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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마왕성에 취업했더니 내가 제일 무섭단다 · 120화
PAYLUA ORIGINAL · 제120화

120화. 오늘도 대신 동의하지 않겠습니다

마왕성에 취업했더니 내가 제일 무섭단다 · 6,334자

오프라인 책장
나는 제3감리 공동 회의장 앞에 붙은 문구를 바라봤다. [안건 재상정 신청은 해당 기관의 적법한 대표권 또는 공동 심의권에 따라 접수합니다.] “적법한 대표권이라.” 내가 중얼거리자 피코가 물었다. “도윤 님은 대표예요?” “아니. 난 마왕성의 재정 담당 직원이지.” “그럼 마왕님은요?” “마왕성의 대표이긴 하지만 제3감리 모든 사람을 대신할 권한은 없지.” “그럼 안건을 못 올리는 거예요?” “공동 규정의 실무 개선 제안을 할 수 있는 경로가 따로 있어. 그걸 쓰면 돼.” 피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라나는 임프에게 가장 중요한 교육은 상사의 권한이 전 세계까지 미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상사가 제르칸이라면 더더욱. 회의에는 왕국의 라델, 천계의 아우렐, 중립 공관의 아레인, 마왕성의 몰트와 내가 참석했다. 루시아는 출입 경비를 도왔고 피코는 안내 자료를 나눠 줬다. 제르칸은 평범한 접이식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이 회의에 개인 왕좌를 가져오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대신 옷깃의 금색 장식은 평소의 두 배였다. “왜 오늘은 말이 없으십니까, 폐하?” 내가 속삭이자 제르칸은 엄숙하게 답했다. “나도 배우는 중이다. 오늘은 듣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이 말은 아마 나중에 마왕성 역사책에 적어도 괜찮을 것이다. 단, 바로 뒤에 그가 몰래 간식을 먹었다는 사실도 함께 적어야 공정하겠지만. 의장은 기존 심의 자료의 검증 결과부터 확인했다. 당시 ‘직접 확인 절차’ 신설안은 즉시 대면 의무화 부분 때문에 보류됐다. 그러나 긴급 인계를 임시 상태로 두고 사후 재확인을 마련하라는 권고는 남았다. 일부 현장 안내소가 그 권고를 적용했다는 흔적도 확인됐다. 후대 시스템은 이 구분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했다. “이 사실을 바탕으로 오늘 무엇을 결정하려고 합니까?” 의장이 물었다. 나는 준비한 종이를 펼쳤다. “과거의 모든 계약을 무효라고 단정하려는 게 아닙니다. 먼저 오늘부터 발생하는 새 기록의 오류를 막고, 이미 영향을 받은 사람에게 재확인 경로를 만드는 원칙을 제안합니다.” 우리는 다섯 가지를 적어 왔다. 긴급 인계와 최종 동의의 분리. 거절의 독립적 기록. 담당 기관 간 통지 성공 여부 확인. 권리자에게 안전하게 다시 연락할 수 있는 창구. 마지막으로, 본인의 신원이나 소재를 공개하지 않고도 제도 오류를 신고할 수 있는 절차. “불응한 사람은요?” 천계 쪽 위원이 물었다. “자동 동의로 바꾸지 않습니다.” “영원히 답이 없으면요?” “그 경우 별도 규정에 따라 권리를 보존하거나 법적 판단을 받아야 합니다. 편의 때문에 승인했다고 적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 업무가 지연될 수 있겠군요.” “그럴 수 있습니다.” 나는 잠시 멈췄다. “하지만 처리 속도를 높이는 가장 빠른 방법이 다른 사람의 동의를 꾸며 내는 것이라면, 그건 업무 개선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회의실은 조용해졌다. 몰트가 내 뒤에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왕국 측에서는 전시 긴급 이송의 예외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도 동의했다. 환자가 치료를 받아야 할 때 서명 때문에 구조를 멈추자는 내용은 아니었다. 우리는 긴급 보호 행위와 장기 계약 체결의 효력을 나누는 문구를 추가했다. 루시아가 손을 들었다. “구조를 거절하는 서류를 받은 적이 있다. 그 사람은 의식이 없었고, 누가 허가해 줄지 몰라서 들것이 문 앞에 멈췄다. 그런 일은 다시 없어야 한다.” “그렇다면 예외가 너무 넓어지는 건 아닙니까?” 누군가 물었다. “예외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쓰고, 그 사람이 깨어나면 다시 물어야 한다.” 루시아는 짧게 말했다. 나는 그 말을 회의록에 적었다. 길고 복잡한 규정보다 현장 경험 하나가 문제의 중심을 더 또렷하게 보여 줄 때가 있다. 점심 휴식에는 아우렐이 내게 다가왔다. “옛 대리 접수인의 신원을 알아내려고 애쓰지 않는군요.” “궁금하죠. 하지만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도 고칠 수 있는 문제가 보이니까요.” “사실 제7서고에서 추가 대조를 진행 중입니다.” “어떤 자료요?” “옛 재심 신청 준비 목록입니다. 신원은 비공개고, 당시 접수 경로만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결과가 나오면 알려 주세요. 