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듣기만 해도 불길한 문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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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을 누르시면 모든 약관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리고 내가 요즘 가장 싫어하는 문장은 이거다.
'오래된 한국어 우편물이 확인되었습니다.'
마왕성에서 재정 담당을 맡기 전까지는 우편 한 통을 두고 왕국, 천계, 마계가 회의를 여는 세상이 존재할 줄 몰랐다.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시절의 나였다면 사내 메일함에 들어온 광고도 읽지 않고 삭제했을 텐데, 이곳에서는 한국어 두 글자가 나오면 유서처럼 취급해야 한다.
다행히 오늘도 살아 있었다. 문제는 내 책상 위에 올라온 서류가 나보다 오래 산 사람을 찾고 있다는 점이었다.
"도윤 님, 천계에서 우편이 왔어요!"
피코가 복도를 질주해 들어왔다. 녀석은 손에 쥔 수정 구슬을 흔들며 외쳤다.
"우편이 왔다고?"
"네. 우편에 관한 우편이요!"
나는 이마를 짚었다. 우편을 보내기 전에 우편에 관한 우편을 보내는 발상은 어느 세계 공무원에게나 공평하게 존재하는 모양이다.
구슬에 떠 있는 아우렐의 통신문은 짧았다.
[옛 제3감리 재심 안내. 지정 언어 한국어. 상태: 발송 대기. 수신인 정보: 비공개. 추가 확인 요청 시, 발송 대기 목록과 실배송 기록을 혼동하지 말 것.]
발송 대기.
나는 그 세 글자를 소리 내 읽었다.
"그럼 도착한 건 아니네요."
피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어는 한국어인데요?"
"한국어로 만들겠다는 표시지, 한국까지 보냈다는 뜻은 아니야."
"그럼 누가 읽었어요?"
"그것도 모르지."
피코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이 녀석은 문제가 생기면 즉시 해답이 떨어지는 시험지를 좋아한다. 그런데 우리가 붙잡은 건 시험지보다 까다로운 물건이었다. 답을 쓴 사람이 시험장을 떠난 뒤에도 계속 문항이 바뀌는 시험지.
몰트가 내 옆으로 조용히 떠올랐다. 리치 회계 책임자는 죽은 지 천 년이 넘었어도 출근 시간만은 정확했다.
"한도윤. 천계 쪽 보존 서식에는 발송 대기와 인쇄 준비가 따로 있을 것이다."
"그것부터 확인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걸 보게."
그가 내민 건 마왕성의 공동 시범사업 예산표였다. 어제 회의에서 승인된 건 원칙이었다. 오늘부터 창구를 운영하려면 책상과 직원, 야간 안전 인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예산표 맨 아래에는 '긴급 동의 대행 서비스'라는 낯선 항목이 붙어 있었다.
"누가 이런 서비스를 신청했죠?"
"신청인은 없네. 구형 계약 항목을 가져오다 자동으로 붙었더군."
나는 빨간 펜으로 동그라미를 쳤다.
"삭제가 아니라 분리 보류로 처리하겠습니다. 누가 언제 붙였는지 추적해야 하니까요."
"그렇게 하게. 다만 책상은 주문해야 하지 않겠나."
"책상은 주문합니다. 사람의 동의를 대신해 주는 책상은 주문하지 않습니다."
피코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럼 제가 책상 이름을 정해도 돼요?"
"뭔데?"
"대신 대답 안 하는 책상!"
"그냥 책상이라고 부르자."
점심 전에 나는 아우렐과 통신을 연결했다. 천계 제7서고 기록실은 여전히 하얀 대리석과 무표정한 천사들로 가득했다. 천사들은 깃털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고, 내 머리는 밤샘 검토 때문에 새집이 되어 있었다. 외모가 아니라 야근으로 승부하는 회사라 다행이었다.
아우렐은 구슬 너머에서 두 개의 목록을 펼쳤다.
"첫째는 작성 준비 목록입니다. 한국어 번역 지정, 봉투 형식 요청, 안내문 초안 등록까지 기록됐습니다. 둘째는 실제 발송 증빙 목록입니다."
"둘째에는요?"
"현재 공개 가능한 항목에는 수송 인계 번호가 없습니다. 다만 미발송으로 확정하기에도 자료가 부족합니다. 당시 일부 운송 기록이 중립 공관으로 넘어갔거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록 없음'과 '일어나지 않음'은 다르다. 지난 백여 화 동안 배운 가장 성가신 교훈이었다.
"수신인은 여전히 비공개죠?"
"네. 여러분의 공동 시범사업이 실제로 운영돼도 신원 공개 허가는 별개입니다."
"알겠습니다. 그 사람을 찾는다고 아무 우편함이나 열 생각은 없어요."
아우렐이 다소 안심한 얼굴로 말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당시 서류를 만든 쪽에서는 한국어 원문을 번역하지 말라고 표시했습니다. 그런데 발송용 초안에는 한국어 문장과 현지어 설명이 함께 존재합니다."
"번역하지 말라는 것과 설명을 붙이라는 건 다르니까요."
