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코가 갑자기 편지를 쓰겠다고 선언했다.
“누구한테?”
“도윤 님한테요.”
“나 지금 여기 있는데?”
“그래도 편지로 받으면 기분 좋잖아요.”
나는 부정할 수 없었다. 휴대전화에서 엄마의 오래된 문자를 확인했을 때 느꼈던 감정이 떠올랐다. 편지는 누가, 언제, 어디에서 적었는지에 따라 무게가 달라진다.
피코는 아주 진지하게 종이를 펼쳤다. 깃펜을 잉크병에 넣었다 뺐다 하더니 첫 줄을 썼다.
[도윤 님. 월급날 사탕 감사드립니다.]
“내가 사탕을 사 줬나?”
“제 월급 지켜 주셨잖아요. 그걸로 샀으니까요.”
나는 웃었다. 그리고 피코에게 편지 봉투를 접는 방법을 가르쳐 줬다. 나도 한국에서 편지를 자주 쓰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종이 끝을 아무렇게나 찢으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오전에는 중립 항구의 구호선 인명대장을 조사했다. 다르크가 보내 준 기록에 따르면 문제의 폭풍 당시 작은 배 한 척이 본선에서 따로 움직였다. 이름은 ‘새벽등’이었다.
“왜 본선에서 떨어졌죠?” 루시아가 물었다.
“응급 물품과 구조자를 옮기던 보조선이었대요. 본선이 항구에 들어오기 어려울 때 먼저 움직였답니다.”
“배가 침몰했나?”
“그런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돌아온 뒤 승무원 명단이 일부 누락됐어요.”
루시아의 표정이 단단해졌다. 그녀는 종이를 보다가 말했다.
“사람이 사라졌다는 뜻은 아닐 수도 있군.”
“네. 명단이 누락됐다는 것과 실제 사람이 실종됐다는 건 다르죠.”
“예전의 나는 이런 말을 들으면 누가 배신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은?”
“우선 밥을 먹였는지부터 확인하고 싶다.”
루시아는 정말 많이 바뀌었다. 물론 누가 피코의 사탕을 훔쳐 먹었다고 하면 여전히 검집을 들고 달려갈 것이다.
새벽등의 마지막 배달 기록은 항구 외곽에 있는 오래된 요양원으로 이어졌다. 요양원은 바닷바람이 센 언덕에 있었다. 문 앞에는 빨래가 줄줄이 걸려 있었고, 안에서는 약초 냄새가 났다.
원장은 고령의 수인이었고 이름은 헤이마였다. 그녀는 낡은 배 이름을 듣자 무릎 위에 올려둔 털실을 내려놓았다.
“그 배의 소식을 이렇게 오랜만에 듣네요.”
“기록을 찾고 있습니다. 봉투 하나가 그 배를 거쳤을 가능성이 있어서요.”
“봉투는 많았어요. 폭풍 날에는 먹을 것을 적은 종이도 약을 적은 종이도 서로 뒤섞였으니까.”
헤이마는 우리를 오래된 수납장 앞으로 데려갔다. 바닥에 물이 새지 않도록 다리를 높인 상자들이 놓여 있었다.
“여기에 당시 인수증 사본이 있어요.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보존관과 함께 열람하면 됩니다.”
“직접 읽어 주실 수는 없습니까?”
“제 손이 떨려서요. 안경도 바꿔야 하고.”
피코가 나를 봤다. 나는 헤이마의 시력 검진부터 제안하고 싶었지만, 먼저 기록을 다루는 데 불편하지 않은지 물었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읽는 것보다 이야기하는 게 좋아요.”
인수증에는 날짜와 약품 수량, 배달 대상의 확인 표식이 남아 있었다. 우리가 찾던 봉투 번호는 없었다. 대신 한 줄이 눈에 들어왔다.
[언어 미상 문서 / 긴급 보호 요청 / 전달 완료 표시 없음.]
“이게 뭘까요?”
“그날 배달부가 글자를 못 읽어서 서류를 돌려보냈다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헤이마가 말했다.
“어떤 글자였나요?”
“나는 보지 못했어요. 배달부는 우리에게 수상한 주문서가 있다고 했죠. 우리는 그런 것보다 식량이 먼저라며 정리할 때까지 잠시 맡기라고 했고요.”
배달부의 이름은 베르였다. 그는 이미 늙어 항구의 작은 정비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우리는 요양원을 나와 그를 찾아갔다.
베르는 오른쪽 팔을 잘 쓰지 못하는 노인이었다. 그는 배달 당시의 기억을 더듬다 손바닥을 펴 보였다.
“나는 이름을 읽지 못했네. 글자가 물고기 비늘처럼 둥글었거든.”
“둥글었다고요?”
“우리 글자하고 달랐어. 네모 속에 동그라미가 있는 것도 같았지.”
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한글일 가능성은 있었다. 하지만 그가 실제로 본 글자와 내 이름이 같은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종이를 어디로 보냈습니까?”
