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항으로 떠나는 날 아침, 나는 성문 앞에서 수상한 짐을 발견했다.
검은 천으로 덮인 길쭉한 물체가 마차 지붕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 길이는 어른 둘을 이어 놓은 만큼이었다. 루시아는 그 앞에서 팔짱을 끼고 만족한 얼굴로 서 있었다.
“기사단장님.”
“왔다, 한도윤.”
“그건 뭡니까?”
“위기에 대비한 장비다.”
나는 검은 천을 살짝 걷었다. 거대한 창이 아니라, 장식이 지나치게 많은 이동식 서류 보관함이었다. 모서리마다 철제 뿔이 돋아 있었다.
“왜 보관함에 뿔이 달렸어요?”
“마왕성의 위엄을 보여 주려고.”
“서류 넣으면 찢어질 것 같은데요.”
“내부는 부드러운 천으로 감쌌다.”
그녀가 자랑스럽게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칼이 아니라 깃털펜 여섯 개, 먹물 세 병, 인장 보호용 천주머니가 들어 있었다.
나는 잠깐 말을 잃었다.
“놀랍네요.”
“그렇지? 말단 서무가 내가 만든 목록을 보고 울더군.”
“왜 울었대요?”
“감동해서.”
나중에 알고 보니 목록 제작비가 서무과 한 달 소모품 예산과 같아서였다고 한다. 감동의 방향이 약간 달랐다.
마차가 출발하자 피코는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휴전항까지 가는 길은 예전과 달라져 있었다. 지난번 성벽 보수 물품을 옮기던 다리에는 새 난간이 생겼고, 검문소 옆에는 '확인'과 '동의'를 구분해 적은 안내판이 걸려 있었다. 우리가 몇 달 동안 문서 속에서 싸운 결과가 길가의 표지판 하나로 나타난 것이다.
“저거 제가 만든 도장이랑 비슷하네요!”
피코가 소리쳤다.
실제로 안내판 구석에는 그의 교육용 문구가 있었다.
[서류 수령은 내용 승인과 다릅니다.]
“공식 도장은 아니지만, 뜻은 잘 전했네.”
“그럼 제 도장도 승진한 건가요?”
“도장한테 직급을 주진 말자.”
“그렇지만 신입 도장, 선임 도장도 있으면 재미있을 텐데요.”
루시아가 진지하게 끼어들었다.
“그럼 기사단 도장은 장군으로 승진할 수 있나?”
나는 더 대답하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 승진 체계까지 새로 만들 여력은 없었다.
휴전항에 도착하자 아레인이 우리를 맞았다. 중립 공관 기록관인 그는 며칠 새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지난 폭우로 제2공관 지하 기록을 옮긴 뒤, 시설 보수 보고서가 산처럼 쌓였다고 했다.
“밤은 좀 주무십니까?”
“어젯밤은 세 시간 잤습니다.”
“그건 잠이 아니라 시식인데요.”
아레인이 피식 웃었다.
그는 우리를 북쪽 언어검수소로 데려가기 전에 현장 안전수칙부터 읽었다. 낡은 건물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은 여섯 명. 봉인함은 기록관이 열람권을 확인한 뒤에만 접근. 종이에서 검은 가루가 날리면 손으로 닦지 말 것. 검은 가루가 움직이면 즉시 나올 것.
“마지막 조항이 조금 특이한데요.”
“오래된 언어 마법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종이도 야근하면 돌아다니는 세계니까.”
피코가 내 소매를 꽉 잡았다.
“움직이는 글자는 물어요?”
“물 수도 있지. 하지만 우린 먹이를 안 줘도 돼.”
“먹이가 뭐예요?”
“아마 서명?”
내 농담에 아레인은 웃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있는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검수소에 들어가기 전, 아레인은 우리에게 임시 출입증을 나눠 주었다. 목걸이에는 이름 대신 역할이 적혀 있었다.
[기록 확인자]
[현장 보호 인력]
[보존 지원 인력]
루시아는 자기 목걸이에 적힌 '현장 보호 인력'을 보더니 깊이 감동했다.
“드디어 내 능력을 정확히 평가하는군.”
“원본을 지키는 역할입니다.”
“적을 죽이지 않아도 되는가?”
“죽이면 안 됩니다.”
그녀는 아쉬운 얼굴로 끄덕였다.
피코는 자기 출입증을 보다가 작게 물었다.
“저도 여기서 일하는 사람처럼 보일까요?”
“이미 일하고 있잖아.”
“저는 고블린이니까 예전에 사람들한테 창고 밖에서 기다리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나는 잠시 피코를 봤다. 늘 빵값과 도장 이야기로 떠들던 녀석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오늘은 네가 보존 지원 인력이야. 네가 확인할 수 있는 업무 범위 안에서 정식으로 들어가는 거고.”
“네!”
녀석은 출입증을 가슴에 꼭 붙였다. 아레인은 그 모습을 보고 조용히 자신의 출입 규정표를 접었다. 이후 들어온 다른 방문객에게도 역할과 권한을 먼저 설명하고, 종족은 묻지 않았다.
