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사람의 몫은 남겨 둘 것.'
문장을 처음 본 순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넘어졌다. 피코가 놀라서 종이 뭉치를 떨어뜨렸다. 그 종이들 가운데 절반은 내가 이번 달 내내 정리한 출장비 영수증이었다.
“도윤 님, 무슨 일이에요?”
“한국어야.”
“지난번에도 한국어가 있었잖아요.”
“그렇긴 한데.”
내가 말을 잇지 못하자 피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원래 가장 무서운 건 숫자가 틀릴 때였는데, 요즘은 모국어가 갑자기 나타나는 순간이 더 두려웠다.
나는 전송 화면을 다시 살폈다. 아우렐이 보여 준 문장은 원문 해설서의 가장자리에 적혀 있었다. 공식 본문과 글씨체가 달랐다. 붉은 잉크가 아니라 희미한 갈색이었다.
“이 문장이 처음부터 있었습니까?”
아우렐이 고개를 저었다.
“원문과 같은 시기에 적혔는지 확인 중입니다. 별도 필사자의 주석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한국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쓴 건가요?”
“그것도 미정입니다. 문자를 보고 베낀 사람일 수 있지요.”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내 이름이 적힌 편지가 있다고 해서 작성자가 반드시 한국인인 것은 아니었다. 한국어 글씨가 있다고 해서 쓴 사람이 한국어를 이해했다고 단정할 수도 없었다.
“원본에 직접 쓰인 흔적인지부터 확인해 주세요.”
“이미 요청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피코가 바닥에 떨어진 영수증을 주워 들었다. 녀석은 종이를 날짜순으로 정리하다가 내 발치에서 작은 빵 부스러기를 발견했다.
“도윤 님, 출장비 자료에 빵가루가 묻었어요.”
“그건 네 탓이잖아.”
“제가 먹은 건 지난주인데요?”
“지난주 영수증이니까.”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다가 웃었다. 고향에 대한 생각으로 숨이 막힐 때에도 피코는 늘 아주 현실적인 문제를 들고 나타났다. 삶을 붙잡아 주는 방식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걸 느꼈다. 내 경우엔 고블린과 빵가루였다.
문장이 적힌 종이를 들여다보던 날, 나는 잠깐 혼자 있고 싶어 성벽 위로 올라갔다. 바람은 차가웠고, 아래에서는 저녁 장사를 준비하는 시장의 소음이 들려왔다. 피코는 따라오지 않았다. 녀석은 내가 조용해지면 대개 배가 고프거나 생각이 많다는 걸 알았다.
나는 난간에 팔꿈치를 올리고 한국에서 보낸 마지막 주말을 떠올렸다. 냉장고 안에 남겨 둔 반찬, 빨래를 널지 못하고 출근한 아침, 어머니의 문자를 읽겠다고 휴대전화를 들었다가 피곤해서 내려놓았던 순간. 여기 와서 나는 그 기억들을 보물처럼 붙잡았다. 실제로는 너무 평범해서 그때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일들이었다.
“한도윤.”
뒤에서 루시아가 불렀다.
“여기 계셨습니까?”
“널 찾아왔다.”
그녀가 난간 옆에 섰다. 평소라면 무슨 강력한 적을 만났느냐고 물었을 것이다. 오늘은 그냥 시장을 바라봤다.
“저 아래 빵집 있잖나.”
“네.”
“전쟁이 심할 때는 저곳이 의무병들의 집결소였다. 빵보다 붕대를 더 많이 만들었지.”
“지금은 빵을 만들고 있네요.”
“그렇다. 주인이 빵집으로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어. 난 그때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갑옷의 매듭을 고쳐 맸다.
“하지만 그가 다시 빵을 굽겠다고 결정했으니 지금은 그걸 지켜 주는 게 내 일이다.”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기사단장님답지 않게 멋진 말이네요.”
“무슨 뜻이지?”
“매우 칭찬입니다.”
루시아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네가 돌아갈 길을 찾을 때도 내 일은 같겠군.”
“제가 돌아가겠다고 결정하면요?”
“지키지.”
“여기 남겠다고 하면요?”
“그것도 지키지.”
“그럼 기사단장님은 왜 싸우는 겁니까?”
“내가 선택한 사람들을 남이 멋대로 끌고 가지 못하게 하려고.”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루시아는 내 어깨를 툭 쳤다.
“하지만 그 전에 네 월급부터 받아라. 지난번엔 지급명세서가 왜 그렇게 복잡했는지 아직 모르겠더군.”
“이해하기 어려운 데서 멈추신 게 정확한 판단입니다.”