“본선으로 돌려보내려고 했는데 폭풍 때문에 길이 막혔네. 그때 어떤 장인이 이건 젖으면 큰일 나니 방수천에 넣으라고 했지.”
“그 장인은 누구였어요?”
“기억이 안 나. 그때는 다들 서로 이름도 묻기 어려웠어.”
베르는 오래된 손가락으로 매듭을 흉내 냈다. 모라가 설명한 것과 비슷한 응급 매듭이었다.
“이렇게 묶어 줬지. 두 번 당기면 풀리고, 젖은 손으로도 괜찮아.”
피코가 얼른 자신의 사탕 봉지를 보여 줬다.
“이거요?”
베르는 크게 웃었다.
“그래. 사탕을 운송하러 왔나?”
“아뇨. 저희는 비밀을 운송 중입니다.”
나는 피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말을 멋있게 하는 재능도 일종의 기술이다.
베르가 기억하는 당시 항구에는 배달 일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식량 배급, 부상자 인계, 소독용 약품 공급까지 전부 한 창구에서 처리했다고 했다.
“우린 사람 이름을 적는 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어.” 노인이 말했다. “이름이 장부에 들어가면 누군가 그 사람을 끌고 가기도 했거든.”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럼 이름이 없는 사람이 많았습니까?”
“그랬지. 어떤 사람은 본명을 적지 않았고 어떤 사람은 자기 이름을 모르는 아이였어.”
그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손끝이 자꾸 떨렸다. 나는 질문을 조금 바꿨다.
“그때 문서에 이름을 적을지 말지 누가 정했나요?”
“원래는 본인이 정해야 했어. 그런데 비가 쏟아지고 사람들이 실려 들어오면 어른들도 엉망이 됐지.”
“그래서 기록이 잘못됐을 수도 있겠군요.”
“그럴 수 있지.”
나는 문득 지금까지 따라온 한국어 표본을 떠올렸다. 누군가 사람을 보호하려고 이름을 임시로 적었는데, 그 기록이 다른 곳으로 넘어가 정식 계약처럼 보였을 가능성. 하지만 이 항구의 사례가 바로 내 기록의 원인이라는 증거는 없었다.
베르는 창가에 놓인 낡은 나무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구호선의 작은 명패와 부러진 깃펜, 그리고 찢어진 노트 한 장이 있었다.
“이건 내 물건이야. 증거가 될 만한 건 아니지.”
노트에는 글자가 아니라 그림이 있었다. 작은 배와 두 사람, 물이 넘치는 부두, 그리고 붕대가 감긴 팔.
“그림을 그리셨네요.”
“글을 잘 못 썼거든. 그림을 그리면 다음 날 뭘 했는지 기억할 수 있었어.”
피코가 노트를 조심스럽게 바라봤다.
“그럼 저도 사탕 장부를 그림으로 그려도 돼요?”
“물론이지.” 베르가 말했다. “다만 누구한테 몇 개를 줬는지는 알아볼 수 있게 그려야 해.”
피코는 이 말을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나는 그에게 사탕 그림 여섯 개가 적힌 노트를 선물할 계획을 세웠다.
베르의 그림 중 하나에는 긴 천 가방을 어깨에 멘 사람이 있었다. 얼굴은 그려져 있지 않았고 손등에 점이 두 개 찍혀 있었다.
“이건 누구입니까?” 내가 물었다.
“누군지는 몰라. 그날 손을 다친 사람이 있었는데 상처를 기억하려고 그렸네. 그림 속 점이 화상 자국일 수도 있고 물집일 수도 있어.”
“그 사람이 봉투를 묶었습니까?”
“모르지. 그림을 그렸다고 모두 같은 사람인 건 아니야.”
그 답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노인은 자기 기억이 어디까지인지 알고 있었다.
나는 노트를 가져가도 되느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페이지를 복제할 수 있는지, 다른 사람 얼굴이나 이름이 공개되지 않도록 해도 되는지 물었다.
“내게 있는 건 이거 하나뿐이네.”
“그럼 복제본만 만들겠습니다. 원본은 베르 씨가 간직하세요.”
노인은 가만히 웃었다.
“다른 사람들이 자꾸 내 기억을 사고 싶다고 했거든. 자네는 기억 대신 사본만 달라 하네.”
“기억은 주인 것이니까요.”
베르는 내 손을 한참 붙잡았다. 그 손은 거칠고 따뜻했다.
“그때 글자를 못 읽었다는 게 평생 부끄러웠어. 누군가 소중한 말을 남겼을지도 모르는데.”
“읽지 못했다고 잘못한 건 아닙니다. 젖지 않게 지켜 주셨잖아요.”
노인은 눈을 감았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내가 찾는 이름보다 이 사람의 긴 세월이 먼저였다.
베르가 설명한 운송 경로는 아직 불완전했다. 기록에 따르면 배는 요양원에 도착했고, 글자를 못 읽는 배달부가 서류를 따로 맡았다. 그 다음 단계는 불분명했다. 그러나 적어도 봉투가 처음부터 왕국 소환 준비국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닐 가능성이 커졌다.
