제선을 설치하고 관리실에 정식 점검을 요청했다. 아이들은 놀이터 한편에서 기다리며 피코에게 질문을 쏟아 냈다.
“임프는 불을 뿜어요?”
“저는 빵을 잘 먹어요!”
“마왕성에서 자요?”
“네. 방도 있어요.”
“마왕님 무서워요?”
피코가 한참 생각했다.
“가끔 금박 접시 살 때 무서워요.”
아이들이 깔깔 웃었다. 나도 웃었다. 마왕의 위엄은 이런 식으로 무너지는구나 싶었다.
교장은 우리가 돌아가기 전 고맙다고 말했다.
“오래된 기록을 찾는 분들이 와서 아이들 안전까지 봐 줄 줄은 몰랐습니다.”
“저희도 기록이 있는 건물을 이용했으니까요.”
나는 출입 허가서의 마지막 칸에 원상 복구 확인을 적었다. 학교는 기록소의 옛 건물을 빌려 쓰는 곳이 아니라 지금 아이들이 생활하는 곳이었다. 오래전 사람의 흔적을 찾으면서 현재의 사람들을 밀어낼 수는 없었다.
저녁에 아레인이 보낸 확인서에는 중요한 문구가 있었다.
[옛 중립 기록소에서 왕국 안전 보관소로 이관한 긴급 문서 1건. 이관 일자: 폭풍 후 닷새. 원본 접수번호: 임시. 문서 내용: 비공개.]
나는 그 줄을 읽으며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금고 보관까지 닷새의 공백이 왜 생겼는지 설명할 가능성이 커졌다. 그렇다고 완전히 같은 물건임을 증명한 것은 아니었다.
“도윤 님.” 피코가 물었다. “그때 문서를 맡긴 사람도 월급 받았을까요?”
“글쎄. 구호 일을 했다면 수당도 없이 일했을 수도 있어.”
“그럼 누가 고맙다고 말해 줬을까요?”
나는 소렌의 지친 손을 떠올렸다.
“적어도 우리는 감사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
나는 다음 날 소렌에게 보낼 편지를 썼다. 직접 들은 증언을 정리한 확인서를 동봉하고, 사실과 다르게 적힌 부분이 있으면 고쳐 달라고 부탁했다.
편지 마지막에는 한 문장을 적었다.
[폭풍 속에서 무언가를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편지의 마지막 문장을 쓰고도 나는 바로 봉투를 붙이지 못했다. 소렌이 증언을 수정하거나 철회하고 싶다면 그럴 수 있다는 안내를 덧붙였다. 오래전 기억은 틀릴 수 있고, 틀린 기억을 바로잡는 것이 부끄러운 일은 아니었다.
피코가 내가 쓴 편지를 읽어도 되느냐고 물었다. 나는 수취인 허락이 필요한 내용이 있다며 일부만 보여 줬다. 피코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기 종이에 짧은 글을 썼다.
[할머니, 사탕 맛있게 드세요.]
나는 웃으며 그 종이를 함께 넣어도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피코는 직접 봉투를 닫겠다고 했다. 조그만 손이 정성스럽게 종이를 접는 모습을 보며, 오래된 편지도 처음에는 이렇게 누군가가 손으로 접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실제로 내 봉투를 묶은 사람이 아니었더라도 그 말은 참일 것이다.
제159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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