그녀는 크게 웃었다. 바람이 우리 사이를 지나갔다. 그날 나는 서류 속 '귀환'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적어도 내 옆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는 안다고 생각했다.
저녁을 먹고 재정실로 돌아오자 예상 밖의 손님이 와 있었다. 피코보다 머리 하나쯤 큰 젊은 마족 직원이었다. 그는 복도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나를 기다렸다.
“무슨 일인가요?”
“저, 인사과에서 왔습니다. 이 문서가 이상해서요.”
그가 내민 것은 근로자 숙소 재배치 안내문이었다. 거기에는 '이동 통보 수령'과 '기존 숙소 반환 동의'가 같은 칸에 묶여 있었다. 지난번 자동 퇴직 사고와 비슷한 문제였다.
“숙소를 옮기라고 통보한 것과, 본인이 현재 숙소를 반환하겠다고 동의한 건 다른 일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문제 있다고 말하니까 기존 양식이라 어쩔 수 없다고 해서.”
그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이런 일로 큰 회계사를 찾아온 게 실례일까요?”
“아뇨. 큰 회계사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나는 그에게 누구에게 말했고 어떤 답을 받았는지 물었다. 그는 책임자를 욕하거나 특정 사람의 잘못을 단정하지 않았다. 단지 양식을 그대로 쓰면 직원들이 자기도 모르게 숙소를 비우게 될 수 있다고 걱정했다.
“이름을 남기셔도 괜찮습니까?”
“가능하면 처음에는 익명으로 부탁드려요.”
“알겠습니다. 업무 위험 보고로 접수하고, 사실 관계 확인 때만 필요한 범위로 연락드리겠습니다.”
피코가 작은 도장을 가져왔다.
[받았음. 찬성하지 않았음.]
젊은 직원이 그걸 읽고 웃었다.
“바로 그 말이에요.”
우리는 접수 내용과 직원 이름을 따로 보관했다. 나는 서무과에 임시 안내를 보내, 숙소 이전 통보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권리 종료를 처리하지 말라고 요청했다. 실제 적용 여부는 다음 날 점검하기로 했다.
직원이 돌아간 뒤 피코가 물었다.
“도윤 님, 저런 이야기도 제3감리 문제랑 이어져요?”
“설계가 비슷하다는 건 확인할 수 있어. 뿌리가 같은지는 아직 몰라.”
“그럼 왜 해결해 줘요?”
“뿌리가 같지 않아도 사람이 피해를 볼 수 있잖아.”
피코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한국어 문장 옆에 새로운 항목을 적었다.
'현재 발생한 위험은 원인 추적과 별개로 임시 보호한다.'
이 문장을 누가 썼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뜻에 동의할 수 있었다.
숙소 양식 사고를 조사한 다음 날, 인사과에서 짧은 회신이 왔다. 숙소 이전 통보를 받은 직원 열두 명 가운데 실제 반환 의사를 제출한 사람은 네 명뿐이었다. 나머지 여덟 명은 아직 결정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기존 화면에는 열두 명 모두 반환 동의라고 뜹니다.”
피코가 말했다.
“그러니 지금은 확정 처리를 멈춰야지.”
우리는 전산 담당자에게 실제 고용과 거주권을 건드리지 않는 시험용 복사본으로 오류를 재현하도록 요청했다. 시험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통보 수령만으로 동의가 만들어졌다. 담당자는 임시 차단 규칙을 적용하겠다고 답했지만, 실제 운영 시스템의 결과는 다음 날 다시 확인해야 했다.
피코가 작은 수첩을 펴고 말했다.
“오늘은 열두 명 중 여덟 명이 아직 선택할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네 명도 이미 낸 의사를 확인할 권리가 있지.”
“그렇네요.”
녀석은 열두 개의 빈 동그라미를 그리고, 확인된 네 개에만 색을 칠했다. 나머지는 빈칸으로 남겼다.
“이걸 다 색칠해야 하는 건 아니죠?”
“그래. 누군가는 안 한다고 선택할 수 있어.”
피코가 밝게 웃었다.
“빈칸을 억지로 메우지 않는 것도 일이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훌륭한 말이었다.
그날 나는 마지막으로 민원 접수증의 '처리 완료'라는 문구를 '임시 보호 요청 접수'로 고쳤다. 아무도 환호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여덟 명의 선택이 서류에서 없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마왕성에서는 문장의 소식을 들은 제르칸이 곧장 회의를 소집했다. 그는 왕좌에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인간의 언어로 적힌 문장이 발견됐다는 말이냐?”
“네. 다만 작성자와 시점은 아직 모릅니다.”
“내 왕국의 명운을 좌우하는 문구일 수도 있겠군.”
“그런 말은 아직 하지 마세요.”
