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렐이 내민 종이에는 낯익은 네 글자가 있었다.
[심의 보류.]
마왕성에 온 뒤 내가 가장 자주 본 문구다. 신청했으나 보류, 지급 지시했으나 보류, 확인했으나 보류. 심지어 제르칸의 금빛 의자 수리도 보류된 적이 있다. 다리 네 개 중 세 개가 멀쩡하다는 이유였다.
“이번에는 무슨 사유입니까?”
내가 묻자 아우렐은 안건 목록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사유서는 따로 보존됐습니다. 접근 권한을 확인하고 있어요.”
“즉, 보류 사유서를 보려면 열람 심사를 받아야 한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그 열람 심사가 보류되면요?”
“그건…….”
천계 기록사답게 은빛 날개가 반듯하던 아우렐의 자세가 처음으로 무너졌다. 나는 연필을 내려놓았다. 행정 업무의 미덕은 천사까지 한숨 쉬게 만드는 데 있었다.
피코는 두툼한 종이 뭉치를 옮기다 멈췄다.
“도윤 님, 그럼 보류를 보류해 달라고 신청할까요?”
“그건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발상이야. 행정기관이 새로운 서식을 만들 핑계가 되거든.”
“새 서식이 나쁘나요?”
“나쁜 건 아니지. 다만 그 서식에도 서명을 받을 거야.”
몰트가 천이백 년 묵은 책상 너머에서 고개를 들었다.
“실제로 옛날에 보류 이의신청의 임시 접수 확인서가 있었다.”
“그 얘기는 하지 말아 주세요. 잠이 안 올 것 같습니다.”
그날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적었다. 제3감리 대리 접수인이 직접 확인 절차를 제안했다. 회의에서는 심의를 보류했다. 그 뒤 수령 확인이 동의 승인으로 오인되는 오류가 여러 제도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누가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다는 증거는 없었다. 회의록과 시스템 개정일 사이의 간격부터 확인해야 했다.
나는 화이트보드에 날짜 칸 세 개를 그렸다.
첫째, 신설안이 제출된 날.
둘째, 심의를 보류한 날.
셋째, ‘인수’를 ‘승인’으로 옮기는 자동 규칙이 적용된 날.
“셋이 같은 날일까요?” 피코가 물었다.
“모르지. 같다고 가정하면 편하겠지만 편한 가정이 가장 비싼 법이야.”
마왕성에서 편한 가정으로 승인한 물품 중에는 다리가 여섯 개 달린 사무용 의자도 있었다. 반품 비용이 구매 가격보다 높았다. 나는 그런 의자를 잊지 못한다. 지금도 서고 구석에서 몰트의 외투 걸이로 쓰이는 중이다.
아우렐이 전송 구슬을 꺼냈다. 중립 공관 기록관 아레인과 왕국 조사관 라델에게 공동 열람 신청을 연결했다. 사유서에는 옛 접수인의 신원 정보가 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세 기관 모두 원문 전체 공개에 동의하지 않았다.
“일단 공개 가능한 항목만 요구하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보류한 기관, 표결 여부, 보류 효력의 범위, 신원 가림이 가능한 사유.”
라델의 얼굴이 구슬 위에 떠올랐다.
“왕국 쪽에는 일부 구형 회의록 목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표결권자가 누구였는지는 정본을 확인해야 합니다.”
“보류한 사유가 업무상 위험 때문인지, 특정 사람 때문인지 구분할 수 있습니까?”
“목록만으로는 어렵습니다. 단, 당시 중립 항구가 봉쇄된 날과 회의일이 겹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말에 루시아가 문가에서 몸을 일으켰다.
“항구가 봉쇄됐다고?”
“전투가 있었던 겁니까?”
“봉쇄라고 전부 전투는 아니야.” 루시아가 지도를 펼쳤다. “다리를 끊어도 봉쇄가 되고, 바닷길의 통행증을 취소해도 봉쇄가 되지. 그때 피난민이 많았다면 서류를 직접 받기 어려웠을 거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확인을 의무로 만들면 사람을 보호할 수도 있지만, 당장 본인이 올 수 없는 피난민을 제도 밖으로 밀어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과거의 보류에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을 가능성이 생긴다.
“당시 상황을 알아야겠군요.”
“나도 동행하겠다.” 루시아가 말했다.
“검을 쓰는 일은 거의 없을 텐데요.”
“좋다. 오래 쉬었던 팔을 회복할 수 있겠군.”
“제가 말한 뜻과 다르잖아요.”
루시아는 웃으며 검집을 두드렸다. 그녀가 최근 배운 것은 모든 문제를 베어 없앨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문제를 베고 싶어 하는 성향은 여전했다.
그날 점심에는 제르칸이 갑자기 재정실에 들어왔다.
“들었다! 내 성에서 천계를 상대로 과거의 재판을 다시 연다지?”
“재판이 아니라 사유서 열람 신청입니다.”
“그렇다면 역사적인 연설이 필요하겠군.”
“필요 없습니다.”
“적어도 화려한 대회의장은 필요하지 않겠느냐?”
