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항 공공 안내소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나는 맨 처음 보인 문구를 읽었다.
[접수 창구: 주민등록, 운송 허가, 실종자 문의, 귀환 신청.]
“귀환 신청이요?”
피코가 내 얼굴을 올려다봤다.
“도윤 님도 줄 서야 해요?”
“내 귀환 신청은 천계 제7서고에서 처리 중인 별도 절차야. 여기에는 옛 제3감리 지침을 보러 온 거고.”
“그럼 줄 안 서도 돼요?”
“자료 열람 접수에는 줄 서야지.”
피코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세계에 와서 가장 공평하게 적용되는 규칙은 줄 서기였다. 마왕도 예외가 아니다. 적어도 내가 보는 앞에서는.
창구에는 오래된 접수 번호표 기계가 남아 있었다. 손잡이를 돌리면 종이가 한 장씩 나왔다. 피코가 신기해서 돌렸더니 번호표가 세 장 연속으로 나왔다.
“하나는 저, 하나는 도윤 님, 하나는 루시아 님!”
“우리 일행은 같은 신청이야. 표 한 장만 쓰고 나머지는 반납해.”
피코가 입술을 내밀었다.
“세 장을 받으면 빨리 끝나는 줄 알았어요.”
“그건 줄을 세 배로 늘리는 방법이야.”
루시아는 안내소 한편에서 울고 있는 소년을 발견했다. 소년은 오래전 실종된 아버지의 통행 기록을 찾으러 왔다고 했다. 접수 담당은 옛 자료가 비공개일 수 있으니 정식 신청을 안내했다.
루시아가 나를 바라봤다.
“우리가 도와줄 수 있나?”
“신원을 대신 증명할 수는 없지만, 서식을 읽어 줄 수는 있죠.”
나는 소년과 보호자에게 필요한 항목을 설명했다. 당시 이동 날짜와 이름을 알면 신청 대상 범위를 좁힐 수 있다고 했다. 다만 기록이 없다는 말이 곧 사람이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며, 자료 보존 상태도 확인해야 했다.
소년은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런 답도 주지 못했는데 감사하다고 했다. 이제 나는 그런 감사가 조금 익숙했다. 익숙하다고 해서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 차례가 되어 창구 직원에게 현장용 시범 절차서의 보존 여부를 물었다. 그는 창고로 들어가더니 낡은 판자 하나를 가져왔다. 판자에는 오래된 안내문 일부가 남아 있었다.
[긴급 인계는 본인 동의의 대체가 아닙니다. 상태 회복 후 다시 확인합니다.]
나는 멍하니 문구를 바라봤다. 우리가 찾던 말이 특별한 금고가 아니라 안내소의 낡은 표지판에 적혀 있었다. 수십 년 전에 누군가 이 문장을 손님들이 볼 수 있는 자리에 걸었다는 뜻이었다.
“책은 없습니까?”
직원이 고개를 저었다.
“현장용 책자는 시설 개편 때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원본은 확인되지 않았어요.”
“이 문구가 그 책에서 나온 건지 확인 가능할까요?”
“보존된 설치 승인 목록은 있습니다. 다만 작성자 이름은 없고 관리 부서만 나와요.”
나는 설치 승인일과 당시 심의 보류일을 비교했다. 설치 승인은 심의 보류로부터 보름 뒤였다. 즉, 본안이 보류됐어도 현장에서는 임시 안내를 시행하려 했다는 흔적이 있었다.
“누군가는 포기하지 않았군요.”
아우렐이 작게 말했다.
“네. 다만 얼마나 오래 운영됐는지는 확인해야겠죠.”
안내소 뒤편에는 오래된 우편함이 있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함을 열 수는 없었지만 외부의 작은 명판은 읽을 수 있었다.
[본인 회복 알림 / 귀환 대상 확인 / 대리 수령 금지.]
“귀환 대상이면 돌아갈 사람일 수도 있겠네요.” 피코가 말했다.
“그럴 수도 있어. 하지만 구형 기록의 귀환은 물품 반환이나 신분 복구에도 쓰였지.”
나는 한도윤이라는 이름이 적힌 천계 제7서고 목록을 떠올렸다. 그 한 단어 때문에 얼마나 많은 오해가 생겼던가.
오후에 안내소 담당자가 비식별 신청 통계를 제공했다. 시범 제도가 시작된 첫 달에는 긴급 인계 후 재확인을 요청한 건수가 여러 건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 달부터 통계가 갑자기 줄었다.
“제도를 이용하는 사람이 줄었나 봅니다.”
피코가 말했다.
“이 수치만으로는 알 수 없어.”
나는 통계의 제목을 가리켰다.
첫 달에는 [재확인 요청 접수 건수]였다. 둘째 달에는 [재확인 완료 건수]로 바뀌어 있었다. 신청과 완료를 같은 그래프에 놓으면 안 된다.
“누가 제목을 바꿨죠?”
