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작품, 이어지는 이야기 · 페이루아에서 다음 페이지를 만나보세요
작품으로마왕성에 취업했더니 내가 제일 무섭단다 · 108화
PAYLUA ORIGINAL · 제108화

108화. 제3감리의 잠든 금고

마왕성에 취업했더니 내가 제일 무섭단다 · 6,012자

오프라인 책장
제3감리의 옛 보증 계정을 열람하는 날, 우리에게 제일 먼저 주어진 것은 열쇠가 아니라 장갑이었다. “이건 왜 끼는 겁니까?” 피코가 장갑을 양손에 끼고 손가락을 쫙 폈다. 고블린에게는 손가락이 조금 길어 보여서 끝부분이 덜렁거렸다. “오래된 보존 마법의 잔류물과 직접 접촉하지 않도록.” 아레인이 설명했다. “그리고 종이의 표면을 손상시키지 않도록요.” “그럼 저는 작은 장갑을 주세요.” “준비했습니다.” 아레인은 아주 작은 장갑 한 켤레를 꺼냈다. 피코의 눈이 반짝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잠시 웃었다. 천계와 왕국이 서로를 의심하는 회의에서도, 누군가는 고블린 손 크기에 맞춰 장갑을 준비하고 있었다. 보존실에는 제3감리 관련 계정 목록이 길게 놓여 있었다. 우리는 개인별 귀환 자료에는 접근하지 않기로 했다. 우선 계정의 용도, 잔액 구분, 지급 권한의 변경 이력만 확인하면 됐다. 첫 페이지에는 세 종류의 돈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휴전항 구조 비용, 외부인 권리 보전 적립금, 임시 번역과 문서 보존을 위한 수수료. 이름은 그럴듯했다. 하지만 실제 돈의 흐름을 본다면 더 복잡했다. “이걸 전부 합치면 얼마입니까?” 제르칸이 전송 구슬 너머에서 물었다. “합산하면 안 됩니다.” 나는 재빨리 대답했다. “왜?” “하나는 적립금이고, 하나는 이미 지급된 비용이고, 하나는 청구만 된 수수료예요. 같은 금액이라고 생각하면 잘못됩니다.” 마왕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네가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하다. 금화가 많다고 말해 주면 된다.” “그 금화가 폐하 것이 아니면 행복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렇겠군.” 나는 제르칸이 요즘 너무 쉽게 납득해서 오히려 걱정됐다. 옛날 같았으면 금화가 세상에 많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연설을 두 시간 했을 것이다. 몰트와 우리는 먼저 계정 총액의 구조를 살폈다. 오래된 장부에서는 돈이 세 번씩 반복돼 있었다. 처음 예치됐다는 기록, 다른 기관으로 옮기라고 지시한 기록, 실제로 옮겨졌다는 확인 기록이었다. 같은 금액이 세 번 나타난다고 금화가 세 배로 늘어나는 건 아니다. “마법으로 복제할 수는 없습니까?” 피코가 말했다. “가능하면 회계사들이 다 은퇴했겠지.” “그럼 저도 편해질 텐데.” “네 직장도 사라질 수 있어.” 피코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복제 마법 반대예요.” 그렇게 마왕성 회계 직원의 통화정책이 결정됐다. 제3감리의 적립금 중 일부에는 '원소유자 확인 전 지급 금지'라는 경고가 붙어 있었다. 경고 자체는 올바른 조치였다. 그러나 그 옆의 후대 처리 규칙에서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났다. [지급 금지 기간 경과 시 공동 운용비 전환 가능.] “왜 기간이 지나면 운용비로 넘어가죠?” 내가 묻자 회계소 담당자가 난처한 얼굴로 대답했다. “장기 미수령금을 영구 보관할 수 없다는 후대 규정 때문입니다.” “그 규정을 누가 승인했습니까?” “원본 결재 설명서를 찾는 중입니다.” “제3감리 직접 서명은요?” “현재 열람 범위에서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나는 노트를 펼쳤다. 이것이 지금까지 발견한 문제의 핵심일 수 있었다. 누군가 돌아오지 못한 동안 지켜 주기로 한 몫이, 시간이 지났다는 이유로 다른 곳에 쓰이게 된 것이다. 다만 '전환 가능'이 실제 전환을 뜻하는 건 아니다. 특정 계정에서 돈이 빠져나갔는지도 확인해야 했다. 우리는 예시로 개인 이름이 없는 오래된 항목 세 건을 골라 상태를 비교했다. 첫 번째는 여전히 예치 중이었다. 두 번째는 운용비로 전환하라는 명령만 있었고 실제 지급은 되지 않았다. 세 번째는 기관 간 이동이 완료됐지만 수취 계정이 공동 보존 사업이었다. 그것을 누군가 개인적으로 훔쳤다고 말할 근거는 없었다. “전부 다른 상태군요.” 피코가 말했다. “맞아. 그래서 전체가 다 도둑맞았다고 써선 안 돼.” 회계소 담당자는 안도한 얼굴이었다. 조사받는 사람도, 피해를 걱정하는 사람도 모두 사실을 정확하게 다뤄야 한다. 그것이 느리더라도 옳은 길이었다. 점심을 먹기 전 아레인은 우리를 보존실 옆의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거기에는 구형 보존 업무에 종사했던 사람들을 위한 추모판이 있었다. 