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류를 세 장 받아 놓고 그중 한 장이 진짜인지 묻는 직업을 갖게 될 줄 몰랐다.
더 정확히는 세 장 모두 진짜일 수 있는데 서로 다른 사실을 기록한다는 설명을 하게 될 줄 몰랐다. 한국에서는 세금계산서 발행일과 거래일이 다른 걸 설명하는 정도였는데, 이세계에서는 그 차이가 전쟁 중 누군가의 생존 여부를 바꿔 버린다.
아침 일찍 아레인이 중립 공관의 구형 시간표를 들고 왔다.
“안건 목록은 정오에 등록됐고, 표결 장부에는 오후 네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있어요.”
그가 세 번째 종이를 펼쳤다.
[임시 출입 식권 배부: 오후 한 시 삼십 분.]
나는 눈을 감았다.
“식권이 왜 갑자기 등장하죠?”
“전시 회의가 길어지면 참석자들에게 음식을 제공했거든요. 식권을 나눠 준 기록이 회의 참석 인원 확인에 사용됐습니다.”
“설마 이번 사건도 점심값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누가 그 자리에 있었는지를 알아보자는 겁니다.”
나는 식권 명부를 내려다봤다. 이름 대신 자리 번호만 적혀 있었다. 의장석, 왕국 대표석, 마계 대표석, 천계 대표석, 제3감리 접수석. 여섯 번째 칸은 비어 있었다.
“식권 명부는 본인 출석 증명인가요?”
“아니요. 배부한 쪽의 기록입니다.”
“좋습니다. 적어도 식권을 받아 갔다고 회의 내용에 동의한 건 아니겠군요.”
피코가 내 옆에서 웃었다.
“제 도장이 필요한 상황이네요.”
“이제 그 도장 없이는 세상이 안 돌아갈 것 같아.”
피코의 [받았음. 찬성하지 않았음.] 도장은 처음에 재미로 만든 교육용 도구였는데, 요즘에는 공동 공관에서도 비슷한 문구를 쓰기 시작했다. 녀석은 어깨가 한 뼘쯤 높아진 듯 걸었다. 임프의 출세란 그런 것이었다.
우리는 회의 당시의 임시 통행 제한을 지도 위에 표시했다. 북쪽 현수교는 오전 열한 시에 닫혔다. 남쪽 선착장은 오후 한 시부터 인원을 통제했다. 공관의 동쪽 출입구는 오후 세 시에 부상자를 위해 열렸다.
루시아는 지도를 보고 표정이 달라졌다.
“이 통로라면 들것을 실은 수레가 지나갔겠군.”
“왜 그렇게 생각하죠?”
“좁지만 돌바닥이 평평해. 말이 빠르게 달릴 길은 아니고, 충격을 줄여야 하는 환자가 지나가기 좋지.”
“전투 경험이 도움이 되는군요.”
“전투만 한 것은 아니다. 부상자는 누군가 들고 옮겨야 했으니까.”
그 말에 나는 루시아를 조금 다르게 보았다. 언제나 검부터 뽑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녀의 손에는 다른 사람을 옮긴 기억도 있었다.
당시 회의실에는 다섯 자리가 준비돼 있었으나 식권은 여섯 장 발행돼 있었다. 일단 배부 기록과 사용 기록을 구분했다. 여섯 번째 식권은 실제로 사용되지 않았고, 반납 표시도 없었다. 그것이 곧 여섯 번째 사람이 참석했다는 증거는 아니었다.
“혹시 누군가에게 미리 준비해 둔 걸까요?” 피코가 물었다.
“그럴 수 있지. 또는 수량을 잘못 적었을 수도 있고.”
“너무 재미없는 답이에요.”
“살아 있는 사람의 행적에 대해서는 재미없는 답부터 확인하는 게 안전해.”
중립 공관의 보존실로 이동했을 때, 나는 새로운 문제를 만났다. 문서 선반 위에 오래된 물방울 자국이 있었다. 여름 폭우가 아니라, 수십 년 전 홍수 때 생긴 흔적이라고 했다.
“원본은 젖지 않았나요?”
아레인이 답했다.
“밀봉함 덕분에 대부분 살아남았습니다. 다만 당시 회의록 일부는 긴급 이동 과정에서 쪽 번호가 바뀌었어요.”
“쪽 번호가 바뀌었다고요?”
“네. 내용은 남았지만 순서가 뒤섞였습니다.”
그는 차분히 말했지만,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페이지 순서가 뒤바뀐 회의록은 숫자가 뒤섞인 장부보다 위험하다. 앞서 한 말이 뒤에 한 말이 되고, 반대하던 사람이 나중에 찬성한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
나는 각 장의 종이 결, 훼손 흔적, 가장자리에 남은 잉크 위치를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마티가 비파괴 검사 장비를 가지고 왔다. 그는 손대지 않고 빛만 비추는 작은 수정등을 책상에 세웠다.
“원본에 직접 잉크를 대면 안 됩니다.” 그가 경고했다.
