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국 제6정산금고의 경비 골렘은 나를 보자 팔을 번쩍 들었다.
“침입자 경고. 소환 대상 임시 후보 7.”
“저 이제 임시 후보 아니거든요?”
“확인 중. 임시 후보 7.”
“왕국 지명수배도 취소됐고, 마왕성에서 정식 월급 받고 일합니다.”
“재직 증명 제시.”
나는 가방에서 재직 증명서를 꺼냈다. 골렘은 종이를 눈앞에 붙이고 한참 읽더니 말했다.
“현직 회계 담당. 축하합니다.”
“고마워요.”
“입장료 3닢.”
“축하를 돈 받고 합니까?”
골렘은 대답 대신 작은 접시를 내밀었다.
우리 뒤에서 라델이 이마를 짚었다. 왕국 조사관이 전날 보내 온 입장 허가서에는 분명 입장료 면제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증명서 두 장을 나란히 보여 줬다.
“여기 면제 규정이 있습니다. 확인 요청하죠.”
“규정 갱신 중. 손님은 대기.”
피코가 골렘을 빤히 쳐다봤다.
“혹시 임금은 받으세요?”
“유지 보수 예산으로 운영됩니다.”
“그럼 우릴 그냥 들여보내 주면 유지비가 줄지 않나요?”
골렘이 멈췄다. 입장료를 요구할 때보다 더 긴 정적이었다.
“계산 중.”
나는 얼른 피코를 잡아당겼다. 방금 아주 위험한 경영 컨설팅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잠시 뒤 경비 책임자 헤르단이 나타났다. 그는 매일 골렘에게 같은 질문을 받는 사람처럼 피곤한 얼굴이었다.
“정식 입회인이 확인됐습니다. 입장료는 없습니다. 저 골렘은 오래된 관광객 규정을 읽은 겁니다.”
“여기가 관광지였습니까?”
“예전에는 왕국 국고를 구경하러 귀족들이 왔습니다.”
“아무도 돈을 보지는 못하고 경비만 구경했겠군요.”
헤르단은 처음으로 웃었다.
독립 입회인은 아레인이 지명한 중립 보존 전문가 이스카였다. 은회색 머리의 노인이었는데 손에는 손톱만 한 확대 렌즈를 들고 있었다. 그는 나와 악수하기 전에 사전 확인서를 건넸다.
“오늘 할 수 있는 일은 봉인 상태 확인, 외부 표기 대조, 보존 용기 목록 확인까지입니다. 내용 공개는 별도 판단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알면서 화가 나면 내게 말해도 됩니다. 봉투에게 소리 지르지는 마세요.”
“제가 그렇게 보입니까?”
“회계사가 봉인 금고에 들어갈 때는 대개 그렇습니다.”
이 노인은 사람 보는 눈이 있었다.
상자를 본격적으로 검사하기 전 이스카는 작은 흰 천을 탁자 위에 깔았다. 그 위에 놓인 것은 열쇠가 아니라 봉인에 사용된 왁스의 사진이었다.
“왁스가 다른 시대의 것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불순물을 비교해 볼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 정확한 연도를 단정하지는 못해요.”
이스카가 가루 한 알을 확대했다. 그 안에는 아주 작은 조개껍데기 조각이 있었다. 나는 사진을 가까이 들여다봤다.
“바다에서 가져온 겁니까?”
“해안 지역에서 흔히 쓰던 왁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왕국의 금고에서도 같은 원료를 썼어요.”
“범위를 좁히는 단서라고 보기엔 부족하군요.”
“네. 세상이 가끔은 정확하지 않은 단서로 가득합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피코를 바라봤다. 피코는 왁스 사진보다 이스카의 확대 렌즈에 관심이 많았다.
“저걸로 사탕을 보면 어떻게 돼요?”
“열 배 커 보이겠지.”
“그럼 열 배 먹은 기분일까요?”
“먹고 나면 배는 똑같이 고플 거야.”
