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금고 방문에 나는 새 신발을 신고 갔다. 지난번 침수 복도에서 미끄러질 뻔했기 때문이다.
피코는 내 신발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도윤 님, 출세하셨어요!”
“신발 하나 샀다고?”
“마왕성 회계사가 왕국 금고에 새 신발 신고 가잖아요. 엄청난 거죠.”
“너도 어제 새 모자 샀잖아.”
“제 모자는 사탕 주머니가 달렸어요. 비교가 안 되죠.”
맞는 말이었다. 사탕 주머니가 달린 모자는 훨씬 실용적이었다.
금고에서는 이스카가 장갑을 낀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수된 통로는 막아 놓았고, 봉인물 6-17은 별도의 건조 보존실로 옮겨져 있었다.
“오늘은 내용물을 열지 않습니다. 외부 표지에 한도윤 씨의 이름이 적혀 있는지부터 확인할 겁니다.”
“봉투 겉을 보는 데도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필요한가요?”
“열두 명의 사생활을 지키려면, 어떤 날은 열두 명이 앉아 있어야 하죠.”
이스카는 담담하게 말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었다. 옆의 아레인은 웃지 않았다. 아무래도 진담인 모양이었다.
표지 확인을 위해 가림막이 설치됐다. 표지를 한 번에 보여 주는 대신 신청자와 관련된 영역만 빛에 비추는 방식이었다. 나는 마법 유리 앞에 앉아 작은 창 하나를 내려다봤다.
[제6정산금고 6-17. 외부세계 언어 자료.]
그 아래, 마치 다른 종이에서 오려 붙인 듯한 글자가 있었다.
[한도윤.]
나는 무심코 손을 뻗었다가 유리에 손끝을 부딪쳤다.
“실제 원문입니까?”
“겉표지에 적힌 표기입니다. 안쪽 원본과 같다는 보증은 없습니다.” 이스카가 말했다.
나는 가까이 들여다봤다. 글자는 분명 한글이었다. 획의 높이와 받침의 위치가 이상하게 친숙했다. 이세계의 번역 마법이 돌린 글자가 아니었다. 다만 친숙하다는 것만으로 한국인이 썼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이 보고 베꼈을 수도 있으니까.
피코가 옆에서 속삭였다.
“도윤 님 이름 예쁘네요.”
“갑자기?”
“제가 읽는 글자하고 다르게 생겼는데, 도윤 님이 직접 읽을 수 있잖아요.”
나는 작게 웃었다.
“응. 어렸을 때부터 쓰던 글자야.”
“그럼 좀 반갑겠네요.”
“반갑기도 하고 무섭기도 해.”
이스카가 표지 아래쪽을 확인했다. 작은 점 세 개가 찍혀 있었고, 오른쪽에는 검은 실이 교차하고 있었다. 우리는 예전에 세 점 표식을 조사한 적이 있다. 공통 의미가 없는 유사한 도장이 여러 조직에 존재했다. 이번에도 의미를 바로 연결할 수는 없었다.
“실의 방향이 조금 다릅니다.” 아레인이 말했다.
“무슨 차이죠?”
“봉투를 묶는 방법일 수 있습니다. 암호라고 단정할 이유는 없어요.”
나는 반쯤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몇 달간 누가 점 세 개만 찍어도 대단한 음모를 상상하곤 했다. 그러나 우리 회사 급식실에서도 식권에 점 세 개를 찍는다. 그건 단지 세 번째 메뉴라는 뜻이다.
이스카는 표지의 다른 부분을 가렸다.
“이제 보존 목적 표시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원어 표본. 재전사 금지. 원문 대조 후 폐기 여부 결정.]
“재전사 금지?” 내가 물었다.
“이미 옮겨 적힌 자료가 있을 때 다시 필사하지 말라는 뜻일 수 있습니다. 당시의 용례를 확인해야 합니다.”
“왜 이런 문구가 붙었을까요?”
“추측은 여러 가지죠. 잘못 옮길 우려, 저작권 분쟁, 신상 정보 보호. 아직 정답을 모릅니다.”
마법 유리가 꺼지자 방 안은 잠시 조용해졌다. 나는 손을 내려다봤다. 어릴 때 초등학교 숙제를 하며 수도 없이 적던 세 글자가 낯선 금고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레인 씨, 혹시 제가 원문 전체를 복사해 달라고 하면요?”
“아직은 거절해야 합니다. 하지만 당사자 해당 부분의 정확한 복제와 읽기 지원은 신청할 수 있어요.”
“다른 사람 이름이 가려져 있다면 가능합니까?”
“심의 결과에 따라 가능하죠.”
나는 심호흡을 했다. 결정을 서두를 이유는 없었다. 이름을 발견했지만 그것이 곧 진실은 아니었다.
마법 유리를 통해 본 내 이름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획이 특별히 예쁘지도, 일부러 숨긴 암호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더 이상한 건 그래서 더 마음이 흔들렸다는 점이다.
나는 아레인에게 물었다.
“저 글씨가 처음 여기에 적혔다는 증거는 있나요?”