"그 구분을 알고 계시는군요."
"요즘은 밥 먹을 때도 구분하고 있습니다."
대화를 끊자 피코가 부러워했다.
"저도 천계에서 일하면 날개가 생길까요?"
"아마 사원증부터 나올걸."
"사원증에도 날개가 있어요?"
"사진 크기는 규정에 맞춰야겠지."
녀석은 크게 실망했다. 환상이 무너지는 건 대체로 인사 규정부터다.
시범 창구를 열기 전에 작은 사고도 있었다. 북문 경비실 문에 붙인 안내문이 하루 만에 사라진 것이다.
"누가 떼어 간 걸까요?" 피코가 물었다.
나는 벽에 남은 접착제 자국을 살펴봤다. 누가 일부러 떼어 간 것처럼 끝부분이 비뚤어져 있었다. 루시아가 당장 경비병을 불러 수색하자고 했지만, 먼저 근처의 작업 대장을 보자고 했다.
"안내문 훼손이면 징계 사유 아니야?" 그녀가 물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정말 누가 훼손했는지부터 봐야죠."
작업 대장을 펼치자 종이 한 장이 나왔다. 북문 방수 공사 때문에 벽의 종이를 임시 제거했다는 메모였다. 작업자는 안내문에 묻은 오래된 곰팡이가 새 도배지에 옮겨 붙을까 봐 창고에 보관해 뒀다고 했다. 일부러 훼손한 게 아니었다.
"그럼 가져온 사람은 잘한 거예요?" 피코가 물었다.
"보관하려던 의도는 이해하지만, 어디로 옮겼는지 알려 줘야 다른 사람이 찾지."
루시아가 팔짱을 꼈다.
"문 하나를 고치는데도 인계 기록이 필요하구나."
"사람들이 같이 일하니까요."
우리는 작업자에게 안내문을 돌려받았다. 곰팡이가 묻은 건 원래부터 낡았던 경비실의 다른 표지판이었다. 창구 안내문은 멀쩡했다. 대신 비를 맞은 흔적이 있어 새로 코팅한 사본을 문 옆에 붙이고 원본은 보관함에 넣었다.
"그렇게 하면 아무도 안 떼어 가겠네요."
"그건 모르지. 다만 어디로 갔는지 찾기는 쉬워질 거야."
나는 사라진 안내문이 돌아오는 모습을 보면서 문득 옛 한국어 봉투를 생각했다. 기록에 발송됐다는 표시가 없다고, 반드시 누군가 숨겼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건물을 수리하면서 옮겨졌을 수도 있고, 보호를 위해 보관됐을 수도 있었다. 우리가 할 일은 누군가를 의심하는 게 아니라 이동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작업이 끝나자 문 아래의 낮은 문턱도 눈에 들어왔다. 지팡이를 짚는 사람에겐 걸림돌이 될 높이였다.
"루시아 님, 이 턱에 작은 경사판을 설치해도 될까요?"
"왜 나한테 묻지?"
"이 건물 안전 담당이시니까요."
그녀는 발로 문턱을 살짝 눌러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고정만 잘하면 괜찮겠다. 미끄럽지 않은 재질로 해."
나는 시설팀에 정식 작업 의뢰를 냈다. 비용은 금화 한 닢도 되지 않았다. 가끔은 위대한 권리 개혁보다 문턱 하나를 낮추는 것이 눈앞의 사람을 더 빨리 도울 수 있다. 그 사실을 경비실이 가르쳐 줬다.
그때 피코가 내게 물었다.
"그럼 마왕님 망토도 문턱에 걸리지 않겠네요?"
"그분 망토는 별도 예산으로도 해결하기 어려울걸."
루시아가 소리 내 웃었다. 창구가 열리기도 전에 우리는 첫 민원을 해결한 셈이었다. 민원인은 사람도 아니고 문턱이었지만.
루시아는 경사판 설치가 끝나면 직접 확인하겠다고 했다. 나는 작업 지시서에 점검 날짜를 적었다. 피코는 우리가 진지하게 서류를 작성하는 동안 바닥에 앉아 문턱의 높이를 손가락으로 재고 있었다.
"이제 제가 넘어지지 않겠어요!"
"그게 목표야."
"마왕님은요?"
"마왕님은 망토부터 줄여야겠지."
나는 다시 안내문을 바라봤다. 작은 공간 하나를 제대로 운영하기도 쉽지 않지만, 그 문을 통과하는 사람이 자기 말을 꺼낼 수 있다면 충분히 해 볼 만한 일이다.
오후에는 공동 시범 창구의 첫 시험 운영이 있었다. 장소는 마왕성 북문 옆 빈 경비실. 이곳은 한때 투구 보관소였다. 문 앞에는 아직도 '분실 투구는 자비로 교체'라는 오래된 안내문이 남아 있었다.
루시아가 벽에서 그 종이를 떼어 냈다.
"이건 언제 적 규칙이지?"
"투구를 쓰던 사람들이 월급으로 투구를 샀을 시절이겠죠."
"전투 장비를 개인 돈으로 사게 했다고?"