그때 정비소 바깥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물자를 나르는 젊은 인부가 무거운 상자를 들어 올리다가 허리를 다친 것이다. 루시아가 즉시 달려가 상자를 받쳤고,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수레를 가져와 달라고 부탁했다.
“무리해서 일으키지 마세요. 의료인부터 부릅시다.”
베르는 절뚝이며 안쪽에서 낡은 의자를 가져왔다. 그는 인부의 손에 물 한 잔을 쥐여 줬다.
“요즘 젊은 애들은 일하다 다치면 쉬는 것도 눈치를 보더군.”
정비소 주인이 다급하게 말했다.
“오늘 배달을 못 끝내면 위약금이 붙습니다.”
“부상자를 그대로 일하게 할 수는 없죠.” 내가 말했다.
“누가 대신 끝내 줍니까?”
나는 운송계약서부터 확인했다. 폭풍 경보가 내려진 날에는 대체 운송 일정 조정을 요청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었다. 오늘은 폭풍 경보까지는 아니었지만 장비 고장으로 안전 문제가 발생했다는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계약 상대와 일정 조정을 협의합시다. 인부에게 책임을 떠넘기지 말고요.”
주인은 한동안 말이 없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부상자는 요양원 의료진에게 인계됐다. 실제 치료비와 업무 중 사고 여부는 나중에 확인해야 했지만, 적어도 오늘 그를 다시 상자 앞에 세우지는 않았다.
베르는 내게 말했다.
“자네는 글자를 찾으러 와서 자꾸 사람을 돕는군.”
“그 글자도 결국 어떤 사람이 썼을 테니까요.”
노인은 내 얼굴을 오래 바라봤다.
“그때 그 종이를 지키려고 했던 사람도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네.”
“어떤 말을요?”
“글자는 잃어버리면 다시 적을 수도 있지만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고.”
내가 숨을 멈췄다. 다만 그 말이 당시 직접 들은 것인지,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것인지도 확인해야 했다.
“그 사람을 기억합니까?”
“얼굴은 흐릿해. 대신 봉투를 묶던 손은 기억나. 손등에 화상 자국이 있었어.”
새로운 단서였다. 하지만 화상 자국만으로 누군가를 특정할 수는 없었다.
정비소 안쪽에는 작은 게시판이 걸려 있었다. 베르가 옛 동료들의 이름을 적어 놓은 곳이었다. 어떤 이름 아래에는 ‘소식 들음’, 어떤 이름 아래에는 ‘확인 중’이라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살아 있는지 확인되지 않은 분들도 계십니까?” 내가 물었다.
“그렇지. 소식이 끊긴 사람도 있고 다른 항구로 떠난 사람도 있어.”
“확인 중이라는 게 사망을 뜻하지는 않겠군요.”
“당연하지.”
베르는 게시판 가운데의 빈칸을 가리켰다.
“예전에 누가 나를 찾아오면 언제든 새 이름을 적을 수 있게 놔뒀어.”
피코가 신기한 듯 물었다.
“이름이 없으면 자리가 없는 거예요?”
“아니. 자리는 있는데 이름을 모르는 거지.”
그 말이 오래 남았다. 이름이 확인되지 않았다고 누군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마왕성 급여 명단에서 직원 일곱 명이 사라졌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은 일하고 있었는데 화면에서만 없었다.
나는 베르에게 게시판을 사진처럼 복제해도 되는지 물었다. 그는 거절했다.
“저 이름들 중에는 남에게 공개되길 원하지 않는 사람도 있네.”
“알겠습니다.”
나는 더 설득하지 않았다. 대신 필요한 특정 정보가 있다면 원래 기록 보관기관에 정식 문의하겠다고 말했다. 베르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고맙네. 가끔은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는 사람이 가장 좋은 손님이지.”
“오늘은 사탕 매듭 기술은 받아 가는데요.” 피코가 말했다.
노인은 호탕하게 웃었다. 게시판 옆에 적힌 ‘확인 중’이라는 세 글자가 이상하게 따뜻해 보였다. 누군가 잊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돌아오는 길에 피코가 말했다.
“도윤 님, 편지란 건 참 신기하네요.”
“왜?”
“누가 썼는지는 몰라도 오래전 사람이 누굴 지키려고 했는지는 조금 알 것 같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내 이름을 미리 안 사람이 궁금했을 뿐인데, 이제는 그 봉투가 폭풍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가 조금 더 중요해졌다.
베르에게 배운 매듭을 한 번 더 연습했다. 피코는 사탕 봉지를 내밀었고, 나는 웃으며 그것을 묶어 줬다.
“도윤 님, 이거 열 때는 제 허락 받으셔야 해요.”
“당연하지.”
피코의 작은 봉지에도 주인이 있었다. 그 점만은 아주 명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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