“아직 없습니다. 겉표지는 교체됐을 수도 있고, 다른 문서에서 옮겨 적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이름이 원본보다 늦게 붙었을 수도 있겠군요.”
“네. 그 반대도 가능하지만 아직 판단하지 않습니다.”
이스카는 표지의 사진을 작은 칸으로 나눠 보여 줬다. 위쪽 한자는 이 세계의 기록 문자였고, 아래쪽 한글 표기는 먹의 번짐이 달랐다. 나는 그것이 서로 다른 날 쓰인 흔적인지 물었다.
“먹의 농도만으로 적은 날짜를 말할 수는 없어요.” 이스카가 답했다. “특히 물에 젖었다 마른 종이라면 더 그렇죠.”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뭔가 확실해 보이면 꼭 하나씩 걸리는군요.”
“좋은 질문을 하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피코가 낮게 속삭였다.
“도윤 님, 오늘은 질문 잘하는 날이에요.”
“그렇구나.”
“그럼 질문 수당은 없어요?”
“너도 이제 보수 체계에 관심이 많아졌네.”
피코는 자랑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날 금고에는 다른 방문객이 한 명 있었다. 아들 소식을 확인하러 온 노부인이었다. 전쟁 때 사라진 아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고 싶어 했지만 보존관은 그날 바로 원본을 공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내 아들 이름인데 내가 왜 못 봅니까?” 노부인이 물었다.
보존관은 규정을 반복했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듣다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이분이 지금 확인할 수 있는 공개 가능한 기록은 없습니까?”
보존관이 눈을 깜빡였다.
“전쟁 포로 명부의 일부와 안전 확인 연락 기록은 공개 범위입니다.”
“그럼 먼저 그것을 안내드리죠. 원본 공개 심의는 따로 신청하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노부인은 한동안 나를 바라봤다.
“그 종이에도 없으면 어떡합니까?”
“없다는 결과를 바로 아드님의 사망이나 실종 확정으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어떤 명부인지, 무엇을 기록하지 않았는지도 함께 말씀드릴게요.”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의 손에서 접수증을 빼앗지 않았다. 서명할 곳을 가리키고, 직접 읽을 수 있도록 시간을 줬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자기 이름을 적었다.
몇 분 뒤 공개 명부에 아들의 이름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별도의 안전 확인 연락 목록에 같은 이름을 가진 군인이 있었다. 동명이인일 가능성이 있어 추가 확인이 필요했다. 노부인은 소리 내어 울지도, 웃지도 않았다.
“그래도 다음에 어디를 찾아야 하는지는 알겠네요.”
“네. 원하시면 담당자가 연락 기록을 확인하도록 정식 요청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나의 손을 잠시 잡았다.
“젊은 양반, 고맙습니다.”
노부인이 돌아간 뒤 나는 한참 가만히 있었다. 나도 그녀와 다르지 않았다. 이름 하나를 발견했다는 이유로 모든 답을 얻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다음에 어디를 찾아야 하는지는 조금 알게 됐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왕국 변두리의 작은 제본소에 들렀다. 봉투를 묶은 검은 실의 제작처를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제본소 주인은 키가 작은 수인 여성으로 이름은 모라였다. 그녀는 검은 실을 손끝으로 몇 번 문지르더니 말했다.
“이건 비단이 아니에요. 배의 방수포를 꿰매던 억센 실이죠.”
“금고 봉투에 그런 실을 썼다고요?”
“비상용 포장을 했다면 그럴 수 있죠. 전쟁 중엔 재료가 없었으니까요.”
모라는 자신의 오래된 재료함에서 비슷한 실뭉치를 꺼냈다. 실에는 남색 가루가 묻어 있었다.
“이 가루가 뭡니까?”
“방수 염료예요. 이걸 바르면 물에 조금 젖어도 잘 안 삭아요.”
나는 지난번 금고 누수 사고를 떠올렸다. 누군가는 아주 오래전에 물에 젖을 것을 걱정하며 이 봉투를 묶었을지도 모른다.
“그럼 어디서 썼는지는 알아낼 수 있습니까?”
“원산지는 여러 곳이에요. 실만 가지고 특정 배를 찾을 수는 없죠. 대신 염색 안료의 입자 크기와 매듭 방법은 비교할 수 있어요.”
“비용은요?”
“정식 분석은 은화 네 닢. 원료 표본을 대조하는 간단한 확인은 은화 한 닢.”
나는 잠시 망설였다. 금고 조사 예산에서 은화 네 닢은 작지 않았다.
“우선 한 닢짜리 검사를 하겠습니다. 이유 없이 큰 돈을 쓰고 싶진 않아요.”
모라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손님이군요. 대개는 돈부터 내밀며 당장 범인을 찾아 달라고 해요.”
“저도 그러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실이 범인이 되겠죠.”
피코가 깔깔 웃었다. 나는 별로 웃기지 않았지만 곧 따라 웃었다. 이 세계 사람들도 말장난을 좋아한다.
제본소 바깥에서는 아이들이 놀이를 하고 있었다. 한 아이가 다른 아이의 이름을 흙바닥에 적었다. 삐뚤빼뚤했지만 아이는 자랑스럽게 친구를 불렀다.