“더더욱 필요 없습니다.”
마왕은 실망한 표정으로 망토를 털었다.
“너는 사람의 열정을 너무 쉽게 삭이는군.”
“폐하, 자료 열람에는 열정보다 보존 환경이 중요합니다. 지금 제일 급한 건 서고에 비가 새지 않는지 확인하는 겁니다.”
“그럼 내가 직접 지붕을 살피겠다!”
나는 반사적으로 붙잡았다.
“폐하께서 지붕에 올라가면 수리 예산에 지붕 전체 교체가 추가됩니다.”
피코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번에 난간을 한번 잡으셨다가 난간이 사라졌잖아요.”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강도가 부족했던 거다!”
“그러니까요. 폐하의 힘보다 강한 자재를 찾아야 하는데 비용이 셉니다.”
제르칸은 한참 고민하더니 망토를 접어 들었다.
“좋다. 내 대신 전문가를 보내라. 다만 지붕 수리를 마치면 내 이름이 적힌 기념판을 달아라.”
“개인 부담이면 검토하겠습니다.”
“거기서도 개인 부담이냐!”
그가 떠난 뒤 나는 시설 담당자에게 지붕 상태 확인을 정식 요청했다. 웃기지만 그 일도 필요했다. 중요한 문서가 들어 있는 보존실의 지붕이 새면, 우리가 몇 달을 확인한 근거가 젖어 버린다.
오후에는 북부 채석장 정산 후속이 들어왔다. 안전 장비비 중 환급 대상액은 이미 승인됐지만, 세 명은 수취 계좌가 오래된 임시 계정으로 남아 있었다. 지급 지시가 끝났다고 수령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나는 현장 감독에게 실제 수취 확인을 요청했다.
“왜 중요한 문서 조사 중에 그런 일을 하십니까?” 아우렐이 물었다.
“돈 못 받은 사람은 심의 보류 같은 단어를 더 싫어할 테니까요.”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첫 신청이 접수된 직후, 의외의 사람이 재정실을 찾아왔다. 시설 담당 드워프 도르벤이었다. 그는 손톱 사이에 돌가루를 묻힌 채 낡은 설계도를 들고 있었다.
“도윤 씨, 지붕 점검 얘기 들었소. 그런데 창고가 아니라 보존실 쪽은 빗물받이 위치부터 바꿔야 하오.”
“그 정도로 심각합니까?”
“현재 위험하다는 말은 아니오. 다만 예전 수리 때 물길을 오른쪽으로 돌려 놨는데, 새 창고 선반을 그 아래에 뒀소. 비가 많이 오면 점검해야 하오.”
나는 설계도를 받아 꼼꼼히 살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비가 오면 아파트 베란다 창틀부터 확인하던 기억이 났다. 한국의 아파트와 이세계의 마왕성은 여러 면에서 달랐지만, 물은 늘 낮은 곳으로 흘렀다. 그것만은 마법으로도 쉽게 바뀌지 않았다.
“보존실 자료 때문에 점검을 앞당기는 겁니다. 긴급 공사로 처리할 필요가 있는지 현장 확인부터 하죠.”
도르벤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언제나 비용을 묻지만, 적어도 먼저 보러 오긴 하는군.”
“안 보고 승인했다가 천장 전체가 무너지면 제가 더 바빠지거든요.”
“틀린 말은 아니오.”
우리는 서고로 걸어갔다. 복도에는 오래된 전쟁 지도가 걸려 있었는데, 비가 오면 그 지도의 위쪽만 유난히 어두워진다고 했다. 나는 지도 안쪽으로 습기가 들지 않도록 보존 담당에게 점검을 요청했다. 도르벤은 돌 틈의 작은 자국을 보여 주며 이번 장마 전에 손볼 수 있는 곳과 다음 정기 보수 때 처리할 곳을 구분했다.
그는 일을 마치고 잠시 머뭇거렸다.
“사실은 다른 이야기도 있소.”
“무슨 일이죠?”
“견습생 하나가 지난달 수당을 받았는데, 자기 몫이 아닌 것 같다고 돌려주려 하오. 내역을 잘 모르겠다고.”
나는 고개를 들었다. 잘못 받은 돈을 먼저 돌려주겠다는 직원이라니, 이 성에서 보기 드문 종류의 사람이다.
“계좌를 바로 환수하지 마세요. 지급 명세와 출근 기록을 같이 확인해야 합니다. 밤에 초과근무했다면 그 돈이 정당한 몫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 녀석은 돈을 너무 겁내오.”
“아뇨. 자기가 일하지 않은 돈을 겁내는 건 좋은 습관입니다. 다만 일한 돈까지 돌려주면 안 되죠.”
도르벤이 웃었다. 우리는 내일 견습생을 데리고 와서 실제 근무 기록을 대조하기로 했다.
재정실로 돌아오니 피코가 커다란 도화지에 새로운 도표를 그리고 있었다. 왼쪽에는 사람 얼굴, 오른쪽에는 서류, 가운데에는 화살표가 잔뜩 있었다.
“이건 뭐야?”