“아무도 안 댑니다.”
“그런데 저 기사님은 왜 검을 들고 있죠?”
루시아가 검집을 뒤로 숨겼다.
“혹시 보존실 문이 닫히면 자를 생각이었다.”
“문을 자르지 마세요!”
나와 마티의 목소리가 정확히 겹쳤다.
그날 오후, 밀봉함 뒤에 있던 한 장을 찾았다. 안건 번호와 서류 이동 표시가 남은 작은 표지였다.
[접수 완료: 정오. 토론 개시: 오후 두 시. 효력 결정: 별도 통지.]
나는 긴 숨을 내쉬었다. 최소한 정오와 오후 네 시가 같은 행위를 가리킨다는 전제는 틀렸다. 그러면 심의 보류가 정확히 언제, 누구에게 통지됐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라델이 왕국 자료의 통지 대장을 열었다.
“오후 네 시의 장부에는 대리 접수인에게 발송할 문서가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발송 성공 표시는 없고, 인계 준비로만 되어 있어요.”
“그럼 통지는 완료되지 않은 건가요?”
“완료되지 않았다고 단정하기도 어렵습니다. 다른 전달 경로가 있을 수 있으니까요.”
“이제 제 말투를 닮아 가시는군요.”
라델이 피곤하게 웃었다.
“당신과 일하면 다 그렇게 됩니다.”
자료를 정리하던 중 아레인이 낡은 필사실 관리인을 소개했다. 뿔이 짧게 자란 노인이었는데,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내 손가락을 바라봤다.
“손가락이 짧군.”
“네?”
“필사 일을 오래 하면 손가락 마디가 이렇게 굳소.”
그가 제 손을 펴 보였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굳은살이 있었다. 나는 한국에서 하루 종일 키보드를 두드리던 내 손을 내려다봤다. 이세계에서의 필사는 팔 전체로 하는 노동이었다.
“몇십 년 전 회의록도 직접 옮기셨습니까?”
“아니오. 그 시대 사람은 내 조부였소. 나는 필사 방법만 이어받았지.”
그는 문서의 빈 여백을 가리켰다.
“한 번 적은 글은 다시 고치기 어렵소. 예전에는 기록을 정리하며 여백에 추가했다가, 새 판을 만들 때 그 여백을 본문으로 착각한 일이 꽤 있었지.”
나는 눈을 들었다.
“인수 확인을 동의 승인으로 바꿨던 것과 비슷하군요.”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작은 글씨를 큰 글씨와 혼동하면 문제가 생긴다는 말이오.”
그는 회의록의 종이 접힌 위치를 보여 줬다. 작은 표지가 원본 장의 앞에 묶였다가 보존함 이동 중 뒤로 넘어갈 수 있는 구조였다. 마티가 옆에서 훼손 상태를 확인하고, 무리하게 펼치지 않고도 검사할 수 있는 각도를 잡아 주었다.
“그러면 페이지 순서가 바뀐 이유를 알 수 있나요?”
내가 묻자 필사실 관리인은 고개를 저었다.
“가능성은 설명할 수 있소. 실제로 누가 언제 옮겼는지는 인계 기록을 봐야지.”
나는 피코를 바라봤다. 녀석은 이미 종이에 적고 있었다.
[가능한 설명은 사실로 쓰지 않기.]
매우 좋은 직원이었다. 급여 인상을 요구하기 전에 일을 잘하는 직원은 특히 귀하다.
관리인은 이어서 당시 식권 모서리에 뚫린 작은 구멍 이야기를 했다. 급식을 회의실 밖으로 옮길 때 음식이 식기 전에 배달하라는 의미가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누가 식권을 실제로 사용했는지는 그 역시 알지 못했다.
“우리에게는 기록만 남았군요.”
“기록이 남았다는 게 어디요. 어떤 사람은 글자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소.”
그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다.
그때 문밖에서 접시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피코가 운반 수레를 도와주겠다며 손을 뻗다가 빵 바구니를 흔든 것이다. 루시아가 반사적으로 수레를 붙잡았다.
“죄송해요!”
“다친 사람은 없나?” 루시아가 물었다.
“없습니다. 빵도 전부 멀쩡해요.”
피코가 빵 하나를 조심스럽게 들어 보였다.
나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먹으려고 가져가면 안 돼.”
“먹으려던 게 아니라 안전 상태 확인이었어요!”
아레인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곁에서 듣고 있던 필사실 관리인도 입가를 올렸다. 수십 년 전의 긴급 배달 식권을 조사하는 사람들이 현재의 빵 바구니로 소동을 벌이다니 묘한 장면이었다.
잠깐의 소란이 끝난 뒤 우리는 구형 기록의 용어를 비교했다. '배부', '수령', '사용', '반납'이 따로 있었다. 그러나 후대 목록에는 모두 '처리'로 합쳐진 예가 보였다.
나는 화이트보드에 네 단어를 순서대로 적었다.
