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성 북문 시범 창구가 정식 운영 첫날을 맞았다.
나는 그날을 위해 세 가지를 준비했다. 안내문, 접수 대장, 그리고 빈 의자.
제르칸은 빈 의자에 본인 얼굴을 그려 넣고 싶어 했다. 내가 거절하자 대신 의자 다리에 금색 술을 달겠다고 했다. 그것도 거절했다. 결국 빈 의자는 정말 빈 의자로 남았다.
"인간은 참 재미없는 종족이로구나."
마왕이 투덜거렸다.
"원래 직원의 권리 확인이 재미있으면 그 회사가 더 큰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왜 피코는 웃고 있느냐?"
우리는 고개를 돌렸다. 피코가 '대신 대답 안 하는 책상'이라 적은 팻말을 들고 낄낄대고 있었다.
"제가 유머 감각이 있는 걸로 합시다."
그날 첫 손님이 오기까지는 세 시간이 걸렸다. 누구도 오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이 길어지자 몰트가 서류를 쌓기 시작했고, 루시아는 창밖 경비병들의 자세를 교정했다. 피코는 사탕을 몇 개나 먹을 수 있는지 세고 있었다.
마침내 문이 열렸다. 손님은 지팡이를 짚은 늙은 트롤이었다. 어깨가 굽었고 오른팔에는 낡은 금속 보조기가 달려 있었다. 그는 경비실에 들어오자 안내문을 세 번 읽었다.
"정말 거절할 수 있나?"
"어떤 일을 거절하시려는지 말씀해 주시면 절차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내가 동의하지 않은 전역 증서를 말이야."
나는 그를 앉혔다. 이름은 가론. 마왕군에서 오랫동안 북부 보급로를 지켰던 보조병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부상으로 부대를 떠났지만, 기록에는 '복무 종료 및 연금 포기 동의'가 함께 붙어 있었다. 그는 연금을 포기한 적이 없다고 했다.
"오래된 일인데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
"오래됐다는 이유로 확인을 못 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결과를 바로 약속드릴 수는 없어요."
가론은 나를 빤히 봤다.
"요즘 젊은 관리들은 다 그렇게 말하나?"
"저는 원래 한국에서 회계 담당자였습니다. 여기도 그럭저럭 비슷하네요."
"한국? 어느 군단이지?"
"아주 먼 곳입니다."
"나도 여러 군단을 돌아다녔는데 그런 곳은 처음 들어."
나는 멋쩍게 웃었다.
가론은 퇴역 신청서의 원본 사본을 내밀었다. 글씨는 흐렸지만 복무 종료를 확인한 담당자의 도장이 남아 있었다. 연금 포기 부분에는 별도 서명 대신 같은 도장 이미지가 복제돼 있었다.
"이건 언제부터 이렇게 됐죠?"
"모르겠네. 몇 년 전 보관고에서 조회하니 그렇게 나왔어."
나는 그의 실제 연금 수령 기록과 전역 증서 작성 경위를 분리했다. 연금을 지급받지 않았다고 해서 포기했다는 결론은 아니었고, 포기 동의가 없다고 해서 전액 지급을 당장 확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가론은 내가 말을 어렵게 한다며 혀를 찼다.
"쉽게 말해 봐."
"어르신이 전역하신 건 맞습니다. 연금을 포기하셨다는 증거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포기한 걸로 처리하는 건 일단 중지하자는 겁니다."
"그럼 기다리면 되나?"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부터 확인해 드릴게요."
가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피코는 손님 앞에 물잔을 놓고 조용히 물었다.
"차도 드릴까요?"
"달지 않은 거 있나?"
피코는 잠시 망설였다. 성안의 차는 대부분 설탕이 지나치게 많이 들어간다. 마왕이 단맛을 좋아해서다.
"맹물은 안 달아요."
가론은 처음으로 크게 웃었다.
"그럼 맹물로 하지."
내가 웃을 때 몰트가 서류를 보며 말했다.
"복무 종료 기록의 실물 보존처가 남아 있네. 서고 북쪽 차고에 이관됐군."
가론이 지팡이를 세웠다.
"내가 같이 가겠네."
"아직 출입 허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동안 나를 만나 주는 사람이 없었어. 가만히 앉아 있기 싫어."
나는 잠시 생각했다.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증인을 직접 보존고에 데려가면 권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럼 보존고 담당자와 화상으로 연결해 볼까요? 여기서 함께 보실 수 있는 범위의 자료를 확인하도록요."
"그런 방법도 있나?"
"없으면 만들어야죠."
몰트의 턱뼈가 덜컥 움직였다. 리치는 웃을 때도 꽤 무섭다.
"젊은이가 큰소리를 치는군."
"원래 마왕성의 큰소리는 폐하 전문인데 오늘은 제가 빌리겠습니다."
