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성에서 가장 잘 보이는 것은 탑이었다. 가장 안 보이는 것은 지급 기한이었다.
나는 아침부터 미지급 항목을 분류했다. 도르벤의 성벽 보수비, 식당 감자 납품업자의 잔금, 폭우로 임시 주택에 머무는 주민들의 수리 지원금. 항목마다 상태가 달랐다. 어떤 것은 실제 지급이 끝났고, 어떤 것은 지급일이 잡혔으며, 어떤 것은 승인 범위부터 다투고 있었다.
“오늘 하루만큼은 새로운 비밀이 나타나지 않기를.”
내가 중얼거리자 피코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럼 제가 문을 잠글까요?”
“비밀은 문을 잠근다고 못 들어오는 게 아니야.”
“마왕님은 문을 잠그면 못 들어오시던데요.”
“그분은 문고리를 너무 세게 돌려서 망가뜨리는 경우가 많지.”
바로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한도윤!”
제르칸이었다. 오늘도 예언은 정확했다.
“폐하. 제가 새로운 비밀을 원치 않는다고 말씀드린 지 정확히 삼 초 지났습니다.”
“그럼 좋은 소식을 가져오마. 내 망토 구매 영수증을 찾았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제르칸은 승리한 장군처럼 두 손으로 작은 종이를 내밀었다.
영수증에는 개인 계정으로 지급된 금액이 적혀 있었다. 상점 인장이 있었고, 수취 확인도 정상적으로 남아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폐하. 개인 구매가 확인됐습니다.”
“그러니 날 의심한 자들을 처벌하라!”
“아무도 처벌할 수 없습니다. 확인 전엔 미확정이라고만 적었으니까요.”
“그래도 날 믿지 않았지 않나?”
“폐하를 믿지 않은 게 아니라 영수증을 기다렸습니다.”
제르칸은 한참 나를 바라보다가 웃었다.
“역시 네가 제일 무섭군. 믿음조차 서류로 확인하다니.”
“믿음이 있으니까 제대로 기록해야죠.”
마왕은 기분 좋게 떠났다. 나는 제르칸 개인 물품 목록에 망토 구매 확인을 완료로 표시했다. 실제 확인이 끝났을 때 '완료'라는 말을 쓰는 기분은 언제나 좋았다.
점심 무렵 제3감리 공동 청문회의 정식 일정이 도착했다. 회의 주제는 송-4189의 출처 분류, 구형 귀환·반환 규정의 현재 효력, 임시 봉인함 기록의 공개 범위였다. 우리 마왕성은 이해관계 기관 중 하나로 의견을 낼 수 있지만, 원문 전체를 요구할 권한은 없었다.
라델은 천계와 왕국이 서로 상대의 잘못이라고 말할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다. 아우렐은 천계 내부에서 '발행 안내문' 분류가 옛날부터 관행이었다고 설명했다. 아레인은 중립 공관이 당시 내용물을 열지 않았으므로 작성자 판단을 맡을 수 없다고 했다.
“다 맞는 말을 하는데 아무도 책임을 안 지는 것 같군요.”
내가 말하자 몰트는 잠시 생각했다.
“책임을 나누는 것과 책임을 피하는 것은 다르다. 각자가 실제로 한 일을 명확히 적어라.”
나는 그 말을 회의용 첫 장에 썼다. 마왕성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상사는 가끔 정확한 말을 하는 상사였다. 문제는 그 상사가 보통 부하에게 일을 두 배로 준다는 것이다.
청문회가 시작되기 전, 나는 복도에서 라델과 마주쳤다. 그는 종이컵에 든 쓴 차를 마시고 있었다. 피로가 얼굴에 묻어 있었다.
“밤을 새우셨습니까?”
“법제 검토 때문에요. 출처 분류 하나 정정하는 일이 이렇게 복잡할 줄 몰랐습니다.”
“왕국은 늘 간단한 걸 어렵게 만드는 걸 좋아하잖아요.”
내가 웃자 라델이 쓴웃음을 지었다.
“마왕성도 비슷할 것 같은데요.”
“저희는 원래부터 어려운 일을 잘못된 서식으로 처리합니다.”
그는 웃다가 차를 조금 흘렸다.
우리는 벽에 걸린 휴전항 지도를 바라봤다. 왕국과 마계가 서로 다른 색으로 표시돼 있었다. 지도의 한가운데, 중립 공관만 회색이었다.
“처음 조사받으러 왔을 때만 해도 제가 마왕성 직원과 함께 원본을 확인하게 될 줄 몰랐습니다.”
라델이 말했다.
“저도 왕국 조사관과 영수증을 비교할 줄 몰랐어요.”
“그런데 이제 당신의 지명수배 관련 심사도 거의 마무리 단계입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취소된 겁니까?”