“배부한 식권이 사용된 식권과 같지 않죠.”
“예.” 아레인이 답했다.
“그럼 문서를 전달한 기록도 당사자가 동의한 기록과 같지 않죠.”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차이를 없애면 정산도, 권리 확인도 다 꼬입니다.”
필사실 관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된 기록을 제대로 쓰려면 뜻부터 확인해야 하오. 종이만 남겨서는 충분하지 않지.”
나는 그 말을 노트에 적었다. 그리고 다음 장에 자그마한 표를 추가했다. 어떤 기록은 사람을 보호하려고 남겨졌다. 그런데 의미를 읽지 않고 옮기면, 사람을 보호하려던 기록이 오히려 사람을 억압하는 근거가 된다.
이것이 우리 사건을 둘러싼 가장 불편한 가능성이었다.
관리인이 떠난 뒤 루시아가 진지하게 물었다.
“그럼 내가 부상자를 들것에 올린 것도 환자가 원한 일인지 확인해야 하나?”
“당장 생명을 살리기 위한 구조와 이후의 계약은 다른 문제죠.”
“그 차이를 누군가는 전쟁 중에도 알아봤던 거군.”
“기록상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있었던 것 같아요. 누군지까지는 모르지만요.”
루시아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사람이 정말 있었다면 좋은 동료였겠어.”
나는 창밖을 봤다. 사라진 회의록의 한 장 때문에 우리는 옛 이름 없는 사람들을 조금씩 상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마음이었을지는 기록만으로 단정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했다.
저녁 무렵 제르칸이 갑자기 보존실에 나타났다. 그는 중앙의 빈 의자를 보고 눈을 빛냈다.
“이것이 전설의 제3감리 의자냐?”
“아닙니다. 보존실 방문객용 의자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낡았느냐?”
“낡았다고 전설이 되지는 않습니다.”
“내 왕좌도 천 년쯤 지나면 전설이 되겠지.”
“수선비가 그 전에 전설이 되겠습니다.”
아레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가 크게 웃는 모습을 처음 봤다. 제르칸은 사람들이 웃으면 자신을 존경하는 줄 아는 놀라운 재능이 있었다.
“이왕 왔으니 선언하겠다. 우리 마왕성은 과거의 불의를 바로잡겠다!”
“과거의 불의가 확정된 건 아닙니다.”
“그럼 과거의 잘못을—”
“잘못도 아직 확정 안 됐습니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선언할 수 있느냐!”
나는 잠시 고민했다.
“자료 보존을 지원하겠다고 선언하시면 됩니다.”
제르칸이 허리를 폈다.
“좋다! 우리 마왕성은 자료 보존을 지원한다!”
“지원 액수는 승인된 예산 범위에서요.”
“끝까지 감동을 방해하는구나.”
나는 마음속으로 오늘도 회사를 지켰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불분명한 책임에 관한 연설 때문에 새로운 배상금을 낼 일은 줄었다.
해가 기울자 마티가 조심스럽게 한 쪽의 가장자리를 가리켰다.
“문서가 다시 묶인 뒤 추가된 구멍입니다. 봉인함 이송 때 생긴 것으로 보이는데, 원래 회의 자료에 속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 옆에는 짧은 문장이 있었다.
[당사자 대면 불가 시 임시 인계만 허용. 추후 직접 확인 필수.]
나는 그 문장을 세 번 읽었다. 완전히 새로운 제도가 아니라, 이미 임시 절차와 직접 확인을 분리하려는 생각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게 신설안 본문입니까?”
“별첨일 수 있습니다. 작성 시점 검사가 필요해요.”
아우렐의 대답은 단호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것은 그 문구가 누구의 말인지 아직 모른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찾아야 할 질문의 모양은 더 선명해졌다.
‘직접 확인을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
그것이 당시 회의가 풀어야 했던 문제일지도 몰랐다.
나는 식권 명부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했다. 여섯 번째 식권에는 음식 종류조차 적히지 않았다. 다만 다른 다섯 장과 달리 가장자리에 작은 구멍이 하나 있었다.
“이건 뭘 뜻하죠?”
아레인이 말했다.
“배달용 식권에 쓰던 표시입니다. 회의실 밖으로 가져가는 식사를 구분할 때 뚫었습니다.”
피코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럼 회의실 밖에도 누군가 있었겠네요?”
“식사를 받을 사람이 예정돼 있었다는 기록이지. 그 사람이 실제로 먹었는지는 아직 모르지.”
그러나 그 작은 구멍은 우리를 다른 장소로 안내했다. 회의실 밖의 의무실이었다.
나는 내일 조사 일정을 적었다. 옛 의무실. 임시 접수인. 배달 식권.
그리고 그 아래에 한 줄을 덧붙였다.
[피코 식비: 오늘은 본인 부담.]
“도윤 님!”
“재정실 예산으로 남의 식권까지 해결할 수는 없어.”
피코의 항의가 보존실 복도에 오래 울렸다.
제11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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