나는 대답 대신 몰트가 보내 준 과거 지출 장부를 보여 줬다. 루시아는 한동안 말이 없더니 종이를 조용히 접었다.
"오늘 회의 끝나고 장비 지급 규정도 보자."
"좋습니다. 우리 할 일이 또 생겼네요."
"신나는가?"
"전혀요. 그런데 좋아 보이는 척하면 급여가 오릅니까?"
"그건 모르겠군."
서로를 보는 눈빛에 깊은 공감이 담겼다.
첫 시험 접수인은 북문 경비대의 야간 교대 담당이었다. 그는 지난달 동료의 대행 근무를 맡았는데, 시스템에선 동료의 근로조건 변경에도 동의한 것으로 표시돼 있었다.
"제가 대신 근무했다고 그 사람 월급을 줄여도 된다는 뜻은 아니잖습니까."
"맞습니다. 대행 사실과 임금 변경은 다른 일입니다."
"그런데 서류에는 제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나는 서류를 펼쳤다. 구형 직무 코드와 자동 전환번호. 여러 달을 따라다닌 그 지긋지긋한 숫자가 보였다.
0003.
피코가 도장을 꺼내려다가 멈칫했다.
"공식 문서에는 찍으면 안 되죠?"
"응. 대신 접수 내용은 네가 정리해 볼래?"
녀석은 무척 진지한 표정으로 판에 글을 적었다.
[대신 일했음: 확인. 동료 월급 변경 동의: 확인되지 않음.]
"잘했어."
"그럼 빵 하나요?"
"업무 성과 보상 기준을 새로 만들어야겠네."
"그런 복잡한 말씀 말고 빵 하나요."
나는 결국 내 돈으로 빵을 사 줬다. 적어도 그 부분에서는 계약 분쟁이 없었다.
시험 접수인의 신고는 구형 인사 시스템 담당자 베르케에게 전달됐다. 변경된 임금 기록이 실제 지급에 반영됐는지 확인한 뒤 정정하기로 했다. 임시 화면만 고쳐 놓고 해결했다고 선언하지 않는 건 중요했다. 일을 덜 하려면 지금 확인해야 한다. 잘못된 걸 그냥 두면 나중에 야근이 이자를 붙여 찾아온다.
저녁 무렵, 제르칸이 갑자기 창구에 나타났다. 검은 망토가 문에 걸려 찢어질 뻔하자 그는 어두운 눈으로 경비실을 노려봤다.
"내 위대한 시설에 문이 너무 작구나."
"기존 북문 경비실입니다. 망토가 큰 겁니다."
"왕의 위엄을 축소하라는 말이냐?"
"망토 끝을 조금만 접으시면 됩니다."
그는 충격받은 얼굴로 피코를 바라봤다. 피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게 좋을 것 같아요. 문 고치는 건 돈 들어요."
마왕은 마지못해 망토를 걷어 올렸다. 가끔은 제국을 움직이는 힘보다 임프 하나의 진심이 더 무섭다.
그가 둘러본 창구에는 안내문이 걸려 있었다.
[긴급 인계는 최종 동의가 아닙니다. 본인의 의사는 본인이 확인합니다.]
"좋구나. 하지만 너무 밋밋하지 않으냐? 내 초상을 그리면—"
"안 됩니다."
"아직 말을 끝내지 않았다!"
"지난 회의에서 참관석은 누구의 것도 아니라고 동의하셨죠. 여기도 같습니다."
마왕은 안내문을 한참 바라봤다. 그러더니 의외로 조용히 말했다.
"그렇다면 저 글자가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도록 해라. 그림이 아니라."
나는 웃음을 참았다.
"네. 밝은 등불을 달겠습니다. 예산 범위 안에서요."
그날 밤 업무를 정리하려는 순간 아우렐이 다시 연락했다.
[중립 우편관의 인계 대장에 연결 가능한 항목 발견. 옛 한국어 재심 안내 봉투와 동일한 봉인 규격. 실배송 여부는 미확인. 특정 시점에 발송 허가 대신 ‘재료 반출’ 결재가 등록됨.]
"재료 반출이요?"
나는 의자에 앉아 머리를 긁었다.
편지 한 통이 발송되지 않았다면 어디론가 이동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문서와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재료 반출 결재가 왜 같은 날 존재할까.
아우렐이 마지막 문장을 덧붙였다.
[반출 물품명: 비어 있는 봉투 열두 장.]
나는 어둠 속에서 그 숫자를 다시 읽었다.
비어 있는 봉투 열두 장.
한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려고 열두 장의 봉투를 준비한 것일까. 아니면 열두 사람에게 각기 다른 선택권을 돌려주려던 것일까.
답은 알 수 없었다. 다만 다음 날 확인할 대상은 생겼다.
나는 조사 계획서 맨 위에 썼다.
'봉투가 몇 장이었는지보다, 누가 그것을 가져갈 권한이 있었는지 먼저 확인.'
그리고 불을 껐다. 편지는 기다릴 수 있다. 나도 내일 출근하려면 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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