피코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과학의 진실이 한 임프를 좌절시킨 순간이었다.
이스카는 우리를 보며 웃다가 진지하게 질문했다.
“한도윤 씨, 표지에 자기 이름이 적힌 원본이 존재하는 걸 알게 되면 당장 가져가고 싶지 않습니까?”
“당연히 그렇죠.”
“하지만 원본이 다른 사람의 안전까지 지켜 온 물건이라면요?”
“그럼 제 이름만 들어 있다는 이유로 가져갈 순 없겠죠.”
“그 대답을 들으려고 한 질문입니다.”
그는 보존 대장의 과거 복제 이력을 보여 줬다. 원본을 옮기기 전에 사본을 만들려고 했다가 실패한 기록이 있었다. 당시 기술로는 젖은 종이의 글자를 제대로 옮길 수 없었던 듯했다.
[복제 실패. 일부 문자 소실 위험. 원본 유지 권고.]
“누군가 저 글자를 지우지 않으려고 했네요.” 내가 말했다.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비용을 아끼려다 복사를 안 한 것인지, 문자 보존 때문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요.”
라델이 입을 열었다.
“왕국이 일부러 내용을 감췄다는 의혹도 나오고 있습니다.”
“의혹이 나오는 것과 사실은 다르죠.”
“맞습니다. 하지만 기록이 공개되지 않을수록 그런 소문이 커집니다.”
“그럼 공개할 수 있는 근거부터 만들어야겠네요. 무리하게 뜯어서 원본을 망가뜨리는 일은 막고요.”
이스카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나중에 그가 왜 그토록 조심스러운지 조금 이해했다. 그는 예전에 급하게 원본을 복원하려다 중요한 글자가 찢어진 사건을 겪었다고 했다.
“그때 책임을 지셨나요?”
“공동 작업이었지만, 저는 제 실수를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빠른 성과보다 오래 남을 결과를 택합니다.”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늘도 오래 남는 쪽으로 하겠습니다.”
우리는 악수했다. 봉인된 문서 앞에서 나눈 아주 조용한 약속이었다.
금고 안은 놀랄 만큼 조용했다. 벽에는 상자들이 층층이 박혀 있었고, 각 상자에 날짜와 분류 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라델이 안내한 통로 끝에는 금속 문이 세 겹 겹쳐 있었다.
첫 번째 문 앞에 헤르단이 열쇠를 꽂았다.
“왕국 보존 책임 확인.”
두 번째 문에서는 이스카가 쇠판에 손바닥을 올렸다.
“독립 입회 확인.”
세 번째 문에서는 내게 서명을 요구했다.
“왜 제가 마지막 문을 여는 거죠?”
“당사자 열람 신청이니 허용 범위 내에 동의했다는 기록이 필요합니다.”
나는 서명란 아래를 꼼꼼히 읽었다. ‘자료 내용에 동의한다’가 아니라 ‘지정 범위에서 입회 열람을 요청한다’는 문구였다. 이번에는 참을 만했다.
“좋습니다. 서명하겠습니다.”
피코도 자기 몫의 보조인 출입증을 받았다. 출입증에는 커다란 글씨로 적혀 있었다.
[간식 섭취는 지정 구역에서.]
“저만 왜 이래요?”
“네가 직접 계약서에 넣었잖아.”
“앗.”
우리 앞에 제6정산금고의 특별 봉인물 6-17이 놓였다. 어른 팔뚝 길이의 납작한 상자와 별도의 운송 확인함 하나. 상자 위에는 붉은 끈이 열두 번 감겨 있었다.
이스카가 확대 렌즈로 매듭을 살폈다.
“재봉인은 적어도 한 번 있었군요.”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누가 뜯었습니까?”
“아직 모릅니다. 재봉인이 곧 무단 개봉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끈이 낡아 교체됐을 수도 있고, 외부 표지만 확인했을 수도 있죠.”
“교체 기록이 있습니까?”