“도윤 님이 하신 말씀을 쉽게 그려 봤어요. 사람은 한 번 서명해도 여러 장의 종이가 생길 수 있고, 서류는 여러 번 옮겨져도 작성자는 한 명일 수 있어요.”
나는 그림을 자세히 봤다. 피코는 왕국, 천계, 중립 공관을 각기 다른 색으로 표시했다. 그러나 작성자 칸에는 물음표만 그려 놓았다.
“좋아. 누가 작성했는지 모를 때는 모른다고 적는 거지.”
“그런데 도윤 님은 어디에 그려요?”
피코가 물었다.
“나는 조사하는 사람 칸에.”
녀석은 맨 아래에 작게 검은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 위에 ‘월급받는 사람’이라고 적었다.
“이건 왜?”
“도윤 님은 항상 월급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시잖아요.”
“그건 맞는데, 이렇게 대놓고 적으니 조금 부끄럽다.”
피코는 웃었다. 나는 그림을 재정실 벽에 붙여 두었다. 종이를 몇 장 읽는 것보다 그 그림을 한 번 보는 편이 더 정확한 설명이 될 수도 있었다.
저녁 전에 라델에게서 왕국의 오래된 출입 규칙 일부가 추가로 전송됐다. 나는 통행 제한이 시작된 시각을 도표에 옮겨 적었다. 북쪽 통로 폐쇄와 남쪽 선착장 제한 사이에 두 시간이 있었다. 누군가 긴급 구조를 하려 했다면 그 두 시간은 결정적으로 중요했을 것이다.
나는 피코의 그림 속 화살표 하나를 지웠다.
“왜 지워요?”
“이 화살표는 누군가 이 길로 갔다고 단정하는 것처럼 보이거든. 길이 열려 있었다는 사실과 누가 지나갔다는 사실은 다르지.”
피코는 다시 화살표 끝에 물음표를 그렸다.
“그럼 아직 갈 수 있었던 길만 있는 거네요.”
“맞아.”
그 말을 들은 루시아가 지도를 오래 바라봤다.
“길이 있었다면 누군가는 살릴 수 있었겠군.”
“그럴 수도 있죠.”
“확실한 건 아니지.”
그녀가 먼저 말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아까지 그렇게 구분하기 시작했다는 게 이상하게 기뻤다. 검으로 길을 열던 사람이 이제 지도 위에 물음표를 남길 줄 알았다.
퇴근 무렵 세 기관에서 각각 답장이 왔다. 왕국은 공개 가능한 날짜 목록을, 중립 공관은 보존 상태 정보를, 천계는 사유서의 열람 제한 사유를 보내왔다. 나는 세 문서를 나란히 놓았다. 가장 이상한 것은 천계의 마지막 줄이었다.
[열람 제한 사유: 본문에 보호 대상자의 당시 이동 경로가 포함됨. 비식별 발췌본 제공 가능 여부 심사 중.]
누군가의 이름만 가리면 되는 서류가 아니었다. 이동 경로가 드러나면 그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옛 접수인이 피난민이었을 수도 있겠군요.” 피코가 말했다.
“그럴 수도 있고, 피난민을 돕던 사람이었을 수도 있지. 아직 모르니까 쓰지 말자.”
나는 칠판 아래에 두 줄을 적었다.
[확인: 신설안 심의는 보류됐다.]
[미확인: 보류 이유와 현재 자동 규칙의 책임 관계.]
피코가 내 옆에서 한참 글자를 봤다.
“도윤 님, 이거 언젠가 다 밝혀질까요?”
“다 밝힐 수는 없을지도 몰라.”
“그럼 왜 계속해요?”
“모두 알아야만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나는 그날 처리한 환급 목록을 가리켰다.
“세 사람 중 두 사람은 계좌 확인이 끝났어. 나머지 한 사람에게도 확인을 요청했고. 그게 오늘 우리가 실제로 한 일이지.”
피코는 천천히 웃었다.
“그럼 오늘도 빵 먹는 날이에요?”
“그건 월급날이 얼마나 남았는지부터 보자.”
녀석의 표정이 바로 시무룩해졌다. 마왕성의 진정한 비극은 서류 심의가 아니라 식비였다.
그때 아레인에게서 추가 연락이 왔다.
[과거 회의록 발췌본 일부 공개 허가. 단, 심의가 보류된 시각이 제3감리 본회의 기록과 다름.]
나는 다시 종이를 들었다.
“시각이 다르다고요?”
아레인이 답했다.
“안건 목록에는 정오, 본회의 장부에는 오후 네 시입니다. 둘 중 하나는 접수 시각일 수 있습니다. 원본 표제가 다르거든요.”
점심에 열린 회의가 오후에 끝났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시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통행증이 중지된 시각과 겹치기 때문이었다.
나는 빈 칸을 하나 더 만들었다.
넷째, 실제 효력이 발생한 시각.
오늘도 새로운 비밀은 확인되지 않았다. 대신 질문이 하나 더 생겼다.
그리고 마왕성에서 질문이 늘어난다는 건, 내 야근 수당 협상을 시작할 때가 됐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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