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제 이력서가 아닙니다.”
나는 종이를 든 채 말했다.
중립 공관 기록실의 아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 안에 한도윤 씨가 알아볼 만한 단어가 있어서 보여 드리는 거예요.”
서류에는 한국어가 있었다.
[현장 담당자: 마력 불안정 구간 확인. 계약 전 안전 고지. 근무 시간과 보수 조건 별도 안내.]
나는 한참 문장을 읽었다. 한글을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뛴다는 사실이 이제는 익숙해졌다. 예전에는 지하철 광고를 보며 이런 감정을 느낄 줄 몰랐다. 마왕성에 오래 살아도 한국어는 여전히 내 삶의 한 조각이었다.
“누군가 한국어로 이 업무를 설명하려고 했네요.”
“정확합니다. 하지만 작성자가 한국인이라는 증거는 아닙니다.”
“알아요. 번역 담당일 수도 있고, 필사 담당일 수도 있겠죠.”
“그 판단이 중요합니다.”
서류는 ‘외부 언어 안내 초안’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작성 시각이었다. 소환 열하루 전보다도 훨씬 오래전 날짜였다. 그 당시에도 외부 세계 언어 안내를 준비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문서에는 어느 한 사람의 이름도 없었다.
“그럼 소환 관리소가 이 문장을 보고 제 이름을 적었을까요?”
“연결 근거가 없어요. 원본 이관 경로도 다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어 문서가 나올 때마다 모든 사건을 하나로 엮고 싶어지는 내 마음을 아레인이 조용히 붙잡아 주었다.
오늘 진짜 조사 대상은 따로 있었다. 북부 관측소의 ‘분류 7’ 해석 요청을 소환 관리소의 인명 처리 양식으로 변환했던 중간 행정 부서였다. 기록상 명칭은 ‘소환 지원 표준화실’. 지금은 왕국 의전 보급과로 합병됐다.
“표준화실에 가면 답을 찾겠죠?” 피코가 물었다.
“답보다는 기록을 찾아야지.”
“답을 바로 찾으면 안 돼요?”
“그럼 좋겠지만 오래된 부서는 대개 답보다 비밀번호를 더 많이 남겨.”
라델은 웃다가 곧바로 진지해졌다. 표준화실의 기록 일부는 당시 군사 보급과 연결돼 있어 공개 허가가 제한적이라고 했다. 나는 내 이름과 직접 연결된 분류 변환 규칙, 승인 절차, 교육 자료부터 열람 신청했다. 다른 소환자의 개인정보와 군사 시설 목록은 이번 조사에 필요하지 않았다.
허가가 떨어진 날 우리는 왕국 수도가 아니라 변경의 작은 행정 분소로 갔다. 과거 표준화실에서 일한 직원들은 그곳에 업무 매뉴얼의 복제본을 보관하고 있었다. 분소 책임자는 두꺼운 안경을 쓴 남자였다. 이름은 세이룬.
“한국어가 필요하다는 요청을 받아서 관련 설명서를 찾아 뒀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시 한국어에 ‘계약’이라는 단어가 여러 개 있습니까?”
나는 잠시 생각했다.
“계약은 계약인데, 신청이나 접수 같은 말을 잘못 번역하면 문제가 생기죠.”
“그게 바로 저희가 겪은 문제입니다.”
세이룬은 낡은 표준 문구를 보여 줬다.
[자료 확인 완료 → 접수 완료 → 계약 준비 완료]
이 세 단계가 구형 마법진에서는 모두 같은 짧은 코드로 압축됐다. 그 결과 ‘읽어 볼 자료가 들어왔다’는 표기가 ‘상대가 계약을 준비했다’로 보일 수 있었다. 나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우리가 수십 화 동안 만난 오류의 오래된 친척이었다.
“이거 수정하려고 누가 건의했습니까?”
“옛 기록에는 건의가 있습니다. 다만 전쟁 기간이라 우선순위에서 밀렸어요.”
“이후에는요?”
“부서가 합병됐고, 매뉴얼이 새 시스템으로 복사됐죠.”
나는 책상에 팔꿈치를 올렸다. 시스템은 바뀌어도 잘못된 문구는 이사를 다니면서 오래 산다. 반면 문제를 처음 발견한 직원은 대개 은퇴해 버린다.
문서 검토 중 분소 앞에서 소란이 났다. 주민 세 명이 농기구 배급권이 취소됐다고 항의하고 있었다. 창구에는 이미 ‘수령 거절’이라는 빨간 도장이 찍혀 있었다.
“아무도 거절한 적이 없습니다!” 한 주민이 말했다.
세이룬은 당황했다.
“분명히 신청서가 반송돼서….”
