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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마왕성에 취업했더니 내가 제일 무섭단다 · 150화
PAYLUA ORIGINAL · 제150화

150화. 마왕성은 사람을 구매하지 않습니다

마왕성에 취업했더니 내가 제일 무섭단다 · 6,525자

오프라인 책장
조달 사양서 원본을 보러 가는 날, 제르칸이 왕좌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한도윤.” “네, 폐하.” “내가 그대를 고용할 때 무슨 약속을 했는지 기억하느냐?” “월급과 식비, 위험수당은 별도로 협의한다고 하셨죠.” “그 외에는?” “이전 왕국 계약과 관계없이 새 계약이라는 것도요.” “그렇다. 난 그대를 산 것이 아니었다.” 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허세 가득한 마왕이 그런 말을 진지하게 하는 순간은 언제나 조금 뜻밖이다. “아직 조달 문서를 확인한 건 아닙니다.” “나도 안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 그대 이름에 값을 매겼다면, 그것은 내 계약과 다르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감사합니다.” “대신 황금 초상화 예산은—” “안 됩니다.” “정말 끝까지 단호하군.” 바로 이래서 나는 이 마왕을 좋아하면서도 신뢰도를 수시로 재평가한다. 문서 공개 심의는 중립 공관에서 열렸다. 조달 사양서는 왕국 소환 준비국의 오래된 자료였고, 전쟁 관련 장비 가격과 납품처가 적혀 있었다. 특정 물류 경로는 여전히 비공개였지만, 내 이름이 등장하는 부분은 당사자 검증 범위 안에서 열람할 수 있도록 허가됐다. 라델이 첫 장을 펼쳤다. [소환 의식 준비 사업. 장비 구매 및 소환 대상 적합성 사전 검토 용역.] 나는 글자를 읽다가 멈췄다. “소환 대상 적합성 검토를 용역으로 발주했다고요?” “옛 왕국 기록에는 그렇습니다.” “누구에게요?” 라델은 다음 칸을 가리켰다. [수탁기관: 공동 교역 위탁망. 최종 수급 세부명세 별도 보존.] 나는 손끝이 차가워졌다. 공동 교역 위탁망은 앞서 조사한 천상 교역 관리단이나 `00-성전`과 명칭이 비슷했지만, 실제로 같은 조직이라는 증거는 아직 없다. 명칭이 비슷한 회사는 한국에도 많다. 나는 일부러 그 사실을 떠올렸다. 다음 장에는 충격적인 구절이 있었다. [선호 대상 능력군: 군사 지휘, 전투 적응. 대체 후보 능력군: 재정 계산, 기록 검증, 계약 해석.] “재정 계산?” 내가 중얼거렸다. 피코는 종이를 훔쳐보더니 눈을 반짝였다. “도윤 님 직업이잖아요!” “그렇네.” “누가 이런 분을 미리 구하려고 한 거예요?” “모르겠어. 문서를 더 봐야 해.”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왕국은 나를 용사로 불러 놓고 회계사가 왜 전투를 하지 않느냐고 몰아세웠다. 그런데 오래된 조달 사양서에는 회계 능력을 가진 대체 후보가 적혀 있었다. 단순히 후보 조건만 정한 것인지, 실제로 내가 그런 이유로 골라진 것인지는 확인해야 했다. “다음 페이지를 보여 주십시오.” 베실이 조심스럽게 넘겼다. [임시 식별 표찰 7. 표본 문자열: 한도윤. 원문 출처 확인 요청.] 나는 숨을 멈췄다. 그 바로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동일인 식별 미완료. 후보자 본인 확인 전 계약 효력 없음.] “그러면 이 서류도 처음부터 제 동의가 있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군요.” “맞습니다.” 아레인이 말했다. “오히려 반대예요. 확인 전 계약 효력이 없다고 썼습니다.” 무언가가 조금씩 맞아 들어갔다. 내 이름이 열하루 전에 등록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첫 등록은 합의나 예언이 아니라 확인되지 않은 문자열을 임시 대상으로 분류한 작업이었다. 중간 기관이 그 문자열을 인명처럼 표시했고, 왕국의 정식 소환 화면은 임시라는 경고를 숨겼다. “그럼 이름이 처음 어디서 왔는지는 아직 모르는 거죠?” “그렇습니다.” 라델이 대답했다. “우리는 오늘 그 이름이 소환 관리소에 들어온 경로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원문을 처음 생성한 주체는 찾지 못했습니다.”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이제 적어도 이 세계의 오래된 기록 하나를 ‘내가 소환되기 전에 이미 여기 있었다’는 기이한 말로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조달 사양서의 예산 내역에는 검증 용역비가 있었다. 장비 구매 대금과 별도로 ‘후보 적합성 자료 처리’라는 항목이었다. “실제로 지급됐습니까?” 내가 물었다. 베실은 지급명세를 따로 펼쳤다. “청구액은 있습니다. 하지만 지급 승인과 실제 송금은 따로 확인해야 해요.” “그 부분도 조사합시다.” “네. 다만 본인의 신원 정보와 연결된 개인 자료가 포함될 수 있어 공개 범위를 다시 정해야 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가 길어지자 피코가 조용히 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도윤 님, 저런 업무를 발주하면 사람을 사는 거예요?” “조사나 검증 서비스를 맡기는 것과 사람을 사고파는 건 다르지.” “그럼 도윤 님 이름이 적혀 있으면요?” “그렇다고 내가 그 계약의 물건이 되는 건 아니야.” 