직원이 답했다.
“시설 통합 때 통계를 새로 만들었다고만 되어 있습니다.”
“그럼 감소했다고 단정하지 맙시다. 지표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비교표를 만들었다. 접수, 통지 시도, 회신, 거절, 완료. 다섯 단계가 따로 있어야 했다. 베르케는 전송으로 표를 받더니 감탄했다.
“이렇게 나누면 시스템 상태가 더 많아지는데요.”
“그래야 현실과 맞잖아.”
“맞습니다. 다만 화면을 새로 그려야 해요.”
“그건 개발자의 월급으로 해결할 일이야.”
“도윤 님, 저도 월급 좀 올려 주세요.”
“협상은 인사 담당과 하도록.”
베르케가 웃으며 구슬을 껐다.
안내소의 오후 업무는 잠시 혼잡해졌다. 멀리서 온 운송 상단이 통행 허가를 받으러 한꺼번에 몰렸기 때문이다. 일부는 옛 서식으로 신청했고, 일부는 새 서식으로 신청했다. 창구 직원은 혼자서 두 종류의 서류를 처리하다가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도울 수 있을까요?”
내가 묻자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자료 열람 오신 분께 창구 일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그럼 서식 차이만 정리해 드릴까요? 실제 신청서를 대신 만지지는 않겠습니다.”
그는 한참 고민한 뒤 공개된 안내문을 비교하는 일은 괜찮다고 했다. 나는 피코와 함께 두 서식을 옆에 붙였다. 구형에는 '대리 수령인' 한 칸이 있었고, 신형에는 '신청인'과 '통지 수령인'이 분리돼 있었다.
“이 차이 때문에 사람들이 헷갈리겠네요.”
직원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구형 서식을 계속 허용하는 이유는 멀리서 온 사람들에게 새 종이를 다시 쓰게 하면 시간이 너무 걸리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사정도 이해했다. 문제는 신형 시스템이 구형 칸 하나를 두 칸 모두에 복사한다는 점이었다.
“이건 꼭 확인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대신 통지를 받는다고 신청인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직원은 화면을 보더니 곧바로 담당자에게 알렸다. 적용 범위를 조사하기 전까지 구형 서식의 자동 처리를 보류하고 직원이 직접 확인하도록 했다. 당장 줄이 조금 더 길어졌지만 적어도 권리자를 바꿔 버리지는 않았다.
“오늘도 새 문제가 나오네요.”
피코가 투덜거렸다.
“문제가 나오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지금 발견한 덕분에 더 큰 일이 되기 전에 막을 수 있으니까.”
직원은 고맙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따뜻한 물을 한 잔씩 내주었다. 피코는 혹시 빵도 주는지 눈치를 봤지만, 내가 쳐다보자 얌전히 컵만 받았다.
그때 줄 맨 끝에 서 있던 늙은 상인이 다가왔다.
“난 읽는 게 느리오. 전에는 젊은 직원이 대신 적어 줬는데, 이제는 직접 써야 한다는 거요?”
“아닙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작성 도움을 받는 것과 본인의 권리를 대신 결정하는 것은 다릅니다. 도움을 주는 사람은 있어도 되죠. 다만 어떤 내용인지 이해하셨는지 확인할 방법이 필요합니다.”
상인은 한참 나를 보다가 웃었다.
“그럼 읽어 줄 사람이 필요하겠군.”
안내소 직원이 신청서를 천천히 읽어 주었다. 상인은 잘못 적힌 수취 장소 하나를 고쳤다. 그것만으로 배송 사고를 막을 수도 있었다.
루시아가 내게 속삭였다.
“누군가 글을 몰라도 자기 뜻은 있을 테니까.”
“네.”
“그런데 옛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런 것도 생각했을까?”
“아마 고민했겠죠. 다만 지금 우리가 아는 자료만으로는 범위를 알 수 없어요.”
그녀는 더 묻지 않았다.
오후 늦게 안내소 한쪽에서 서류함을 옮기는 작업이 시작됐다. 우리는 업무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담당자는 문서함에 붙은 두 번호가 서로 다른 걸 확인했다. 하나는 운송번호, 하나는 내용물 분류번호였다. 예전에는 두 번호를 모두 쓰다가 신형 목록에서 하나만 남긴 것으로 보였다.
나는 아레인에게 확인을 요청했다.
“혹시 현장용 시범 절차서가 다른 분류로 옮겨졌을 가능성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다만 그럴 경우 이동 대장과 보존고 목록을 대조해야 합니다.”
“그 작업을 공동 조사 안건에 넣죠.”
자료함을 옮기던 직원은 우리 대화를 듣고 씁쓸하게 웃었다.
“선반 하나 옮기는데도 이렇게 기록이 많이 필요하군요.”
“지금은 번거로워도 나중에 누군가 자료를 찾을 때 도움이 될 겁니다.”