보존고에서 보내 준 서류에는 뜻밖의 항목이 있었다. 전역 당시 가론에게 지급된 장비 반환 확인서와 연금 안내 통지가 같은 운송번호로 묶여 있었다. 장비 반납은 정상 처리됐다. 그런데 연금 안내 통지는 발송 준비 상태로 남아 있었다.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또 발송 준비..."
피코가 물었다.
"어제 그 한국어 편지처럼요?"
"겉보기 상태만 비슷할 뿐이야. 같은 사건인지는 전혀 몰라."
가론이 우리를 번갈아 바라봤다.
"무슨 이야기인가?"
나는 다른 사건의 신원 정보를 밝히지 않고, 발송 준비와 실제 도달이 다르다는 점만 설명했다. 가론은 지팡이 끝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나는 안내를 받은 적이 없네. 적어도 기억에는 그래."
"그 말씀은 접수하겠습니다. 배송 증빙은 따로 확인하겠습니다."
가론의 신고를 정리하던 중 그가 아주 낡은 금속 단추를 꺼냈다. 보조기 안쪽에 달아 둔, 검은색으로 녹슨 단추였다.
"이건 복무 때 받은 건가요?" 내가 물었다.
"아니. 퇴역할 때 동료가 준 거네."
"그런데 왜 서류와 함께 가져오셨습니까?"
"그 친구도 나처럼 전역했는데, 다른 전역 서류를 받았어. 둘 다 같은 날 같은 부대를 떠났는데 말이야."
나는 단추를 다시 그에게 돌려줬다. 증거 보존 여부를 판단하기 전까지는 개인 물품을 함부로 받아 보관하면 안 된다.
"두 분의 신분이나 복무 유형이 달랐을 수 있습니다. 서류가 다르다는 사실만으로 문제가 있다고 단정할 순 없어요. 그래도 비교해 볼 필요는 있겠네요."
가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친구는 지금 오래전에 죽었네. 그래서 더 물어볼 수가 없어."
잠깐 침묵이 흘렀다. 나는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랐다. 한국에서 장례식장을 다닐 때처럼 적당한 위로의 문장이 떠오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뭐가 미안한가. 네가 그런 것도 아닌데."
가론은 단추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웃었다.
"그래도 내가 전역할 때 혼자가 아니었다는 걸 기억하고 싶었어."
루시아가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평소처럼 서두르지 않았다.
"그 동료가 어떤 사람이었지?"
"나보다 키는 작았지만 힘이 셌지. 훈련만 하면 음식부터 찾는 녀석이었어."
"피코 같군."
"저는 훈련 안 해도 배고픈데요." 피코가 끼어들었다.
가론은 크게 웃었다. 잠시 뒤 그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정말 이상하군. 연금 서류를 들고 와서 죽은 친구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이야."
"누구에게나 서류에 안 들어가는 이야기가 있죠." 내가 말했다.
그는 단추를 다시 보조기 안쪽에 달았다. 나는 이 물건을 신고 증빙으로 복제하거나 수거하지 않기로 했다. 개인의 기억은 회계 장부에 들어갈 때보다 당사자의 주머니에 있을 때 더 안전할 수도 있다.
오후에는 경비대 인사실에서 작은 혼란이 생겼다. 가론의 연금 포기 상태를 임시 보류로 전환하자 급여 프로그램이 그것을 복직으로 읽은 것이다. 퇴역한 트롤을 다음 주 야간 교대조에 편성해 버렸다.
"이런 장난이 어디 있어!" 가론이 소리쳤다.
나는 즉시 베르케를 불렀다. 프로그램의 상태값을 확인하자 '전역 처리 완료'라는 하나의 항목에 연금 포기와 복무 종료가 동시에 연결돼 있었다.
"가론 씨의 전역 자체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설명했다. "연금 포기 여부를 심사한다고 다시 출근하시라는 뜻이 아니에요."
"내가 나가면 창고가 무너지겠군. 허리가 이 모양인데."
"그렇죠. 그래서 더 빨리 수정해야 해요."
베르케는 가론의 교대표가 실제 근무 지시로 전달되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했다. 잘못된 배정 표시만 중지하고 원본을 보존했다. 이후 비슷한 오작동이 없는지 전체 퇴역자 기록을 조회하되, 개인별 자료는 담당 권한 안에서만 확인하기로 했다.
가론은 돌아가기 전 나를 쳐다봤다.
"네가 하는 일은 정말 이상하구나. 전쟁도 안 하고 마법도 안 쓰는데 사람들이 바빠져."
"제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일이 늘어나는 사람도 많을 겁니다."
"그래도 오늘은 고마웠네. 집에 가서 다리를 쉬게 할 수 있으니."
그가 웃었다. 나는 그제야 내 앞에 놓인 상담표 하나가 어떤 무게를 가진지 조금 알 것 같았다.
보존고 담당자는 화상 통화를 끝내기 전에 한 가지를 물었다.