녀석은 잠시 생각했다. “그래서 마왕성은 월급을 주는 거군요.” “그건 정확한 결론이야.” 내가 웃자 라델도 따라 웃었다. 무거운 장부를 살피는 동안 피코가 해 주는 이런 질문이 생각보다 힘이 됐다. 회의실 밖에서는 왕국 소환 관리소의 젊은 직원들이 줄을 서 있었다. 오늘은 새로운 안전 안내 시범 교육일이었다. 예전에는 소환자가 등장하면 관례적으로 영웅이라고 부르고 바로 임무를 배정했다. 이번 시범에서는 적어도 몇 가지 질문을 먼저 하도록 바뀌었다. ‘당사자가 자신을 어떻게 부르는지 확인한다.’ ‘위험을 설명한다.’ ‘동의하지 않을 선택을 설명한다.’ 그 문장들을 보고 나는 잠시 웃었다. 이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 만한 비밀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처음 왔던 날에도 이런 안내가 있었다면 많은 일이 달랐을 것이다. 교육 담당자는 내게 잠깐 강의를 부탁했다. 나는 원래 이런 부탁을 좋아하지 않는다. 발표 자료 준비에 드는 시간이 야근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번에는 십 분만 말하기로 했다. “저는 한도윤입니다. 이 세계에 소환됐을 때, 제게 어떤 일을 원하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이미 결정된 계약처럼 안내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거절했습니다. 나중에 마왕성에서 정식으로 고용 계약을 맺었고, 지금은 재정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젊은 직원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소환된 분이 무서워서 대답을 못 하면 어떻게 합니까?” “답을 기다려야죠. 긴급 구조가 필요하면 먼저 구조하되, 그걸 일에 동의한 것으로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 아무도 용사가 되려 하지 않으면요?” “그럼 왜 사람들이 안 하려는지 조건을 다시 살펴봐야죠. 무급이라면 특히요.” 교육실에서 웃음이 터졌다. 나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선택을 존중하면 사람을 잃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날 기회가 생깁니다.” 강의가 끝나자 교육 담당자는 내게 감사장을 주려 했다. 나는 감사장 대신 교대 근무자의 교육 참석 시간을 근무시간으로 인정하는지 물었다. 담당자는 한참 생각하더니 인사부서에 확인하겠다고 했다. 내 강의의 효과가 바로 나타난 것 같아 뿌듯했다. 그날 중립 공관의 자료 검토가 끝났을 때 나는 혼자 잠깐 복도에 남았다. 복도 벽에는 휴전협정 체결 당시 찍은 오래된 단체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왕국의 관리들, 마계의 장교들, 중립 조합 대표들이 제각각 어색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 사이 어디에도 평범한 소환자의 이름은 없었다. 아레인이 내 옆에 섰다. “조사 결과가 기대와 달랐습니까?” “조금요. 누군가 제 이름을 먼저 알고 일부러 불렀다는 답을 들을 줄 알았거든요.” “오늘 확인한 문서는 의도에 관한 답을 주지 않았어요.” “네. 대신 제가 동의한 적 없다는 사실은 아주 분명해졌죠.” 아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원본을 보존하는 사람답게 말을 아꼈다. “한도윤 씨는 이제 어떤 답을 가장 듣고 싶습니까?” 나는 한참 생각했다. 처음에는 누가 내 이름을 썼는지, 그 사람이 무슨 음모를 꾸몄는지가 가장 궁금했다. 지금은 조금 달랐다. “왜 하필 저였는지요. 전투를 기대하는 나라가 왜 회계사를 필요로 했는지. 그리고 필요했다면 왜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는지 알고 싶습니다.” “질문을 정리해 두겠습니다. 하지만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는 부분은 아직 답하지 못할 겁니다.” “괜찮아요. 예전에는 모른다는 말을 들으면 화가 났는데, 요즘은 거짓 답을 듣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창밖을 잠시 바라봤다. 아래 광장에서는 마계 상인과 왕국 병사가 같은 빵집 앞에 줄을 서 있었다. 몇 년 전만 해도 불가능했을 풍경이라고 아레인이 말했다. “저 사람들이 서로 싸우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가장 큰 손해일까요?” 내가 물었다. “전쟁을 준비하던 사업자들에게는 수입이 줄겠죠. 그렇다고 모두가 악의를 가진 건 아닐 거예요. 평화가 오면 다른 일을 찾아야 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맞습니다. 그래서 누가 얼마나 받았는지 실제 장부를 봐야겠죠.” 나는 예전에 제르칸에게 보급 계약을 끊자고 말하지 않았던 일을 떠올렸다. 잘못된 거래 하나를 중단해도 현장 병사는 밥을 먹어야 한다. 세계가 바뀌는 건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순간이 아니라, 내일 아침에도 사람들이 제 일을 하고 살아갈 수 있을 때다. 