“몇십 년 뒤에 찾아오실 분도 있을까요?”
나는 오늘 우리가 왜 이곳에 왔는지 떠올렸다.
“있을지도 모르죠. 저희가 지금 그러고 있으니까요.”
그는 미소 지었다.
줄이 줄어든 뒤 우리는 안내소의 오래된 직원 교육자료도 살폈다. 거기에는 주민의 요청을 거절할 때 단순히 '불가'라고 쓰지 말고, 이유와 다른 신청 경로를 설명하라는 안내가 있었다. 어쩐지 낯익었다. 내가 귀환을 보류하면서 요구했던 것도 비슷한 것이었다.
피코는 종이를 뚫어져라 봤다.
“도윤 님, 거절에도 친절한 방법이 있네요.”
“그럼. 거절했다고 누군가의 권리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그럼 빵 하나 더 달라는 제 요청도 친절하게 거절해 주세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신청 취지는 이해했지만, 예산과 건강을 고려해 추가 지급은 어렵습니다. 개인 돈으로 구매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피코는 한숨을 쉬었다.
“역시 그냥 안 된다는 말이 더 낫겠어요.”
우리는 함께 웃었다. 서류 하나를 바꾸는 데는 오래 걸렸지만, 사람들은 설명을 듣고 조금 덜 상처받을 수 있었다.
안내소 책임자는 우리가 정리한 구형·신형 서식 차이표를 직원 교육 자료로 쓰고 싶다고 했다. 나는 출처와 확인 일자를 남기는 조건으로 동의했다. 실제 개인정보는 표에 넣지 않았다.
“복잡한 문제가 있는데도 방법은 생각보다 단순하네요.”
책임자가 말했다.
“표를 만드는 건 간단하죠. 문제는 실제 업무에서 예외가 생길 때마다 누가 확인할지 정하는 겁니다.”
“그걸 다음 회의 안건으로 올리겠습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피코를 돌아봤다.
“오늘 네가 배운 건 뭐야?”
“구형 종이를 받아도 신형 시스템이 마음대로 두 사람으로 만들면 안 된다는 거요.”
“정확해.”
“그리고 빵 서비스는 점원님이 허락하시면 받을 수 있다는 것도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에게는 두 번째 교훈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통신 구슬에는 베르케가 보낸 짧은 답장이 떠 있었다. 마왕성의 구형 신청서에서도 비슷한 자동 복사 규칙을 검사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작은 창구의 문제가 성 전체의 전산 점검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어서 소년의 보호자가 다시 찾아왔다. 그는 신청서 마지막 항목을 어떻게 적어야 할지 물었다. 항목은 '신청 결과를 누구에게 전달할 것인가'였다. 소년은 자기 이름을 적고 싶어 했다. 보호자는 아직 어리니 대신 받겠다고 했다.
나는 둘에게 설명했다.
“보호자가 대신 수령하도록 할 수 있는 규정이 있는지 담당자와 확인해 보세요. 다만 수령한 사람과 실제 정보의 권리자를 같은 사람으로 처리하면 안 됩니다.”
소년이 말했다.
“그럼 엄마가 편지를 받아도, 제 편지가 되는 거죠?”
“권리가 누구에게 있는지는 신청 종류에 따라 확인해야 하지만, 적어도 우편을 받은 사람이 자동으로 내용의 주인이 되는 건 아니야.”
소년이 만족한 듯 웃었다.
루시아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내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옛 접수인이 하려던 것도 비슷했겠군.”
“그랬을지도요.”
우리는 해 질 무렵 마왕성으로 돌아왔다. 재정실에는 정산 보고가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번 야간 경비 수당 마지막 한 명의 수취 확인이 완료됐다. 나는 날짜를 확인하고 목록의 마지막 칸에 표시했다.
“전부 끝났습니까?” 피코가 물었다.
“이번 누락 건의 확인은 끝났어. 앞으로 새로운 누락이 없는지는 계속 점검해야겠지.”
녀석은 웃음을 터뜨렸다.
“끝났다고 해도 꼭 뒤에 말이 붙어요.”
“내 직업이 원래 그래.”
나는 한동안 빈 명세서를 바라봤다. 과거의 직접 확인 제도가 제대로 작동했다면, 천계의 귀환 기록과 내 소환 계약은 조금 달랐을까.
그때 전송 구슬이 울렸다. 아우렐이었다.
“안내소의 표지판 설치 기록에서 한 가지 더 확인했습니다. 당시 표지판을 관리한 곳이 제3감리 접수실이 아니에요.”
“어디죠?”
“실종자 생존 확인 창구입니다.”
나는 조용히 숨을 삼켰다.
당사자에게 다시 묻는 일은 단순히 서류에 도장을 받는 문제가 아니었다.
먼저 그 사람이 살아 있고, 다시 말할 수 있는 상태인지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우리가 찾던 시행 규정은 어쩌면 그 문제에서 처음 시작됐는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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