“찾아보겠습니다.”
그는 오래된 보존 대장을 펼쳤다. 책 사이에서 먼지가 뿜어져 나왔고 피코가 재채기를 했다. 헤르단은 익숙하게 손수건을 건넸다.
보존 대장에는 두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하나는 내용물을 넣은 날과 왕국 금고에 들어온 날 사이에 닷새의 차이가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재봉인 기록의 보증인이 ‘독립 운송인’으로만 적혀 있다는 것이었다.
“운송인 이름은요?”
“별도 확인함에 있을 겁니다.” 이스카가 말했다.
운송 확인함은 내용물과 달리 제한 없는 외부 기록이었다. 우리는 허가 범위를 다시 확인한 다음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아주 얇은 납판과 실이 끊어진 목패 하나가 들어 있었다.
납판에는 낯선 문자들이 길게 적혀 있었다. 내 ‘절대 감사’ 스킬이 순간 머릿속에 경고를 띄웠다.
[보관 대장과 운송표의 기준 날짜가 다릅니다.]
“무슨 뜻이죠?” 라델이 물었다.
“보관 대장은 금고에 들어온 날을 적었고, 운송표는 출발한 날을 적었습니다. 둘을 같은 날짜라고 비교하니 어긋난 거예요.”
“누군가 날짜를 바꿨다는 뜻은 아닙니까?”
“그건 아닙니다. 기준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이스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스킬이 알려 주는 불일치만으로 사람을 고발하지 않는 데 익숙해지고 있었다.
운송표 가장자리에는 오래된 상단 인장이 있었다. 흑산 상단과 비슷한 검은 봉우리 표식이었지만 모양이 달랐다. 베실이 보낸 문양 목록과 대조하니 옛 중립 운송조합의 산마루 인장이었다.
“흑산 상단의 전신입니까?” 피코가 물었다.
“이름이 비슷하다고 관계가 있는 건 아니야. 조직 등기부터 확인해야지.”
“회사 이름은 어렵네요.”
“한국도 비슷해. 비슷한 이름의 회사가 너무 많아서 택배가 가끔 엉뚱한 데 가.”
피코가 웃었다.
이스카는 갑자기 묵직한 질문을 던졌다.
“한도윤 씨는 봉투 내용에서 무엇을 가장 확인하고 싶습니까?”
“제 이름을 여기 처음 적은 사람이 누군지요.”
“그 사람이 당신을 소환하라고 명령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합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름을 적은 것과 사람을 불러온 것은 다르니까요. 다만 처음 그 글자를 본 사람이 어디서 봤는지 알아야 합니다.”
“좋습니다. 그럼 불필요한 다른 사람 이름을 보지 않고도 확인할 방법을 찾겠습니다.”
나는 이 노인이 갑자기 마음에 들었다. 규정을 아는 것보다 왜 그런 규정이 생겼는지 아는 사람 같았다.
복도로 나가기 전 보존관 헤르단이 작은 보관함을 가져왔다. 안에는 예전 입회증들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 어떤 것은 이름 대신 번호가 적혀 있었고, 어떤 것은 서명자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에도 반납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 출입증은 왜 보관합니까?” 내가 물었다.
“나중에 누가 원본에 접근했는지 확인하려고요. 다만 출입했다고 내용을 읽은 것은 아닙니다.”
“그럼 출입과 열람을 따로 기록해야겠군요.”
“예. 최근에 그 기준을 바꿨습니다.”
헤르단은 오래된 증 하나를 가리켰다. 겉에는 서명이 없었지만 출입 시각은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사실만으로 누군가 봉투를 열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헤르단 역시 같은 말을 했다.
“저때는 문 앞까지 갔다가 돌아가는 사람이 많았어요. 들어가려면 세 사람의 허락이 필요한데, 한 명이 없으면 그대로 돌아가야 하거든요.”
“앞에서 몇 시간씩 기다렸을 수도 있겠네요.”