공관에서 나오니 루시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내 표정을 보자 짐작했다는 듯 말했다. “화가 나는군.” “조금요.” “싸울 상대가 있나?” “아직 없습니다.” “그럼 찾을 때까지 기다리겠다.” 나는 웃었다. “싸울 상대가 나와도 먼저 얘기부터 할 겁니다.” “그렇겠지. 넌 원래 그렇다.” 그녀는 내게 뜨거운 차를 건넸다. 내가 예상하지 못한 친절이었다. “오늘은 왜 이렇게 다들 잘해 줍니까?” “네가 아까 서류를 읽다가 손을 떨더군.” 나는 차를 받아 들었다. 눈치가 빠른 건 언제나 피코라고 생각했는데, 루시아도 다른 방식으로 사람을 보고 있었다. 피코는 광장 벤치 위에서 내가 받은 자료 목록을 세고 있었다. “오늘은 종이가 몇 장이에요?” “스물세 장.” “그중 도윤 님을 기쁘게 한 종이는요?” 나는 잠시 생각했다. “사람을 물건으로 산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해 준 문장 하나.” “그럼 한 장이네요.” “응. 한 장이어도 충분할 때가 있지.” 피코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오늘은 수고하셨으니까 사탕 하나 드릴게요.” “이건 어디서 났어?” “제 몫에서 드리는 거예요. 정말로요.” 나는 사탕을 받았다. 피코는 아주 의젓한 표정이었다. 이 작은 임프가 나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어서 자기 몫을 내놓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그날 저녁 마왕성에 돌아왔을 때 나는 직원 게시판 앞에 잠시 섰다. 급여일 안내, 휴가 신청 방법, 새 안전 교육 일정, 식당 메뉴가 붙어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서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늘 내가 찾은 오래된 조달 사양서도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업무 문서였을 것이다. 나는 게시판 한쪽에 새 안내문을 붙였다. [직원이 원치 않는 업무를 배정받았다고 느낄 때 상담할 수 있는 창구: 인사실. 신청만으로 불이익 없음.] 몰트가 뒤에서 말했다. “그 안내문이 마왕성에서 가장 비싼 종이가 될지도 모르겠군요.” “왜요?” “사람들이 불편함을 말하기 시작하면 우리가 고쳐야 할 일이 많아질 테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고쳐야죠.” 몰트는 오래된 해골 머리를 천천히 숙였다. 내가 본 가장 점잖은 동의였다. 마왕성으로 돌아오니 제르칸과 몰트가 식당에 있었다. 제르칸은 오늘따라 금빛 그릇을 쓰고 있었다. “그대의 이름이 물건처럼 거래됐느냐?” “아직 단정할 수 없습니다. 검증 용역 사양서에 제 이름이 있었지만, 원본 출처가 확인되지 않았고 그 문서에도 계약 효력이 없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다만 누가 그 이름을 제공했는지는 계속 조사해야 합니다.” “내가 도울 일이 있느냐?” “네. 제 출장비 결재요.” 마왕은 긴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 소리가 오늘 하루 가장 듣기 좋은 종소리라고 생각했다. 밤에 베실에게서 마지막 자료가 도착했다. 검증 용역의 입찰 결과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첨부 서류 목록에 한 줄이 있었다. [원문 자료 봉인 봉투. 내용: 외부 세계 언어 표본 및 후보 표기. 보존처: 왕국 제6정산금고. 열람 상태: 미확인.] 나는 조용히 그 줄을 읽었다. ‘한도윤’이라는 글자가 어떻게 이 세계에 먼저 나타났는지, 그 최초의 실물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봉투를 당장 찢을 수는 없었다. 그 안에는 다른 사람의 이름이나 사생활이 있을지도 모른다. 공관의 승인을 받아 공개 가능한 범위를 정하고, 보존 담당이 원본을 확인해야 한다. 나는 다음 출장 신청서를 썼다. [목적: 제6정산금고의 원문 자료 봉인 봉투 출처 확인.] 결재선이 세 개였다. 예전 같으면 투덜거렸겠지만 오늘은 조금 웃었다. 누구든 내 이름을 마음대로 옮겨 적던 시절보다, 내 서명을 기다리는 절차가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마지막으로 수첩 한쪽에 적었다. [찾은 것: 11일 전 등록은 정식 계약이 아닌 임시 후보 처리. 최초 전송 경로는 관측 분류 → 표찰 → 표준화실 → 왕국 소환 관리소.] [남은 것: 그 이전에 한글로 내 이름을 적은 사람, 그 자료의 진짜 출처, 그리고 왜 재정 계산 능력을 가진 후보가 별도로 필요했는지.] 나는 수첩을 덮었다. 한도윤은 어느 조직의 주문 상품도 아니다. 그 사실은 아직 봉인된 원문을 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누가 그런 주문서를 만들었는지 반드시 물어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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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0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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