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재권이 정지된 사람이 결재를 했다.
나는 이 문장을 세 번 읽었다.
읽을 때마다 머리가 아팠다. 문법적으로는 맞는데 업무적으로는 도무지 맞지 않는 문장이었다.
“혹시 그라즈가 복직했어?”
피코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라즈 님은 아직 조사실에 있어요.”
“그럼 결재를 어떻게 했대?”
“저도 모르겠어요.”
나는 문서 오른쪽 아래의 승인 마법 흔적을 살폈다. 부도장에서 보았던 구부러진 꼬리 무늬가 있었다.
아주 반가운 모양이었다. 반갑다는 게 좋은 의미는 아니지만.
“물건은 아직 출발 전이지?”
“아뇨. 성문 앞에 도착했는데요.”
“뭐?”
나는 망토도 챙기지 못하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성문에는 커다란 짐마차 다섯 대가 줄지어 있었다. 상단의 깃발은 검은 산 그림이었다.
흑산 상단.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여기 구매 요청 누가 했습니까?”
상단 책임자로 보이는 난쟁이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정식 주문서를 받았습니다.”
“주문서 좀 보여 주세요.”
“영업 비밀입니다.”
“돈 받으시려면 거래 근거는 확인해야죠.”
“우리는 선금을 이미 받았습니다.”
나는 잠깐 멈췄다.
선금까지?
“얼마나요?”
“전액이요.”
좋다. 아주 좋다. 물건도 안 받았는데 돈부터 보냈다는 이야기다.
나는 인수 서명을 하지 못하게 하고 상단 담당자와 함께 현장 수량부터 셌다. 마차마다 백 상자라는 표지가 붙어 있었다. 실제로는 아흔둘, 아흔여덟, 일백, 아흔넷, 아흔일곱.
“합계가 몇 상자죠?”
상단 직원이 머뭇거렸다.
“오백…….”
“다시 세시죠.”
사람을 무시하는 질문 같지만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숫자를 적었다.
[92+98+100+94+97=481]
열아홉 상자가 비었다.
“운송 중에 도둑맞았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난쟁이가 항의했다.
“그럼 운송 사고 기록이 있어야겠죠.”
“그런 건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확인한 수량으로만 인수할 수 있습니다.”
그는 못마땅해했지만 결국 수량 확인서에 서명했다.
문제는 상자 안이었다. 첫 상자를 열어 보니 건조육이 들어 있었다. 향은 나쁘지 않았다. 두 번째 상자도, 세 번째도 그랬다.
그런데 넷째 상자에서 피코가 코를 찡그렸다.
“도윤 님, 이거 냄새가 이상해요.”
나는 뚜껑을 열었다.
말린 고기 대신 돌멩이가 들어 있었다.
“식량에 미네랄도 포함되는 건가?”
“아무리 마왕군이라도 돌은 안 먹어요.”
“고블린은요?”
“그 친구들도 이빨 아파해요.”
맞다. 고블린에게도 치과는 중요하다.
우리는 표본 검사 범위를 늘렸다. 스무 상자 중 세 상자에 돌이 들어 있었다. 전체 물량을 모두 열어보려면 시간이 걸렸다. 식량이 필요한 병사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잘못하면 두 가지 중 하나가 벌어진다. 검사를 이유로 병사들이 굶거나, 급하다는 이유로 허위 물량을 전부 인수하거나.
“루시아 님.”
검사가 길어지자 찾아온 그녀에게 말했다.
“실제 식량만 먼저 보급하도록 해 주세요. 보급 기록은 분리하고요.”
“돌이 든 상자도 가져가면 안 되나? 투석병이 쓰게.”
“구매 품목이 식량입니다.”
“무기면 무기대로 쓰면 되지.”
“그렇게 하면 식량으로 산 돈이 무기 예산으로 넘어가서 내일 또 문제가 생깁니다.”
루시아는 이마를 짚었다.
“인간, 네가 설명하는 세계는 검술보다 복잡하구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소란 끝에 상단 대표가 도착했다. 뚱뚱한 트롤이었다. 그는 계약서를 흔들었다.
“인수 거부는 위약금 대상이오!”
“계약서에 오백 상자라고 되어 있는데 실물은 그보다 적습니다.”
“서류에는 분명 오백 상자라니까!”
“제가 서류를 먹을 수는 없잖아요.”
옆에서 피코가 웃음을 참다가 기침을 했다.
나는 납품 명세를 더 살폈다. 묶음 번호가 낯익었다. 앞선 중복 구매 의혹에 포함된 상자 번호와 겹쳤다.
“이 상자, 예전에 보낸 적 있죠?”
트롤의 표정이 굳었다.
“무슨 소리요?”
“포장끈 아래에 예전 창고 표식이 남아 있어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단정하지 않았다. 같은 상자를 재사용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다만 모든 상자를 보존하고, 상단과 보급관에게 출고 이력을 요청했다.
저녁 늦게 검사 결과가 나왔다. 상단이 실물 검수를 거부한 물량은 대금 정산에서 보류하기로 했다. 병사들에게는 확인된 식량만 먼저 보내졌다.
“이긴 거죠?”
피코가 물었다.
“절반쯤.”
“절반이면 이긴 거예요?”
“적어도 돌멩이에 돈을 더 쓰지는 않았으니까.”
그때 몰트가 메시지 양피지를 건넸다.
[흑산 상단 출고원장 조회 불가. 기록 보관소 화재]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니, 왜 장부가 필요해질 때마다 불이 나는 거지?
이 세계의 불은 회계감사 일정표를 읽을 줄 아는 게 분명했다.
제14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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