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서명을 일곱 번 했다고?”
마왕 제르칸은 왕좌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도 안 된다! 나는 오늘 도장을 한 번도 찍지 않았다!”
“오늘이 아니라 지난달 자료입니다.”
“그럼 더 말이 안 되지! 지난달은 전쟁 준비 때문에 바빴다!”
이상하다. 보통 사람은 바쁘면 서명을 했는지 기억을 못 하는데, 이분은 바빴다는 사실을 서명하지 않았다는 근거로 쓰고 있다.
나는 도장 찍힌 문서를 한 장 펼쳤다.
“전하, 이 지출을 기억하십니까?”
[왕실 애완 박쥐 전용 비단 이불 구입 / 금화 열두 닢]
“모른다!”
“이건요?”
[전하의 위엄 향상용 연막 / 금화 서른 닢]
“그것도 모른다!”
“망토 소독비는요?”
“내 망토는 더러워지지 않는다!”
저 말에 방 안의 모두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한쪽에 서 있던 루시아는 기침을 했다.
아, 더러워지지 않는다는 건 마왕님 개인 의견이구나.
나는 우선 확실한 사실만 기록했다. 제르칸은 세 지출을 승인한 기억이 없다고 주장했다. 기억이 없다는 것과 도장이 위조됐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도장은 누가 보관합니까?”
몰트가 대답했다.
“전하의 집무실 금고에 있네. 다만 긴급 지출용 부도장이 재정실에도 하나 있지.”
“부도장은 누가 꺼낼 수 있죠?”
“나와 부실장, 그리고 전하의 비서관.”
좋아. 조사 범위가 세 명으로 줄었다.
그런데 옆에서 피코가 손을 들었다.
“실장님, 그 열쇠는 제가 보관하는데요.”
“그랬나?”
“네. 열쇠 보관함 열쇠는 경비실에 있고요.”
“경비실 열쇠는?”
“청소 담당 임프가요.”
“그 청소 임프는?”
“교대 때마다 달라요.”
나는 말없이 펜을 들었다.
이곳의 보안 체계는 철저했다. 누구든 들어갈 수 있도록 여러 단계를 거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부도장부터 보여 주세요.”
재정실 금고를 열자 낡은 상자가 나왔다. 안에는 붉은 보석이 박힌 인장이 들어 있었다. 피코는 두 손으로 상자를 조심스레 받쳤다.
“절대 바닥에 놓으시면 안 돼요. 지난번에 떨어뜨렸다가 복도 벽이 세 시간 동안 왕명을 외쳤거든요.”
“그거 참 편리하네.”
“벽이 너무 크게 외쳐서 다들 귀가 아팠어요.”
역시 편리함에는 부작용이 있다.
나는 실제 인장과 일곱 문서의 무늬를 비교했다. 같은 왕실 문장이었지만 한 문서의 꼬리 장식은 미세하게 꺾여 있었다. 프린트 오류 같은 수준이었다.
“피코, 확대경 있어?”
“네. 드래곤 비늘로 만든 거요!”
비늘을 가져와 살펴보자 차이가 더 뚜렷했다. 일곱 건 중 네 건에는 같은 결함이 있었다.
“이거 복제품일까요?”
“아직 몰라. 봉인 마법이 번지면서 생긴 자국일 수도 있어.”
나는 서류 날짜를 정렬했다. 결함이 있는 네 건은 모두 초승달이 뜬 밤에 승인됐다고 되어 있었다. 나머지 세 건은 대낮이었다.
“이 시간에 전하께서 집무실에 계셨나요?”
루시아가 코웃음을 쳤다.
“초승달 밤이면 전하께서는 동굴에서 연설을 연습하신다.”
“왜 하필 동굴에서요?”
“메아리가 좋거든.”
아.
그렇구나.
나는 표정을 관리했다. 사장의 개인 취미가 알리바이가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한편 몰트는 내 자료를 보더니 걱정스럽게 말했다.
“이것만으로는 위조라고 할 수 없겠군.”
“맞습니다. 일단 도장 관리 실태부터 바꾸죠.”
“전하께서는 범인을 잡으라고 하셨는데?”
“범인이 있는지도 아직 모르니까요.”
마왕이 불쑥 끼어들었다.
“인간, 나는 이미 범인을 알고 있다!”
“누군데요?”
“저 사악한 왕국 놈들이 분명하다!”
왕국이 마왕성 비단 이불 구매서류까지 조작했다면 그쪽도 인력이 정말 남아돈다는 뜻이다.
나는 감히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대신 지출 승인 원본과 금고 출입 기록을 보존하자고 제안했다. 부도장은 임시로 봉인하고 대체 승인 절차를 마련하기로 했다.
“그럼 오늘부터 도장을 못 찍는 건가?”
제르칸이 아쉬운 목소리로 물었다.
“직접 서명하시면 됩니다.”
“내가 직접?”
“네.”
마왕의 표정이 무너졌다.
그 얼굴은 꼭 전자결재 시스템이 멈춰 수기 결재를 해야 하는 임원 같았다.
회의가 끝난 뒤 피코와 서류를 정리했다. 제르칸은 돌아가기 전 내게 한마디를 던졌다.
“인간. 만약 내 이름으로 돈을 훔친 놈이 있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그전에 돈이 어디로 갔는지부터 확인하겠습니다.”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봉인된 부도장 상자 밑에서 얇은 종이가 나왔다.
[사용 허가: 제17군단 긴급 보급 / 신청자 서명 생략]
제17군단.
또 그 이름이다.
나는 종이 모서리의 검은 먼지를 문질렀다. 지난번에 본 흑철 검 구매명세서의 잉크와 비슷했다.
하아.
사장님 도장까지 무단으로 빌려 쓴 누군가가 있다면, 이 사람은 진짜 회계 담당자를 잘못 만났다.
제12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