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계사에게 가장 위험한 숫자는 영이다.
영은 아주 많은 것을 뜻할 수 있다. 돈이 없다는 뜻일 수도 있고, 아직 계산하지 않았다는 뜻일 수도 있고, 누군가 일부러 빈칸을 영으로 바꾸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제3감리의 옛 권리 보전 계정에 영이 하나 떠오른 날, 나는 그 차이를 다시 배웠다.
“도윤 님, 잔액이 영이래요!”
피코가 전송 화면을 보고 외쳤다.
“어느 계정?”
“송-4189 관련 임시 보전 항목이요.”
나는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거기에는 분명 '현행 공개 잔액: 0'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조금 아래에는 다른 문장이 있었다.
[원본 적립금 항목은 별도 비공개 계정에 분리 관리. 공개 조회 대상 아님.]
“이건 돈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야.”
“그럼요?”
“이 화면에서 보여 줄 수 있는 잔액이 영이라는 뜻일 수 있어. 비공개 계정을 확인하지 않고는 결론 못 내려.”
피코가 눈을 깜빡였다.
“왜 사람들을 이렇게 놀라게 써 놨을까요?”
“화면을 만들 때 보고 싶은 사람보다 만든 사람이 편한 쪽으로 생각했나 보지.”
나는 바로 정정 요청을 작성했다. '잔액 0'과 '조회 범위 외'는 다르다. 개인 예치 자료가 보호돼야 한다면 보호하되, 접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영으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
그 사이 마왕성에는 희한한 소문이 돌았다. 제3감리의 숨겨진 금고에 용사의 몸값이 쌓여 있고, 한도윤이 그것을 찾아 마왕성을 떠날 거라는 내용이었다.
“누가 그런 소문을 냈습니까?”
몰트에게 묻자 그는 말없이 제르칸의 새 망토를 가리켰다. 마왕은 그 망토를 입고 연설을 준비하고 있었다.
“폐하.”
“왜, 나의 무서운 회계사여?”
“숨겨진 금고를 발견했다고 발표하셨습니까?”
“발견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
“그게 숨겨진 금고를 발견했다는 뜻으로 전해지고 있어요.”
“그럼 정정하면 되지 않나?”
“지금부터 정정하셔야 합니다.”
제르칸은 망설이다가 연설문을 찢었다. 나는 그가 초안을 찢는 장면을 처음 봤다. 대체로 그는 초안을 세 장 더 쓰고 장식만 바꿨기 때문이다.
“좋다. 이렇게 말하겠다. 우리 마왕성은 아무도 확인하지 않은 금화를 자랑하지 않는다.”
“훌륭합니다.”
“하지만 확인한 금화가 있다면 자랑해도 되겠지?”
“누구 소유인지까지 확인하고요.”
“내가 이 성의 왕이라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단 말이냐?”
“남의 돈은 남의 돈이라는 사실이요.”
마왕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 널 고용한 것은 나의 가장 현명한 결정이자 가장 불편한 결정이다.”
나는 그걸 최고의 인사평가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제3감리 보존기관과 정식 연락을 이어 갔다. 비공개 항목을 열람하기 위해서는 원래 권리자의 동의나 적법한 대리권이 필요했다. 나는 내가 그 권리자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송-4189의 문서와 내 소환 기록에 연결되는 단서가 있다고 해서 그 예치금의 소유자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자료의 성격을 분명히 하는 비식별 확인을 요청했다. 기관은 답했다.
[원본 적립금 항목 존속. 계정 이전 이력 보존. 현행 개별 소유권 판정 미완.]
피코가 어깨를 폈다.
“그럼 사라진 건 아니네요!”
“적어도 존속한다는 기록은 확인됐지. 실제 가용 금액과 수취인을 확인한 건 아니고.”
“오늘도 성공을 조금만 좋아하는군요.”
“그렇지.”
우리는 마왕성 재정실의 지급 후속도 정리했다. 감자 납품업자의 잔금 가운데 추가분이 실제 입금됐다는 확인서가 도착했고, 나머지는 지급소 대조 중이었다. 도르벤의 미지급 보수비는 별도 지급일로 조정됐지만 아직 수취 확인이 없었다. 폭우 피해 주민 세 가구는 구조 점검을 마쳤고, 두 가구는 임시 주택 연장 승인을 받았다. 확인되지 않은 가구의 상태를 완료라고 적지 않았다.
그 일들이 장부 속에서는 몇 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도르벤의 견습생들은 그 돈으로 하루치 식사를 해결했고, 임시 주택에 머무는 아이들은 비를 맞지 않고 잠들 수 있었다.
나는 그런 일을 하려고 마왕성에 들어온 것이었을까.