“아직 아닙니다. 집행정지 상태는 유지 중이고, 법무 심사 의견서가 제출됐습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 말을 기다렸습니다. 확인된 만큼만 말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가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다른 사람들은 왜 취소가 아니냐고 화를 내는데, 당신은 오히려 고맙다고 하는군요.”
“행정 결과는 듣기 좋은 말보다 정확한 말이 도움이 됩니다.”
“회계사의 마음은 알기 어렵네요.”
“저도 왕국의 마음은 잘 모릅니다.”
복도 끝에서 피코가 달려왔다. 녀석은 종이 뭉치를 양팔에 안고 있었다.
“도윤 님! 회의실에서 발표하실 순서가 뒤로 밀렸어요!”
“왜?”
“천계 쪽 대표가 발표 자료를 너무 길게 만들었대요!”
나는 라델을 바라봤다. 그는 조용히 내게 속삭였다.
“천계에도 회계사가 필요하겠군요.”
“절실히요.”
우리는 서로 웃었다.
회의실 문 앞에는 다른 문제가 있었다. 방청객들이 입회 확인서에 서명하는 순간, 모두 '공동 권고안 지지'란까지 체크해야 한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안내 직원은 구형 양식을 고치지 못했다고 사과했다.
“이건 서명하면 지지한 것으로 처리됩니까?”
내가 묻자 직원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원래는 참석 여부만 표시하는 건데, 옛 서식에 찬성란이 붙어 있습니다.”
“그럼 그 부분을 가려 놓거나 별도 종이로 참석을 받아야 합니다.”
직원은 즉시 새 출석지를 만들었다. 방청객 가운데 한 사람이 크게 안도했다.
“나는 아직 결론을 듣지도 못했는데 지지한다고 서명할 뻔했네.”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적절한 말이었다. 의견을 듣기 전에 찬성했다는 문서를 만드는 것, 바로 우리가 지금 조사하는 옛 사고와 닮아 있었다.
청문회가 시작되자 여러 기관의 말투가 달랐다. 왕국은 '법적 효력'을 강조했고, 천계는 '서고 운영 규정'을 강조했으며, 중립 공관은 '접수 당시의 사실'을 강조했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자꾸만 같은 질문을 했다.
“그 내용이 원본에 있습니까, 후대 설명에 있습니까?”
답을 들은 뒤 다시 물었다.
“누가 실제 확인했습니까, 전송 기록만 있습니까?”
처음에는 모두 불편해했다. 하지만 세 번째쯤 같은 질문을 던지자 회의록이 조금씩 깔끔해지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단어를 다르게 쓰고 있었다는 사실이 보였기 때문이다.
휴식 시간에 아우렐이 다가왔다.
“한도윤 씨, 당신은 이 사건의 진실을 언제 알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모르겠습니다.”
“불안하지 않습니까?”
“불안하죠. 하지만 지금까지 확인한 사실만으로도 이미 몇 사람의 잘못된 계약 상태를 바로잡았습니다.”
나는 회의실 밖에 선 피코를 가리켰다. 녀석은 안내 직원에게 수령 확인과 동의 구분을 설명하고 있었다.
“저 애가 처음에 여기 왔을 때는 서명 칸조차 이해하지 못했어요. 지금은 남이 무엇에 동의하는지 확인할 줄 알죠.”
아우렐이 미소 지었다.
“작은 성과 같지만 오래갈 것 같군요.”
“그렇게 됐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다시 회의실로 들어갔다. 세계를 움직이는 기록이라 해도, 결국 그 기록을 사용하는 건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했다.
휴식 시간이 끝나고 청문회는 휴전항 공동 회의실에서 속개됐다. 입구에는 새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참석 확인은 의견 동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피코가 자랑스러운 얼굴로 읽었다.
“도윤 님, 제 도장이 세계를 바꾸고 있어요.”
“너무 큰 표현 아니야?”
“작은 글씨라도 바꾸면 세계도 바뀌는 거잖아요.”
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 말은 맞았다. 사람들은 거대한 혁명을 상상하지만, 누군가 서류 한 장의 빈칸을 지켜 줌으로써 달라지는 삶도 있었다.
회의 첫머리에서 아우렐은 제7서고가 문서를 자체 발행한 것으로 분류했던 부분을 설명했다. 후대 전산 전환 과정에서 '안내용 등본 발행'이 '원본 발행'으로 축약된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이었다. 다만 전환 승인자의 신원과 책임은 추가 조사 중이었다.
라델은 왕국의 임시 구호항에서 봉인 물품을 접수했다는 기록을 제출했다. 그 기록에는 원본 내용을 열어 보지 않았으며, 소유권도 판정하지 않았다고 적혀 있었다.