허가된 범위에서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에 앞서 제르칸은 제안을 하나 했다. 모든 참석자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그다음에 오늘 무엇을 결정할 권한이 있는지도 말하자는 것이었다. “폐하가 그런 제안을 하셨다고요?” 내가 되묻자 마왕은 턱을 치켜들었다. “내가 늘 허세만 부리는 줄 아느냐?” “아니요. 아주 가끔은 좋은 제안도 하십니다.” “아주 가끔?” “이번엔 특히 좋습니다.” 그는 만족한 얼굴로 앉았다. 나는 그 제안을 의장에게 전달했다. 실제로 회의 첫머리에서 발언권과 의결권, 단순 참관권을 구분하면 뒤에 생길 오해를 줄일 수 있었다. 자기 차례가 오자 제르칸은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마왕성의 주인이자 마계의 위대한—” “폐하.” 내가 속삭였다. “아, 그래. 공동 개선 시범 사업의 마왕성 측 인력 지원 권한을 가진 대표 제르칸이다.” 그가 문장을 끝내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났다. 그는 웃음을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몰트는 재정 지원 범위와 인사 승인 권한을 구분했다. 라델은 왕국의 법무 검토 의견 제출 권한만 있고 최종 결정을 대신 내릴 수 없다고 했다. 아우렐은 천계 기록 분류의 정정 권고를 설명할 수 있지만 개별 권리자 정보를 공개할 권한은 없다고 했다. 아레인은 중립 공관의 보존 절차와 자료 접근 범위를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럼 도윤 님은요?” 피코가 물었다. “나는 회계 자료 검토와 우리 기관의 오류 신고를 맡은 직원. 다른 사람의 동의를 대신하는 권한은 없어.” “완벽해요.” 피코가 손뼉을 쳤다. 회의실 뒤편에서는 다른 기관의 참석자가 조용히 웃었다. 나는 얼굴이 조금 뜨거워졌다. 그래도 이 방식은 필요했다. 서류가 누구의 권한으로 작성됐는지 처음부터 확인하지 않으면 나중에 또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대신한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회의 중간에 나는 짧은 사례를 하나 꺼냈다. 이름이 없는 가상 환자였다. 응급 치료가 필요했고, 의료진이 치료를 시작했다. 그 사실은 나중에 환자에게 치료 비용을 설명해야 할 이유가 될 수는 있지만, 환자가 영구 복무 계약에 동의한 증거는 아니다. 한 위원이 질문했다. “그럼 치료비는 누가 부담합니까?” “별도 법령과 제도에서 정해야 합니다. 여기서 제가 비용 부담자를 마음대로 정할 수는 없습니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너무 많군요.” “네. 하지만 서로 다른 문제를 하나의 도장으로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휴식 시간에는 피코가 동료들에게 도장을 보여 주었다. 녀석은 이제 공식 서류에 찍는 것은 안 된다는 점부터 설명했다. 교육용으로만 보여 주고, 실제 확인은 각 기관의 적법한 방식에 따라 남겨야 한다고 말했다. “많이 배웠구나.” 내가 말하자 피코가 웃었다. “저도 언젠가 후배가 생기면 가르쳐 줄래요.” “좋지. 다만 내 업무까지 전부 대신하라고 가르치면 안 돼.” “그건 도윤 님이 싫어하시잖아요.” “정확해.” 나는 녀석에게 간식 하나를 건넸다. 개인 돈으로 산 빵이었다. 피코는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옆에서 아우렐이 물었다. “한도윤 씨,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가면 이런 일은 그만두시겠습니까?” 나는 잠시 생각했다. “그때 가 봐야 알겠죠. 다만 어디에 있든 누군가의 서명을 함부로 대신하는 일은 안 하고 싶습니다.” 그가 웃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원칙 같군요.” 나는 회의실 문을 바라봤다. 안에서는 사람들이 여전히 말하고 있었다. 의견이 다르고, 돈이 부족하고, 서로 자기 사정을 먼저 설명하려 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적어도 누구의 말을 누가 했는지 구분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그런 걸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그 당연한 일을 기록으로 지키는 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필요한지 알고 있었다. 오후에는 가장 어려운 부분인 비용이 남았다. 재확인 창구를 운영하려면 사람이 필요하고, 통신망을 유지하려면 돈이 들어간다. 천계는 비용을 전부 맡을 수 없다고 했고, 왕국은 전쟁 구호 예산을 그대로 쓰기는 어렵다고 했다. 중립 공관은 야간 인력 부족을 이야기했다. “제도는 공짜로 굴러가지 않습니다.” 내가 말했다. “하지만 예산이 없으니 동의 없는 승인을 계속하자는 결론은 낼 수 없죠. 우선 사고가 잦은 항목부터 시범 적용하고, 실제 처리량과 인건비를 공개된 범위에서 계산합시다.” 제르칸이 손을 들었다. “마왕성은 시범 사업에 인력을 지원하겠다.” 