“그랬죠. 그래서 지금은 대기 사유를 따로 기록합니다.”
나는 그 작은 변화가 마음에 들었다. 기다린 시간을 기록하는 것은 기다린 사람이 분명히 있었다고 인정하는 일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대단한 제도는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아무도 없었다고 적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금고를 나서는 길에 다른 소동이 벌어졌다. 보존실의 물막이 장치가 붉은 경고를 냈다. 천장에서 물 한 방울이 똑 떨어지더니 세 번째 복도 바닥에 작은 웅덩이가 생겼다.
“침수!” 헤르단이 외쳤다.
그 순간 루시아가 달려갔다. 검을 빼 들기에 나는 말리려 했는데, 그녀는 검집으로 물막이 문이 닫히지 않도록 지탱하고 있었다.
“이걸 먼저 밖으로 옮겨라!”
루시아가 가리킨 곳에는 가장 낮은 선반에 놓인 낡은 장부가 있었다. 골렘은 경보만 반복하고 있었다.
“경고. 보존물 손상 위험.”
“그걸 누가 몰라!” 내가 소리쳤다.
이스카는 서류를 들고 안전한 곳으로 뛰었다. 피코는 장부의 목록표를 붙잡고 있었다. 손이 젖었는데도 종이를 가슴에 꼭 안았다.
“장부는 다 옮겼어요! 그런데 제 출입증이 젖었어요!”
“출입증은 다시 만들면 돼. 너 안 다쳤어?”
“저는 안 다쳤어요.”
“그럼 됐어.”
물은 오래된 밸브 하나에서 새어 나왔다. 수리공 두 명이 도착하기까지 우리는 복도에 양동이를 놓고 장부를 옮겼다. 조금 전까지 비밀을 풀겠다며 금고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손에 걸레를 들고 일하는 모습은 우스웠다.
하지만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비밀보다 먼저 보존해야 할 사람과 물건이 있었다.
점검이 끝난 뒤 헤르단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오늘 여러분이 없었다면 아래 선반의 기록은 전부 젖었을 겁니다.”
“정비 예산은 편성돼 있었습니까?” 내가 물었다.
“네. 지난 분기부터 요청했습니다.”
“지급됐습니까?”
“아직입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오래된 문서를 지키기 위해 금고를 만들면서 그 문서를 지킬 사람의 수리비를 안 준다니, 어느 세계나 예산은 비슷하게 움직였다.
“위험은 현장에 남고 서류는 위로만 올라가네요.”
헤르단은 피곤한 웃음을 지었다.
우리는 누수 현장 사진 대신 확인서와 밸브 점검 기록을 남겼다. 수리 완료 전에는 침수 구역에 귀중 보존물을 다시 넣지 않기로 했다. 누가 책임지고 언제까지 고칠지도 따로 적었다.
금고 밖으로 나오자 해가 저물고 있었다. 라델이 내게 말했다.
“오늘 봉투는 못 열었군요.”
“대신 봉투가 젖지 않게 했죠.”
그는 웃었다.
“마왕성에서 일하면 다들 그런 식으로 변합니까?”
“아뇨. 저희 사장님은 아직도 벽에 자기 금박 초상화를 걸려고 해요.”
“그건 마음이 놓이는군요.”
그날 밤 이스카에게서 통지가 왔다.
[특별 봉인물 6-17 외부 물리 검증 완료. 운송 확인함의 증빙에서 개봉·재봉인 사유 추가 추적 필요. 다음 단계: 봉투 표지의 당사자 관련 부분 부분 열람 심의.]
나는 통지를 세 번 읽었다. 처음에는 화가 났다. 내용이 궁금한데 아직도 문 앞이었다. 두 번째에는 좀 나았다. 문이 진짜 존재한다는 건 확인했으니까. 세 번째에는 피코의 젖은 출입증이 떠올랐다.
문을 여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군가 미끄러지지 않게 문 앞의 물부터 닦는 것이 먼저일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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