대리 접수인, 보관인, 경비원, 운송인. 이름이 온전히 남아 있는 사람도 있었고, 업무번호만 남은 사람도 있었다. 피코가 맨 아래 이름 하나를 가리켰다. “여기 '미상'이라고 적혀 있어요.” “누군지 몰랐던 사람일 수도 있고, 이름을 공개하지 않기로 한 사람일 수도 있지.” 아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중립 공관에서는 어느 편에 속했는지 알려지면 위험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업무번호로 남기는 관행이 있었죠.” 나는 번호들을 훑었다. 여기에는 0003이 적혀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당 번호가 이 건물에 없었다는 증거도 아니었다. 이름 대신 번호를 남기는 관행과, 여러 권한을 하나로 묶는 통합 번호 체계가 언제 생겼는지도 다른 문제였다. “기록에 남지 않았다고 존재하지 않았던 건 아니군요.” 내가 말했다. 아레인은 마른 미소를 지었다. “반대로, 번호 하나가 남아 있다고 그 사람이 존재했다고 단정할 수도 없지요.” 그 말은 지금의 조사에 꼭 필요한 경고였다. 잠시 뒤 우리는 보존 기술자 마티를 만났다. 그녀는 마법 장치가 오래됐다는 말을 듣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열람 제한 마법을 강제로 풀려고 했습니까?” “아직 아무도 안 했습니다.” “그럼 다행이네요.” 마티는 조그만 도구상자를 열었다. 바늘 같은 막대와 얇은 유리판, 작은 조명석이 들어 있었다. 루시아는 기대에 찬 얼굴로 바라봤다. “저것도 무기인가?” “아니요. 기록을 손상시키지 않고 관찰하는 도구입니다.” “아쉽군.” “기사단장님, 다치지 않게 만드는 도구도 훌륭합니다.” 마티의 대답에 루시아가 쑥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술자는 봉인판을 건드리지 않은 채 외부 작동 기록을 읽었다. 열람 제한 마법은 마지막 유지보수 이후 같은 절차를 반복 수행하고 있었다. 실제로 누가 문서를 훔쳐가려고 해서 작동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닫히는 기능이었다. “기계가 일을 잘했군요.” 피코가 말했다. “기능 자체는 그랬죠. 문제는 경고 문구가 너무 공격적이라는 거예요.” 마티는 화면에 떠오르는 '무단 침입 감지'라는 문장을 지웠다. 대신 '정해진 열람 시간 종료'라고 표시했다. “이제 사람을 범죄자 취급하지 않네요.” 내가 말하자 마티가 어깨를 으쓱했다. “장치는 감정이 없지만, 장치가 하는 말 때문에 사람은 상처받을 수 있으니까요.” 나는 그 문장을 수첩에 적었다. 우리 세계에서도 컴퓨터 화면의 한 문장이 사람을 울게 만들곤 했다. 월급 지급일에 '입금 실패'가 뜨는 것만큼 강렬한 공포도 드물다. 작업이 끝난 뒤 마티는 정식 유지보수 계약을 체결하기 전까지 봉인함 개봉을 제한하라고 권고했다. 아레인은 동의했다. 나는 예산 문제를 물었다. “필수 안전 점검 비용은 누구에게 청구됩니까?” “보존기관의 운영비로 신청할 수 있습니다. 다만 지난달 예산이 남아 있지 않아요.” “그럼 긴급 안전 예비비가 있는지 확인해 보시죠.” 아레인은 수첩을 뒤졌다. 비상 예비비는 있었지만 장치 유지보수에 사용할 수 있는지는 심의가 필요했다. 나는 '검토 대기'로 적고, 비용 승인이 나기 전까지 무리한 개봉을 하지 않기로 했다. 마티는 우리가 떠나려는 때 작은 부탁을 했다. “이 기록을 조사하는 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말씀하세요.” “옛날에 잘 만든 장치도 오늘의 사람한테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옛날 기술자를 죄인이라고 단정하지는 말아 주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능이 만들어진 당시 목적과 지금 어떤 피해가 발생하는지를 구분하겠습니다.” “그거면 됩니다.” 우리는 보존실을 나왔다. 피코가 내게 말했다. “도윤 님, 기술자도 감사할 때는 사람을 보고 해야 하는군요.” “맞아. 장치를 고치는 일과 사람을 탓하는 일은 다르니까.” “그럼 도장도 잘못 찍었다고 혼내지 말아야겠네요.” “도장에 감정은 없지 않니?” 피코는 자기 도장을 꺼내 쥐고 잠시 생각했다. “그래도 제가 좋아하는 도장이니까요.”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마음이 생긴 것은 도장이 아니라 피코였다. 오후에는 작은 소동이 생겼다. 제3감리 장부의 한 페이지에서 글자가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작은 검은 점들이 모여 '열람 기한 만료'라는 문장을 만들었다. 피코가 비명을 질렀다. “종이가 물어요!” “아직 안 물었어!” 루시아가 검을 빼려 했다. 