나는 미리 준비한 지원 범위 표를 내밀었다. “주당 두 차례, 업무시간 내 담당자 한 명. 신규 초과근무는 별도 승인입니다.” 마왕이 표를 봤다. “내가 조금 전에 얼마나 멋진 말을 했는지 알고 있느냐?” “알죠. 그래서 예산표를 준비했습니다.” “네가 제일 무섭단다.” “오늘은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피코가 의자 뒤에서 조용히 웃었다. 몇 시간의 논의 끝에 시범 운영 권고안이 가결됐다. 세부 시행 일정과 예산은 추가 승인이 필요하지만, 임시 인계와 최종 동의를 구분해야 한다는 공동 원칙은 회의록에 남았다. 나는 결과를 읽으면서도 과장하지 않았다. 오늘은 모든 문제가 해결된 날이 아니었다. 다만 사람들이 문제를 다시 다룰 수 있는 길 하나가 공식적으로 열렸다. 라델은 내 옆에서 고개를 숙였다. “축하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네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는 웃었다. 회의가 끝나자 피코가 나에게 종이를 한 장 건넸다. [오늘의 성공: 다른 사람 대신 마음대로 찬성하지 않기.] “이건 좀 과장인데.” “그래도 오늘은 기뻐해도 되잖아요!” 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오늘은 좋아해도 되겠다.” 오랜만에 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 제르칸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그렇다면 축하 연회를 열자!” “기존 회의 참가자 식비 한도 안에서 간단한 식사 정도면 됩니다.” “너는 정말 축하할 줄 모르느냐!” 그날 저녁 우리는 마왕성의 작은 식당에서 수프와 빵을 먹었다. 루시아는 평소보다 조용했고, 몰트는 오래된 회의록을 다시 읽었다. 제르칸은 본인의 새 망토를 어쩐지 조금 자랑스러워했다. 피코는 자기 앞의 빵을 반으로 갈라 내게 주었다. “도윤 님. 오늘은 제 식비에서 나갈게요.” “너 돈 모으지 않았어?” “네. 그래도 이건 같이 먹고 싶어요.” 나는 빵을 받았다. 아주 대단한 승리 만찬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래 기억날 것 같았다. 집무실로 돌아왔을 때 아우렐의 전송이 도착했다. 제7서고가 옛 재심 준비 목록을 확인했으며, 비식별 공개 범위를 검토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오늘 끝난 회의 결과를 보낸 뒤 다음 자료를 기다리기로 했다. 잠시 후 구슬에 짧은 부가 문구가 떠올랐다. [참고: 과거 직접 확인 재심 신청은 제3감리 안건 목록에 한 차례 더 등록됐음. 공개본에는 신청자 성명이 없음. 해당 서류의 수신처는 현재 폐쇄된 통신 주소임.]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한 차례 더 등록됐다고?” 아우렐이 답했다. “네. 첫 심의 보류 뒤 재심을 준비한 기록입니다. 신청서 원본은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누군가는 그때 포기하지 않았군요.” “그렇게 볼 수는 있지만, 실제 제출됐는지는 더 확인해야 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나도 배웠다. 마음이 앞서는 일일수록 기록을 늦게 읽어야 한다. 그런데 마지막 줄을 보고 손이 멈췄다. [재심 안내 우편의 전달 언어: 한국어.] 나는 한참 동안 화면을 바라봤다. 한국어 편지. 송-4189. 제7서고.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가 조사한 옛 직접 확인 절차. 이 셋이 같은 사람에게서 나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작성자가 누구인지, 문서의 실제 내용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과거의 한 재심 안내문이 한국어로 발송될 예정이었다는 사실만은 새로 확인됐다. 나는 피코가 붙여 준 쪽지 옆에 질문을 하나 더 적었다. ‘그 통지를 받아야 했던 사람은, 자기 선택을 다시 말할 기회를 얻었을까?’ 피코가 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도윤 님. 또 야근해요?” “아니. 오늘은 여기까지.” “정말요?” “응. 내일도 일이 있으니까.” 녀석이 안심한 얼굴로 웃었다. 나는 전송 구슬을 덮었다. 편지의 주인을 찾겠다는 마음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언젠가 그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첫 번째 질문은 ‘당신이 무슨 비밀을 알고 있습니까’가 아닐 것 같았다. ‘지금 이 이야기를 해도 괜찮겠습니까.’ 그리고 대답이 아니라고 돌아온다면, 그 대답도 기록할 것이다. 나는 마왕성에서 제일 무서운 회계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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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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