처음에는 아니었다. 나는 왕국에서 무보수로 용사가 되라는 제안을 받고 화가 났을 뿐이었다. 계산서를 내밀지 않는 국왕의 말을 거절했고, 월급을 준다는 마왕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제는 조금 달랐다. 내 월급이 중요한 건 여전하다. 하지만 남의 월급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누군가의 귀환권과 편지 한 장, 확인되지 않은 예치금도 중요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주인이 누구인지 모른다고 해서 마음대로 써 버릴 수는 없다는 것.
아우렐이 저녁에 도착하기 전, 우리는 재정실에서 작은 회의를 열었다. 의제는 미지급 항목 처리와 개인정보 열람 권한이었다. 전혀 다른 주제처럼 보였지만, 둘 다 남의 것을 함부로 다룰 수 없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몰트는 마왕성 내부의 인사·재정 자료를 제3감리 공동 조사에 제공하는 범위를 좁혀야 한다고 했다.
“누구도 우리 직원의 급여를 통째로 가져갈 수는 없다.”
“동의합니다. 시험용 자료를 만들어 필요한 오류만 재현하죠.”
나는 베르케에게 시험용 계정 목록을 요청했다. 피코가 '작은 양파 2호'와 '퇴직하지 않는 양파'를 나란히 적자 몰트가 두개골을 짚었다.
“왜 모든 시험 계정이 양파인가?”
“기억하기 쉽고 다른 직원과 헷갈리지 않아서요.”
“다음엔 감자를 써라.”
피코의 얼굴이 빛났다.
“그럼 감자도 고용되는 건가요?”
“아니.”
몰트가 단호하게 말했다.
“채용 서류에 실제 생물이 들어와야 한다.”
나는 웃음이 나왔다. 직원 채용을 엄격하게 관리하는 리치 실장도 결국 시험용 이름을 고민하고 있었다.
이어 우리는 최근 민원을 검토했다. 폭우 피해 지역의 주민이 임시 주소로 전입했더니 옛 주택의 임차권이 종료 예정이라고 표시된 사례였다. 우선 중립 공관에 공식 확인 요청을 보냈다. 주택 안전 점검과 임차권 종료는 다른 문제라는 사실을 통지했다.
“주민이 옛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피코가 물었다.
“집의 안전을 확인해야 알 수 있어. 안전하지 않으면 돌아가고 싶다고 해도 위험하니까.”
“그럼 그 사람의 선택은요?”
“선택할 수 있도록 정확한 위험을 알려 주고 가능한 대안을 마련해야지. 선택권을 지킨다는 건 아무 때나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내버려 둔다는 뜻만은 아니야.”
녀석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폭우 피해 지역 담당 기술자와 연결했다. 세 가구의 안전 점검이 완료됐지만, 다른 집들은 아직 점검 대기였다. 기술자는 지붕 균열과 배수로 상태를 설명했고, 임시 주택 연장 신청 방법도 안내했다. 나는 확인이 끝난 가구와 기다리는 가구를 분리해 기록했다.
한 주민이 전송 화면에 나타났다. 그녀는 어려 보이는 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우리 집은 언제 다시 갈 수 있나요?”
나는 아무렇게나 다음 주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 말로 당장 안심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집은 아직 구조 점검 중이었다.
“날짜는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검사 요청은 접수됐고, 담당 기술자의 방문 예정일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오늘 안에 진행 상황을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조금 실망한 듯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게 말해 주셔서 고마워요.”
화면이 꺼진 뒤 피코가 말했다.
“도윤 님은 좋은 소식을 주지 못했는데도 감사하다는 말을 들었어요.”
“좋은 소식이 없을 때는 좋은 소식이 없다고 말하는 것도 일이니까.”
나는 그 말을 하며 조금 쓸쓸했다. 사람은 때때로 기다린다. 어떤 기다림에는 끝이 있지만, 어떤 기다림에는 다음 확인일만 있다. 지금의 나도 마찬가지였다.
회의가 끝나자 몰트는 오늘 처리 내역을 봤다. 지급 완료 한 건, 신청 접수 네 건, 추가 조사 세 건, 원본 보존 요청 두 건.
“오늘은 끝난 일이 적군.”
그가 말했다.
“그래도 어디까지 끝났는지는 압니다.”
“그렇지.”
몰트는 조용히 문서를 접었다.
“천이백 년을 일했지만, 가끔은 그걸 잊는다.”
그 고백은 놀라웠다. 나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을 오래했다고 무조건 모든 걸 아는 사람은 없다. 대신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지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오래 버티는지도 모른다.
그날 피코는 내 책상 위에 아주 작은 종이 한 장을 붙였다.
[정확히 확인한 일은 자랑해도 됨.]
나는 그 문구를 보고 웃었다.
“너도 제르칸 폐하한테 배웠냐?”
“아뇨. 도윤 님이 맨날 성공을 조금만 좋아하니까요.”
“그랬나?”
“네. 가끔은 끝난 일도 기뻐해 주세요.”