아레인은 북쪽 언어검수소의 자료를 보였다. 임시 봉인함 6호에 물건이 들어왔고, 외피가 손상돼 재봉인된 흔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작성 장소가 휴전항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었다.
세 사람의 진술은 서로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 기관이 각기 다른 단계에서 같은 물류 과정을 다뤘을 가능성을 보여 줬다.
“그렇다면 정정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까?”
회의 주재자가 물었다.
나는 손을 들었다.
“있습니다. 원본의 작성지를 아직 확정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명확히 적을 수 있습니다. 천계의 등본 발행과 중립 공관의 인계, 왕국의 구호항 접수는 각각 기록으로 남기고요.”
“기존 목록을 삭제하자는 겁니까?”
“아닙니다. 수정 이력을 남긴 채 현재 분류에 '작성지 미확정'을 표시하자는 뜻입니다.”
주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문 작성자의 권리가 침해되지 않는 범위에서 검토하겠습니다.”
회의 중간에는 구형 귀환·반환 해설의 한국어 주석이 논의됐다. 나는 문장 내용을 읽어 주었지만, 작성자 추정은 하지 않았다. 대신 비파괴 검사에서 본문보다 나중에 적혔을 가능성이 제기됐다는 점을 설명했다.
천계 쪽 의원 한 명이 물었다.
“당신이 그 언어를 읽을 수 있다고 해서, 그 언어를 쓴 사람의 권리를 대신 주장할 수 있습니까?”
“아니요.”
나는 즉시 대답했다.
“저는 번역을 도울 수 있지만 작성자의 신원을 대신 정할 권한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이해관계는 무엇입니까?”
“제가 소환된 외부인이고, 제 귀환 기록이 같은 제도 안에서 처리됐기 때문입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해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제 자료를 조사하는 절차와 다른 사람의 보존 자료를 여는 절차를 분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레인이 그 문장을 회의록에 적었다. 라델도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루시아가 손을 들었다.
“나는 질문이 있다.”
주재자가 조금 긴장했다.
“말씀하십시오.”
“누군가 이 문서를 무단으로 열려고 한다면, 누가 막는가?”
“보존기관이 막습니다.”
“그 기관의 직원이 무단으로 열려고 하면?”
주재자는 대답을 망설였다.
나는 루시아를 봤다. 그녀가 제대로 된 질문을 던졌다.
“입회 기록과 별도 감독 절차가 있어야 합니다.”
아우렐이 말했다.
“그리고 열람 목적과 권한을 남겨야겠군요.”
루시아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앉았다.
“좋다. 나는 오늘 아무도 베지 않았다.”
누군가 작게 웃었다.
회의 후반부에는 부정한 자동 상태 승계를 중단하는 공동 권고안의 시행 범위를 논의했다. 왕국은 일부 직무에 바로 적용했고, 천계는 귀환 의사 관련 항목을 확인 대기로 묶었으며, 중립 공관은 새 교육 지침을 배포했다. 아직 기관 전체 적용은 아니었다. 나는 완료한 조치와 진행 중인 조치를 별도로 적었다.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길, 루시아가 아레인에게 물었다.
“앞으로 이 문서를 지키는 사람에게 어떤 무기를 주지?”
아레인은 잠시 고민했다.
“무기보다 먼저 인력을 확보해야겠습니다.”
“인력?”
“야간 경비병의 수당이 일부 아직 확인되지 않았거든요.”
나는 즉시 수첩을 꺼냈다. 이미 지급된 사람과 지급 지시만 받은 사람을 구분해 달라고 했다. 아레인은 내게 다음 주까지 정리된 자료를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루시아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좋다. 그들의 임금이 제때 들어와야 문서도 안전하겠군.”
나는 그 말을 그대로 적었다. 전쟁을 끝내는 조약보다 중요한 일이 때때로 야간 근무자의 월급일 수도 있다.
회의가 끝나기 직전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제7서고에서 제출한 도면과 검수소에서 보낸 도면의 동일 위치에 서로 다른 표시가 있는 것이었다.
한쪽에는 [원본 보존], 다른 쪽에는 [원본 대조 후 반환 대기]라고 적혀 있었다.
“어느 쪽이 나중 기록입니까?”
내가 묻자 아우렐은 고개를 저었다.
“현재로선 모릅니다. 사본 작성 시점부터 비교해야 합니다.”
나는 이상하게도 웃음이 나왔다. 이제는 누군가 도면 위에 '반환'이라는 말을 적어 놓았다는 사실이 새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희망일 수도 있었다.
누군가는 오래전부터 그 문서를 영원히 가둘 생각이 아니라, 권리자에게 돌려줄 날을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직은 추측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회의록에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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