“왜?”
“명운이 달려 있다고 하면 제게 긴급 예산을 달라고 하실 테니까요.”
제르칸이 움찔했다.
“이미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고 있습니다.”
루시아가 손을 들었다.
“그 문구가 사람의 몫을 남겨 두라고 한다면, 남겨 둔 몫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야 하지 않나?”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놀랍게도 정확한 질문이었다.
“그렇습니다. 권리든 돈이든, 남겨 뒀다는 사실과 실제 보관 중이라는 건 다르죠.”
몰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제3감리의 옛 보증 계정에 유사한 항목이 있었다. 그러나 그 돈을 특정 개인의 귀환 자금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우리는 구형 계정의 명칭을 확인했다.
[귀속 미확정 외부인 권리 보전 적립금]
나는 문구를 읽고 피식 웃었다.
“정말 금융기관이 쓴 이름이네요.”
“왜지?”
“누구 돈인지 모르지만 일단 남겨 놓겠다는 뜻을 열두 단어로 적었으니까요.”
제르칸이 중얼거렸다.
“내가 이름을 붙였다면 '용사 귀환 금고'라고 했을 것이다.”
“그래서 폐하께 계정 작명을 맡기지 않는 겁니다.”
몰트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나는 경고음을 들은 사람처럼 고개를 들었다. 마왕과 리치 실장이 싸우기 시작하면 장부보다 오래 가는 일이 많았다. 다행히 오늘은 제르칸이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용사 귀환 금고가 멋있지 않나?”
“매우 멋있습니다. 다만 실제 내용과 다르면 안 됩니다.”
“또 숫자군.”
“이번엔 이름입니다.”
회의 결과 우리는 옛 보증 계정의 현황을 조회하기로 했다. 조회 범위는 계정 잔액과 지급 조건뿐. 개인별 내역은 아직 건드리지 않았다. 제3감리의 옛 장부가 외부인의 권리를 보존하기 위한 제도였을 가능성은 커졌지만, 그것이 지금의 자동 동의 문제와 어떻게 이어졌는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
오후에는 라델이 왕국 측 원본 해설의 다른 판본을 보내 왔다. 그 판본에는 한국어 문장이 없었다. 대신 같은 자리의 공용어 주석에 이런 문구가 있었다.
[이관된 권리를 원소유자의 선택 없이 소멸시켜서는 안 됨.]
“비슷하지만 같지는 않네요.”
피코가 말했다.
“그래. 번역했을 수도 있고, 각각 다른 주석일 수도 있어.”
아우렐과 나는 두 판본의 종이 섬유와 잉크 표본을 비교할 수 있는 범위부터 확인했다. 원본이 손상될 위험이 있으므로 종이를 긁어내는 시험은 하지 않았다. 대신 빛에 비추어 눌린 자국의 순서를 관찰하는 비파괴 검사를 요청했다.
“왜 그렇게까지 조심해요?”
피코가 물었다.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겠다고 원본을 망가뜨리면 나중에 다른 사람이 확인할 수 없잖아.”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만 남아 있는 건 더 소중하네요.”
“응.”
나는 한국어 쪽지가 적힌 종이를 떠올렸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건, 그것을 함부로 다룰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저녁 무렵, 아우렐에게서 비파괴 검사 예비 결과가 왔다.
[한국어 주석은 본문보다 나중에 기입된 것으로 추정. 단, 같은 종이의 장기 보관 기간 중 작성 여부 미확정.]
나는 예상했던 답이 나오자 오히려 안도했다. 성급하게 과거의 계약 작성자를 한국인으로 확정하지 않아도 됐다.
그리고 예비 검사 표의 맨 아래, 기이한 사실이 있었다.
[주석 상단의 원문 용어 '귀환'은 수기 수정 흔적 확인. 기존에는 '인계'로 기록되었을 가능성.]
나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인계와 귀환.
둘은 다르다.
누군가 물건을 받았다는 사실과, 그 물건이 주인에게 돌아갔다는 사실은 다르다. 사람이 소환됐다는 사실과, 그 사람이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도 다르다.
오래전 누군가는 그 두 말을 구별해 놓았을 수 있다.
반대로 누군가는 나중에 둘을 합쳐 버렸을 수도 있다.
문제는 지금 우리가 누구의 선택을 대신하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마왕성 밖에서는 저녁 종이 울렸다. 피코가 식당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도윤 님! 오늘 감자 수당 문제 해결됐대요!”
나는 전송 구슬을 내려놓고 그를 따라갔다.
세계의 비밀은 잠깐 기다려도 된다.
사람들이 저녁을 먹는 건 기다리면 안 되니까.
제10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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