복도 끝에서 낡은 마법식 인장 검사대가 우리를 기다렸다. 관리인은 출입증을 읽게 한 다음 '방문 목적에 동의하십니까?'라는 질문을 했다.
“방문 목적은 이미 정했습니다. 무엇에 동의하는 거죠?”
내가 묻자 그는 안내서를 펼쳤다.
“열람 중 알게 된 비공개 정보를 외부에 누설하지 않는다는 약정입니다.”
“그럼 그렇게 적어야죠. 방문 목적에 동의한다는 말과 비밀 유지 약정은 다릅니다.”
관리인은 기계 옆에 임시 종이 안내를 덧붙였다. 나는 약정 범위를 읽고 내가 지킬 수 있는 부분에만 서명했다. 피코의 약정에는 보존실에서 본 개인 정보를 말하지 않는다는 항목과, 기술적 사고를 담당자에게 신고해야 한다는 항목이 있었다.
“도윤 님. 신고는 비밀 누설이에요?”
“아니. 정해진 보호 담당자에게 사고를 신고하는 건 별도 절차야.”
관리인이 그 문장도 안내서에 적었다.
“방문객한테서 서식 교육을 받기는 처음입니다.”
그가 말했다.
“저도 이런 여행이 처음은 아닙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루시아가 인장 검사대 앞에 서자 기계에서 경고음이 났다. 그녀가 순간적으로 검에 손을 뻗었다.
“침입자인가?”
“아니요. 기사단장님의 검집에 반사 마법이 붙어서 장치가 두 번 읽은 겁니다.”
관리인이 재검사하자 정상 출입이 떴다. 루시아는 검집을 한 번 닦고는 중얼거렸다.
“이렇게 쉽게 진정되는 적은 처음이군.”
“적이 아니라 출입기입니다.”
“더 좋다. 비용이 적게 드니.”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재정실 직원이 된 건 아니지만, 확실히 내 영향을 받고 있었다.
검수소는 항구의 다른 건물들과 달리 창문이 거의 없었다. 낡은 벽돌 사이로 바닷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출입구의 표지에는 세 언어가 나란히 새겨져 있었다. 마계 공용어, 왕국 공용어, 그리고 내가 아직 읽을 수 없는 각진 문자.
“이건 천계 문자입니까?”
아레인이 고개를 저었다.
“당시 중립 표준 기호입니다. 의미를 모르는 내용을 보관할 때 쓰는 인계 표식입니다.”
“제 말로 하면 '해석하지 않음'이군요.”
“비슷합니다.”
피코가 손가락으로 벽의 문자를 따라 그렸다. 그러다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점 세 개!”
문자 아래에는 작은 점 세 개가 삼각형으로 찍혀 있었다.
나는 재빨리 다가갔지만,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쪽지의 작은 점 세 개와 비슷해 보인다는 이유로 연결할 수는 없었다. 점 세 개는 세상 어디에나 있다. 주사위에도 있고, 제르칸의 망토 세탁 안내표에도 있다.
아레인이 벽을 살폈다.
“이 건물에는 점을 세 개 찍은 안내 표식이 자주 나옵니다. 판독 보류와 관련된 작업자 표식일 수 있습니다.”
“그럼 더더욱 비교해야겠네요. 모양과 위치를 기록하고요.”
우리는 확대경으로 찍힌 간격을 쟀다. 벽의 점은 반듯한 삼각형이었고, 한국어 쪽지의 점은 거의 일렬이었다. 적어도 똑같은 도장 자국은 아니었다.
피코는 한숨을 쉬었다.
“비밀 같았는데.”
“비밀을 틀리게 맞히지 않은 것도 성과야.”
그 말에 녀석은 다시 수첩을 꺼냈다.
검수소 안쪽에서 작은 책상이 여러 개 발견됐다. 바닥에는 높이가 다른 의자 자국이 있었다. 아레인이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서 들어온 문서를 사람이 읽을 수 있는 언어로 바꾸는 일을 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모두를 번역한 것은 아니었다. 번역하면 원문의 의미가 손상될 위험이 있는 문서는, 읽지 않은 채 봉인해 다른 곳으로 보냈다.
“그렇다면 한국어 문서도 판독을 하지 않고 옮겼을 수 있군요.”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실제 업무일지 확인이 필요합니다.”
아레인은 두꺼운 출입대장을 펼쳤다. 특정 날짜의 기록이 유난히 흐릿했다. 먹물이 지워진 자리는 없었다. 대신 같은 날에 들어온 서류의 목적란이 모두 빈칸이었다.
“고의로 지운 것 같나요?”
내가 묻자 아레인은 신중하게 말했다.
“초기에 목적을 적지 않는 규칙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언어를 알 수 없거나 소유자가 미상인 물건은 추정하지 않았지요.”
“빈칸이라고 다 누군가 감춘 건 아니라는 말이군요.”