나는 그 모습을 잠시 지켜봤다. 이름을 적는 것은 아주 평범한 행동이었다. 내가 여기서 보고 있는 글자들도 누군가에게는 그저 친구 이름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누군가는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았을까.
표지 확인을 마치고 잠시 휴식하던 중, 피코는 종이에 자기 이름을 써 보겠다고 했다. 이 세계 문자로 ‘피코’를 적더니 그 옆에 내가 한글로 적은 ‘피코’를 가리켰다.
“둘 다 저예요?”
“그래. 발음은 같고 글자는 다르지.”
“그런데 둘 중 하나만 있어도 제가 저라는 걸 아나요?”
“글자만으로는 몰라. 네가 직접 알려 주거나, 다른 정보로 확인해야 해.”
피코는 한참 생각했다. 그러더니 내게 물었다.
“그럼 어떤 종이에 ‘도윤’이라고 써 있어도 도윤 님인지 물어봐야겠네요.”
“바로 그거야.”
그는 무척 만족한 표정으로 자기 이름을 두 번 적었다. 그리고 아래에 조그맣게 덧붙였다.
[사탕을 좋아함. 본인이 확인함.]
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피코의 필체는 삐뚤빼뚤했지만, 그 작은 종이는 어느 신성 계약서보다 확실해 보였다. 적어도 그곳에는 당사자가 직접 한 말이 있었다.
아레인이 우리를 지켜보다 조용히 말했다.
“그 종이는 나중에 멋진 교육 자료가 되겠네요.”
“사탕 관련 부분도 그대로요?” 내가 물었다.
“그게 핵심 아닐까요?”
피코는 곧 종이를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 교육용으로 쓰려면 허락부터 받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다시 한 번 내 조수의 성장을 실감했다.
그날 오후 마왕성에 도착하자 또 다른 소동이 기다렸다. 마왕이 금고 조사 기념으로 ‘한도윤 전용 황금 서명펜’을 만들었다는 소식이었다.
“네가 이제 역사적인 문서를 발견했으니 역사적인 펜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필요 없습니다.”
“금이 아니면 은으로 만들까?”
“그냥 철필이면 됩니다.”
“철필은 내 품위에 맞지 않는다.”
“펜을 쓰는 건 저인데요.”
마왕은 입을 다물었다. 피코가 내 옆에서 속삭였다.
“도윤 님, 그 황금펜 팔면 사탕이 몇 개일까요?”
“그 생각은 하지 말자.”
몰트 실장이 서류를 내밀었다. 직원 중 한 사람이 오늘 사직 의사를 밝혔다는 내용이었다. 나도 모르게 긴장했지만, 내용을 읽고 힘이 조금 풀렸다.
직원은 다른 도시에서 가족과 함께 지낼 기회를 얻어 스스로 회사를 떠나기로 했다. 급여와 근속 확인에 문제가 없었고 인수인계 날짜도 합의돼 있었다.
“사직은 나쁜 일만은 아니군요.” 내가 말했다.
“당연하지요.” 몰트가 답했다. “떠날 자유가 있으니 남을 자유도 의미가 있는 법입니다.”
그 말은 내 상황에도 이상하게 잘 맞았다. 나는 돌아갈 권리를 남겨 둔 채 지금 마왕성에 머무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내 선택을 대신하지 않도록 싸우면서, 나 역시 누군가의 선택을 쉽게 판단하지 말아야 했다.
퇴근 무렵 모라의 간단한 검사 결과가 도착했다.
[실의 원료는 중립 항구에서 널리 쓰인 방수 섬유와 일치 가능. 정확한 제작처는 특정 불가. 다만 표본 실의 매듭법은 기록 운송용 봉투보다 해상 비상 의약품 주머니에서 흔히 확인됨.]
“의약품?” 피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봉투를 묶은 사람은 서류 담당자가 아니라 배에서 응급물품을 다루던 사람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매듭만으로 그 사람의 직업을 확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조사 방향 하나는 생겼다. 왕국 제6정산금고에 들어온 봉투가 처음부터 금고를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누군가 물을 피해 서둘러 포장한 물건이었을 것이다.
나는 수첩에 썼다.
[겉표지에는 한글 이름. 내용과의 동일성 미확인. 방수 실 매듭은 해상 응급물품 방식과 유사. 운송 기록과 별도로 대조할 것.]
마지막 줄을 적다가 웃음이 나왔다.
처음 이세계에 왔을 때 나는 용사 일당에 끼라는 왕의 명령을 거절하고 마왕성에 취직했다. 그런데 지금은 내 이름을 쓴 사람을 찾겠다며 실 매듭을 조사하고 있다.
한국에서 회사를 다닐 때보다 출장 업무가 다양해졌다. 경력기술서에 뭐라고 써야 할지 모르겠다.
[담당 업무: 재무회계, 인사제도 개선, 고대 봉투 감정 보조, 마왕 왕좌 예산 삭감.]
면접관이라면 마지막 항목에서 나를 뽑을까, 도망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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