나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기사단장님, 원본입니다!” “그럼 검집으로 때릴까?”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아레인이 재빨리 마법 봉인판을 덮었다. 움직이는 글자는 멈췄다. 그는 얼굴에 땀을 닦았다. “구형 열람 제한 마법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문서를 닫으려고 하지요.”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서류가 살아 움직이기까지 하는 세상이라니. 전산 오류를 고치려다 종이한테 물릴 뻔했다. “이 마법은 누가 만든 겁니까?” “제3감리 보관실 표준 장치입니다.” “아직 유지보수 중입니까?” 아레인이 고개를 저었다. “기술자를 찾기 어렵습니다. 대부분 오래전에 사라진 체계라서.” “그럼 다음 열람 전에 전문가를 부르는 게 좋겠군요.” “맞습니다.” 루시아는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나는 오늘 아무것도 베지 않았다.” “그게 오늘의 가장 큰 성과입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봤다. 보존실을 떠나기 전 아레인은 기술자에게 감사 확인서를 내밀었다. 마티는 서명하기 전에 지급 조건을 묻더니 멈칫했다. “이건 수리 완료가 아니라 긴급 점검 완료라고 적어야 해요. 부품을 교체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레인이 바로 문구를 고쳤다. 나는 그 장면을 보고 미소 지었다. 작업자는 자기가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적지 않았고, 기록관은 그 말을 귀찮아하지 않았다. 피코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오늘도 완료라는 말이 두 개네요.” “맞아. 안전 점검은 완료됐고, 수리는 아직이지.” “그럼 다행이에요.” “뭐가?”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해도 아무도 화내지 않잖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직장이 오래가는 직장이다. 다음 번 방문 날짜도 정했다. 누군가 돌아와서 확인할 수 있게 해 두는 것. 그것 역시 보존 업무의 일부였다. 보존실을 나와 복도 끝에서 잠시 쉬는데, 아우렐이 나를 따로 불렀다. “한도윤 씨. 해설서에서 발견된 한국어 주석과 관련해 예비 비교 결과가 도착했습니다.” “같은 사람이 쓴 겁니까?” “그렇게 말할 단계는 아닙니다. 하지만 주석이 적힌 판본이 사용된 장소는 조금 좁혀졌습니다.” 아우렐은 길게 이어진 인계표를 보여 줬다. 원본 해설서의 한 판본은 과거 휴전항 북쪽 언어검수소에 보내졌고, 송-4189가 지나간 임시 봉인함 6호와 같은 서가에 보관된 적이 있었다. “같은 장소에 있었다는 거군요.” “예. 같은 사람이 썼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신중한 기록사와 일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이 세계에는 사람을 칼로 베는 이보다 숫자로 베는 사람이 더 많았으니까. 저녁에 마왕성으로 돌아와 장부를 정리했다. 제3감리의 적립금을 당장 모두 돌려달라는 주장을 하기는 어렵다. 누구 몫인지 확인되지 않은 돈을 잘못 돌려주면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긴다. 대신 개별 권리자가 나타났을 때 확인할 수 있도록, 원본과 처리 이력을 보존하는 것이 우선이다. 나는 보고서 제목을 적었다. [귀환·반환 관련 구형 적립금의 권리 보전 실태 확인.] 몰트가 그걸 보더니 말했다. “제목이 너무 길다.” “실장님이 붙이면요?” “미확정금 보전.” “정확하네요.” “짧지?” 나는 웃었다. 천이백 년 일한 실장의 경력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때 제7서고에서 새 메시지가 왔다. [제3감리 구형 권리 해설서의 한국어 주석에 사용된 먹물 성분 대조 요청. 관련 시료의 원본 채취는 불허. 외부 보존 기관과의 비파괴 비교만 가능.] 나는 펜을 들었다. 적어도 이번에는 무언가를 함부로 뜯어 보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늘고 있었다. 작은 변화지만, 마음에 들었다.

PAYLUA 소설 본문은 인쇄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제108화 끝

읽은 위치는 이 브라우저에 저장되며 로그인 중에는 계정에도 동기화됩니다.
READER DISCUSSION

제108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해 주세요.로그인회원가입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