"연금 안내를 못 받은 사람이 직접 왔다고 하면 바로 지급을 시작합니까?"
"아니요. 수령 사실과 지급 자격은 따로 확인해야 합니다. 다만 접수 자체를 막을 이유는 없죠."
가론은 그 말을 듣고 지팡이 끝으로 바닥을 톡 두드렸다.
"적어도 오늘은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지 않았군."
그 짧은 말 때문에 나는 잠시 목이 메었다. 잘못된 서류 한 장은 누군가를 없는 사람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때 경비병 하나가 문을 벌컥 열었다. 보급 창고 앞에서 트롤 출신 장병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보고였다. 누군가 '연금 포기 동의가 취소됐다'는 소문을 퍼뜨린 모양이었다.
"벌써요?" 나는 벌떡 일어났다. "아직 취소된 게 아닙니다."
루시아가 칼을 챙기려 하자 나는 손을 들었다.
"칼은 두고 가시죠."
"난 싸울 생각이 없는데."
"칼을 들면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한 뒤 칼집을 벗겨 벽에 걸었다. 루시아가 맨손으로 걸어 나가는 모습을 본 경비병들이 오히려 더 겁먹은 건 작은 부작용이었다.
창고 앞에는 여섯 명의 퇴역병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가론의 이야기를 듣고 찾아왔다고 했다. 누군가 잘못된 시스템 때문에 돈을 못 받았다면 자기들도 그럴 수 있다는 불안감이었다.
"전부 돌려준다면서요?"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아직 개별 심사가 필요합니다. 당장 전액 지급이 결정됐다는 뜻이 아니에요."
"그럼 왜 오라 했어?"
"저희가 오라고 한 건 아니지만, 오신 김에 어떤 자료가 필요한지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누군가 투덜댔다.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아는 그들에게 벤치를 가져다주었다. 전역병들은 그녀를 보자 자세를 고쳐 앉았지만, 그녀가 '여기는 부대가 아니다'라고 말하자 조금 편해졌다.
우리는 접수 번호를 발급했고, 접수했다고 연금 지급이 승인되는 건 아니라는 설명도 반복했다. 피코는 목이 쉴 정도로 안내문을 읽어 주었다.
"도윤 님, 제가 이거 전부 외웠어요!"
"대단한데. 근데 자기 목소리 좀 아껴."
"외우는 건 무료지만 읽는 건 힘드네요."
"그걸 이해했다면 노동 수당도 곧 이해하겠네."
점심이 지나서 가론의 사례를 한 번 더 정리했다. 실제 복무 기간, 장비 반납, 안내 발송 여부, 연금 포기 동의, 현재 수급 자격 심사를 모두 다른 칸에 나눠 적었다. 가론은 내 표를 오래 바라봤다.
"내 인생이 칸 다섯 개로 나뉘었군."
"칸이 많으면 불편하실 수 있죠. 그런데 원래는 다른 이야기 다섯 개를 한 칸에 눌러 넣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엔 괜찮겠지."
나는 쉽게 괜찮다고 말하지 못했다. 다만 오늘 접수한 거절 의사를 누군가 승인으로 바꿔 놓지 못하게 하는 건 지금도 할 수 있었다.
가론이 돌아갈 때 피코는 수첩에 적힌 그의 말을 보여 줬다.
[전역한 건 맞다. 연금을 포기한 적은 없다.]
가론은 천천히 한 글자씩 읽고 웃었다.
"그래. 그게 내가 하려던 말이다."
늙은 트롤이 문을 나간 뒤 나는 한동안 창밖을 바라봤다. 내 일은 사람들에게 멋진 주문을 보여 주는 게 아니었다. 누군가 자기 이야기를 자기 말로 남길 수 있게 해 주는 일. 생각보다 어렵고 생각보다 필요했다.
그때 중립 우편관에서 전송이 왔다. 브룩이 보내 온 소방대 인수 목록의 발췌본이었다.
[봉인 검수품 1건. 반출 후 상태: 수신처 미지정. 소방대 임시보관. 운송번호는 새로 부여하지 않음.]
피코가 물었다.
"그럼 편지를 못 보낸 이유가 주소가 없어서예요?"
"적어도 그 목록에는 수신처가 없다고 되어 있어. 더 확인해야지."
나는 가론의 연금 통지와 오래된 한국어 재심 우편을 나란히 놓았다. 전혀 다른 사람의 다른 사건이다. 하지만 둘 다 누군가에게 도달했어야 할 말이 서류 속에서 멈췄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오늘 우리의 첫 손님은 무언가를 얻으러 온 게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하지 않은 말을 지워 달라고 왔다.
문을 잠그기 전 나는 빈 의자를 한 번 쓰다듬었다. 내일 누가 앉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그 자리에서 누군가의 거절이 들리기를 바랐다.
제123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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