나는 종이를 떼지 않았다. 오늘 우리가 바로잡은 것은 목록 한 줄의 의미뿐이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누군가 오래된 편지를 쓴 장소를 잘못 단정할 가능성이 줄었다.
“그럼 오늘은 저녁에 빵 하나 더 먹자.”
“정말요?”
“내 돈으로.”
피코가 두 팔을 벌렸다.
“오늘은 역사적인 날이에요!”
“세계의 역사를 너무 빵으로 기록하지 마.”
“그럼 도윤 님 월급명세서에 적을까요?”
“그것도 안 돼!”
재정실에 모처럼 큰 웃음이 났다.
청문회가 끝난 지 사흘째 되던 저녁, 아우렐이 찾아왔다. 그는 이번에는 전송 화면이 아니라 직접 마왕성에 들어왔다. 제르칸이 천사를 보고 웅장한 자세를 취했지만, 아우렐은 곧바로 재정실로 향했다.
“이렇게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말하자 그가 작은 봉투를 내밀었다.
“제7서고와 중립 공관이 공동으로 대조한 출처 정정 예비 결과입니다. 본문은 봉인되어 있고, 목록과 이동 경로만 담겼습니다.”
나는 봉투의 열람 조건을 확인한 뒤 서명했다. 이번에는 수령 확인란과 열람 동의란이 분리되어 있었다. 피코의 도장 문구가 이런 식으로 현실에 스며든다는 게 조금 우스웠다.
보고서에는 송-4189의 이동 순서가 적혀 있었다. 갈매기 등대 구호항 접수. 바다새 9호 운송. 북쪽 언어검수소 재봉인. 임시 봉인함 6호 보관. 중립 공관 인계. 그리고 훗날 천계 제7서고로의 등본 이관.
이제야 경로가 한 장으로 이어졌다.
“작성 장소는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군요.”
이상하게 실망스럽지 않았다. 사실이 아닌 답을 얻는 것보다, 사실에 가까운 질문을 얻는 쪽이 나았다.
아우렐은 보고서의 마지막 줄을 가리켰다.
[구형 분류 정정 권고: ‘천계 발행 원본’에서 ‘원작성지 미확정 보존물, 천계 등본 발행’으로 분리. 최종 승인 대기.]
“공식 정정은 아직 아니군요.”
“예. 하지만 각 기관의 실무 검증은 일치했습니다.”
우리는 한 가지 일을 거의 끝낸 셈이었다. 적어도 문서를 마음대로 자기 소유라고 부를 이유가 줄었다.
그때 아우렐이 봉투에서 종이 하나를 더 꺼냈다.
“이건 다른 자료입니다. 원본이 아니라 과거 회의 안건 목록입니다.”
그는 종이를 펴 보였다.
[제3감리 임시 회의 / 귀환 보존물의 당사자 직접 확인 절차 신설 요청 / 처리 결과: 심의 보류]
“누군가 직접 확인 절차를 만들자고 요청했군요.”
“그렇습니다.”
“왜 보류됐습니까?”
“사유서는 별도 보존되어 있습니다. 현재 열람 신청 중입니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우리는 지금까지 누군가 동의를 생략한 뒤에 생긴 사고를 조사했다. 그런데 오래전, 바로 그 문제를 막으려 했던 회의가 있었다.
“요청한 사람 이름은 있습니까?”
아우렐은 고개를 저었다.
“공개 가능한 목록에는 직위만 남아 있습니다.”
“어떤 직위죠?”
“제3감리 대리 접수인.”
피코가 눈을 크게 떴다.
“대리번호 0003이요?”
“연결 가능성을 조사 중이지만 동일한 권한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보고서를 바라봤다.
이번엔 누군가 동의가 사라지는 걸 알고도 그냥 두었던 게 아니라, 동의를 지키려고 먼저 제도를 바꾸려 했다는 단서가 있었다.
그리고 그 요청은 보류됐다.
나는 새 노트를 펼쳤다. 맨 첫 줄에 질문을 적었다.
'제3감리에서 당사자 확인을 요구한 사람은 누구이며, 누가 어떤 이유로 심의를 보류했는가?'
아레인에게 자료 보존 요청을 보낼 준비를 하던 때, 제르칸이 재정실 문을 열었다.
“한도윤! 내 망토 영수증은 완벽하게 처리됐느냐?”
“네, 폐하. 확인 완료입니다.”
마왕은 흡족하게 웃었다.
“좋다. 그럼 새 망토를 하나 더 사도 되겠군!”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폐하, 올해 개인 의복비 예산부터 확인하시죠.”
“또?”
“네. 또요.”
피코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우렐도 입가를 가렸다.
이 세계는 여전히 엉망이었다.
그렇지만 아주 작은 것 하나는 바뀌었다. 적어도 누군가의 선택이 기록 속에서 사라질 때, 그걸 이상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나는 그게 꽤 마음에 들었다.
다음 달에도 월급이 나온다면 더욱 마음에 들 것이다.
제11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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