“맞습니다.”
그 말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빈칸을 음모로 채우는 일은 쉽다. 증거로 채우는 일이 어렵다.
우리는 봉인함 6호 앞에 도착했다. 표면은 평범한 나무였다. 다만 잠금쇠가 세 겹이었다. 아레인은 첫 번째 열쇠를 돌린 뒤 두 번째 칸에서 얇은 확인서를 꺼냈다.
[열람 목적: 출처 분류 대조. 개인정보 원문 접근 제외.]
나는 수령 칸과 동의 칸을 나눠 달라고 요청했다. 아레인은 피코가 만든 안내 문구를 보고 이미 양식을 바꿨다며 웃었다.
“여기서는 받았다고 적어도 동의하지 않은 것으로 처리됩니다.”
피코가 너무 기뻐해 의자 위로 올라갔다.
봉인함 안에는 편지가 없었다. 대신 작은 금속판과 인계표 두 장이 있었다. 금속판에는 긴 번호가 새겨져 있었다.
[송-4189 / 제1차 언어판정: 유예 / 운송편명: 바다새 9호]
옆에는 그 문서가 검수소로 들어올 당시 포장 상태가 적혀 있었다.
[외부 봉피: 왕국식. 내부 봉피: 미확인. 내부 개봉 금지 요청 첨부.]
나는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왕국식 포장이라고 해서 왕국이 쓴 것은 아니다. 운송인이 왕국 쪽 종이를 썼을 수도 있고, 그곳에서 다시 포장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기록은 새 질문을 만들었다. 우리가 줄곧 천계에서 찾던 문서가, 그보다 앞서 항구에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바다새 9호가 어떤 배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까?”
“당시 항만 명부가 남아 있습니다. 다만 일부는 전쟁으로 유실됐습니다.”
루시아가 창밖을 가리켰다.
“배라면 항구 주인에게 물으면 되지 않나?”
“옛날 배잖아요.”
“그렇다고 배가 모두 죽는 건 아니지.”
나는 루시아를 보았다. 그녀의 말은 가끔 이상하게 정확했다. 오래된 배의 승무원이 남아 있을 수도 있고, 선주의 사업 기록이 남아 있을 수도 있었다.
아레인이 항만 명부를 찾으러 간 사이 우리는 건물 뒤편으로 나왔다. 바람이 세게 불었다. 항구 노동자 둘이 낡은 밧줄을 감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검수소를 아느냐고 물었다.
“저 건물이오? 우리 할아버지가 거기 짐을 나르셨죠.”
한 사람이 대답했다.
“그때도 언어를 검사했습니까?”
“난 모르지. 할아버지는 글을 못 읽었소. 대신 봉투 무게는 손으로 알았지.”
그는 웃었다.
“어떤 날엔 빈 봉투처럼 가벼운 상자를 옮겼는데, 다들 그걸 아주 조심히 다뤘다고 하셨소.”
“언제였는지 기억합니까?”
“그건 모르겠소. 할아버지 말만 들었으니까.”
나는 그 이야기에도 선을 그었다. 유용한 단서일 수 있지만, 증언자의 직접 경험은 아니다. 그 말을 그대로 원본의 행방이라고 적었다가는 도윤의 감사가 아니라 할아버지의 전설집이 된다.
피코가 내 노트에 크게 적었다.
'손자가 들은 할아버지 이야기. 사실 확인 필요.'
착실한 녀석이다.
저녁에 항만 명부가 도착했다. 바다새 9호는 군함이 아니었다. 전쟁 중 양쪽 지역 사이에서 부상자와 편지를 옮기도록 허가받은 작은 중립 운송선이었다. 운항 기록에는 승객 대신 화물과 봉인 물품 수만 남아 있었다.
그중 송-4189에 대응하는 접수번호가 있었다.
[봉인 물품 1개. 분실 방지 예치 증서 동봉.]
“은화 열 닢이랑 연결될까요?”
피코가 물었다.
“가능성은 있지만 같은 증서인지 아직 몰라.”
내가 답하자 녀석은 시무룩해졌다가 다시 물었다.
“그럼 내일은 뭘 확인해요?”
“운송선에 문서를 맡긴 접수소와, 왜 열지 말라고 했는지를.”
루시아가 두 손을 비볐다.
“드디어 배를 타는가?”
“배가 남아 있다면요.”
“좋아. 바다 위에서 서류를 지키는 훈련이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기사단장의 인생은 모든 상황이 훈련이었다.
마차로 돌아가는 길, 항만 노동자가 내게 쪽지 하나를 건넸다. 할아버지의 낡은 노트에서 찾았다는 낙서였다. 거기에는 운송선의 오래된 호출 구호가 적혀 있었다.
[목적지는 서명이 아니라 사람이다.]
그 문장은 내 한국어 쪽지의 뜻과 닮아 있었다. 그렇다고 작성자가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 그 시절에도 이미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던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대체 무엇을 지키려고 이렇게 많은 봉인을 만든 걸까.
제10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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