나는 주민에게 사정부터 물었다. 이들은 오래된 양식의 날짜 칸을 비워 뒀고, 접수 담당은 보완 요청을 보냈다. 그런데 시스템이 ‘보완 요청 미응답’을 ‘배급 거절’과 같은 코드로 읽은 것이다. 주민들은 보완 요청 편지를 받은 적도 없었다.
“받지 않은 편지에 답하지 않았다고 거절이 되는 건 아니죠.” 내가 말했다.
세이룬은 뒷목을 잡았다. 나는 그와 함께 서류의 현재 상태를 ‘자료 보완 안내 필요’로 정정하는 절차를 진행했다. 긴급하게 농기구가 필요한 주민에게는 별도의 임시 대여창구를 안내했다. 분소의 담당자가 권한을 확인한 후 대여를 승인했다. 나는 외부 감사인이어서 직접 승인하지 않았다.
주민들은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한 할머니가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어떤 종이는 사람을 너무 쉽게 게으른 사람으로 만들어요.”
“네. 그래서 종이만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녀는 내 손에 작은 당근 하나를 쥐여 줬다. 나는 사양했지만 할머니는 웃으며 밀어 넣었다. 피코는 그걸 보더니 눈을 반짝였다.
“도윤 님, 오늘은 사탕 대신 당근이네요.”
“건강에는 이게 더 좋을지도.”
“그럼 도윤 님 드세요.”
“너도 먹어.”
“저는 건강이 너무 좋습니다.”
루시아는 당근을 반으로 잘라 나눠 먹었다. 전투광 기사에게 건강식 교육을 받을 줄은 몰랐다.
분소로 돌아와 나는 세이룬과 함께 변환표를 다시 검토했다. 여러 업무에서 쓰는 공통 코드라면 사람 이름이나 동의 상태뿐 아니라 배급과 출입에도 영향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 확인한 오류가 모든 기관에서 동시에 작동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기관별 시스템 구성이 달랐기 때문이다.
세이룬은 창고에서 보완 매뉴얼을 더 찾아 왔다.
[미확정 외부 언어 표본을 인명으로 변환할 때에는 독립 확인 2회 요구. 첫 확인은 언어 검수. 두 번째 확인은 당사자 또는 신뢰 가능한 명부.]
나는 고개를 들었다.
“이 규칙이 있었다고요?”
“초안에는요. 그런데 최종 배포본에는 두 번째 확인 항목이 빠졌습니다.”
“왜죠?”
“실무 부서가 당사자를 소환 전에는 만날 수 없다고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래서 ‘사후 확인’으로 돌리자는 의견이 있었어요.”
“사후 확인이 실제로 진행됐습니까?”
“그건 소환 관리소 기록을 확인해야 합니다.”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만나 확인하라는 규정은 현실성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확인하지 않은 이름을 확정했다고 주장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확인이 어렵다면 어려운 상태 그대로 남겨 두어야 한다.
세이룬은 주민들을 돌려보낸 뒤 창고 한쪽에서 교육용 나무 인형 셋을 꺼냈다. 각각의 목에는 '접수', '확인', '동의'라고 적힌 작은 패가 걸려 있었다.
“옛 직원 교육에 사용하던 겁니다. 이 세 인형을 각각 다른 위치에 놓아서 사람들이 단계를 이해하게 했어요.”
“좋은 방법인데요.”
“그런데 누가 어느 날 공간이 부족하다며 인형을 하나로 합쳐 놨습니다.”
그가 손잡이를 돌리자 인형 세 개가 하나의 커다란 사람 모양으로 합쳐졌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생기면 서류 접수만 해도 계약에 동의한 것처럼 보이겠네요.”
“바로 그겁니다.”
피코는 인형을 보자마자 뛰어갔다.
“저도 해 볼래요!”
나는 허락받고 시연하도록 했다. 피코는 접수 인형을 왼쪽에, 확인 인형을 가운데에, 동의 인형을 오른쪽에 세웠다. 그리고 접수 인형 앞에 사탕 한 알을 놓았다.
“이건 접수했어요.”
가운데 인형 앞에는 빈 사탕 포장지를 올려놨다.
“이건 누가 먹었는지 확인해야 해요.”
마지막 인형 앞에는 빈 종이를 놓았다.
“이건 제가 아직 동의하지 않았어요.”
세이룬이 감탄했다.
“교육 자료로 쓰고 싶군요.”
“피코에게 먼저 물어보세요.” 내가 말했다.
세이룬은 피코에게 그림과 설명을 교육에 써도 되는지 물었다. 피코는 가슴을 펴고 허락했다. 다만 사탕 개수는 바꾸지 말아 달라고 했다. 공식 규정에 사탕 한 알이 기록되는 순간을 나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옛 교육 인형을 보던 도중 나는 세이룬에게 시험용 프로그램이 어떻게 검증됐는지 물었다. 그는 당시 직원들이 일부러 엉뚱한 문구를 넣어 잘못된 처리가 나오는지 확인했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어떤 문구를요?”
“‘당근 열 상자’ 같은 걸 인명 칸에 넣었습니다. 그런데 구형 프로그램은 앞부분만 읽어서 ‘당근’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표시했죠.”
피코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사람이 진짜 있으면요?”
“그때는 당근 씨한테 직접 물어봐야지.”
“그럼 당근을 먹으면 안 되겠네요.”
나는 웃었다. 시험 문구가 사람 이름처럼 표시된다는 사실만으로 그 프로그램을 운영에 써서는 안 된다. 그런데 옛 기록에는 이런 문제가 적혀 있었음에도 다음 부서로 경고가 충분히 전달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 시험 결과는 어디에 남아 있습니까?”
세이룬은 작은 서류철을 꺼냈다. 종이에는 실제 시험 입력과 출력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의 시험 문구에는 한글과 닮은 글자가 있었다. 나는 가까이 들여다봤지만 정확한 한국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몇 글자는 모양이 뒤틀렸고, 나머지는 서로 다른 언어 기호가 섞여 있었다.
“원문을 제가 해석해도 됩니까?”
“오늘 허가에는 교육용 표본 열람만 있습니다. 원문 해석이나 복제는 별도 허가가 필요합니다.”
“그럼 그대로 두죠.”
나는 아쉬웠지만 받아들였다. 한국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로 모든 자료의 해석 권한이 내게 생기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사실을 이제 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다.
그때 분소 창밖에서 아이들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오래된 인형을 창가에 두었더니 지나가는 아이들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피코도 손을 흔들었다.
세이룬은 한참 밖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 매뉴얼은 사람을 편하게 하려고 만든 건데, 지금은 사람들이 매뉴얼 때문에 더 오래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그럼 다시 편하게 만들면 되죠. 다만 누군가의 선택권을 없애는 방식만 아니면 됩니다.”
“간단하게 말씀하시네요.”
“말은 간단해요. 구현이 문제죠.”
세이룬은 웃었다. 나는 옛 직장에서 개발팀과 운영팀 사이에 끼어 있던 나날을 떠올렸다. 그때도 같은 말을 자주 했다. 요구사항은 짧은 문장 하나지만, 실제로 누가 어디서 버튼을 누르는지 확인하지 않으면 기능은 엉뚱한 사람을 공격한다.
분소를 떠나기 전 우리는 다음 주 시험 운영을 위한 검토 항목을 세 개 적었다. 실제 사람을 대상으로 시험할 때는 동의를 받고, 결과 화면에서 미확정 상태를 표시하며, 정정 요청 통로를 마련한다는 것이었다. 세이룬은 그 내용을 내부 회의에 올려 보겠다고 약속했다. 그것은 아직 승인도 시행도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잘못된 교육 인형을 그대로 전시해 놓는 것보다는 나았다.
저녁이 되어 세이룬은 내게 한 장의 한국어 번역 검수 초안을 보여 줬다. 단어 몇 개가 어색했지만 읽을 수 있었다.
[당사자에게 설명하지 못했으면 설명 완료로 기록하지 마십시오.]
작성자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서명 칸에 오래된 부서 직인이 찍혀 있었다.
“누가 번역한 건가요?”
“기록상 공동 언어 검수망에서 보내 온 교정본입니다. 개별 작성자는 확인되지 않았어요.”
나는 문장을 천천히 따라 읽었다. 누군가는 옛날에도 같은 문제를 고민했다. 누군가는 이런 식으로라도 막으려 했다. 하지만 그 말이 제도 속에서 얼마나 오래 살아남았는지는 아직 모른다.
마왕성에 돌아오자 피코가 당근의 남은 절반을 몰트에게 건넸다.
“실장님도 드세요.”
“저는 뼈만 남은 몸입니다.”
“그럼 더 건강해져야죠.”
몰트는 할 말을 잃었다. 나는 오랜만에 아무 계산도 하지 않고 웃었다.
그날 밤 세이룬에게서 추가 자료가 왔다. 옛 표준화실에서 분류 7의 문구를 변환한 담당 직책이 확인됐다.
[소환 사전 등록 검수관. 변환 규칙 예외 승인권 보유.]
개인 이름은 보호 대상이라 즉시 공개되지 않았다. 다만 담당자의 예외 승인 기록은 남아 있었다.
[인명 미확정. 사전 임시 등록 허용. 정식 소환 시 당사자 확인 예정.]
나는 거기까지 읽고 멈췄다.
열하루 전에 내 이름이 기록된 것은 ‘소환 계약 성립’이 아니라 임시 등록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임시’라는 표시는 어디에서 사라졌을까.
이제 정식 소환 당일의 장부를 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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