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7년 4월 16일 금요일 아침, 나는 아직 재생하지 않은 음성 파일의 길이를 먼저 알게 됐다.
십칠 초.
오선영이 전화로 알려준 숫자였다. 십칠 초는 사람을 죽였다는 자백을 담기에도 충분했고, 누군가의 음성을 흉내 내기에도 충분했다. 나는 어느 쪽도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파일명을 다시 읽어봐.”
“REVIEW_BEFORE_RELEASE_0216.”
“그 안에 적힌 시각하고 실제 파일 생성 시각은 구분해. 지금 확인된 건 이름에 0216이 들어 있다는 것뿐이야.”
“내용은요?”
“감정 담당자가 원본 해시부터 확보했어. 내용 요약을 공유할 수 있는 범위가 정해지면 알려줄게.”
나는 대답 대신 책상 위에 두 개의 표를 펼쳤다. 2026년 11월 2일 오후 10시 16분, 내게 최초 사건기록이 왔다. 그날 밤 9시 49분이라는 공동 대기열 상태 기록이 따로 있었다. 11월 3일 오후 9시 16분에는 배정우 사망 소식보다 먼저 도착한 듯 보이는 수정본이 있었다. 이 세 시각을 이어 붙이면 그럴듯한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먼저 이어 붙였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사람이 행동했다는 증거는 없다.
오전 열 시 반, 선영이 다시 전화했다.
“내용을 말해줄 수 있어. 남자 목소리 하나가 있고 짧은 기계음이 뒤따라. ‘배포하기 전에 검토하십시오. 미확인 사본을 개별 수신자에게 전송하지 마십시오.’ 그게 전부야.”
나는 기대했던 단어가 없다는 사실에 실망했다. 배정우, 살인, 반환, 서진혁. 어느 이름도 나오지 않았다.
“배정우 목소리입니까?”
“비교할 만한 원본이 충분하지 않아. 현재로선 동일인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소견이야. 음성에 합성이나 편집 흔적이 있는지도 결론 전이고.”
“그럼 내용은 회람 안내 문구 같은데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렇지만 그 생각을 보고서에는 가설이라고 적었어.”
나는 통화를 끊은 뒤 백이준에게 문의할 자료를 정리했다. 화진모빌리티가 2025년에 사용하던 접수 시스템에는 음성 안내 기능이 있었는가. 있었다면 어떤 문구가 있었는가. 그리고 2026년 문서보관 대기열이 그 시스템의 자료를 재사용했는가. 질문은 세 개였다. ‘누가 음성을 만들었느냐’는 아직 첫 질문이 아니었다.
오후 한 시, 한유리가 사무실에 왔다. 그녀는 이미 인터넷에서 십칠 초짜리 음성을 들었다고 했다. 놀랍게도 내가 받은 것과 제목이 같았다.
“게시글에는 배정우의 마지막 유언이라고 적혀 있어요.”
“원본을 들었다는 근거가 있습니까?”
“글쓴이는 익명이고, 파형 이미지도 없어요. 음성을 들어보니 ‘개별 수신자에게’가 ‘배정우에게’처럼 들리도록 중간을 잘라놓은 것 같더라고요.”
나는 재생을 부탁하지 않았다. 이미 인터넷에 공개된 파일이라도 정체 모를 실행 파일이나 링크를 거쳐 전달될 수 있었다. 그녀에게 게시물 주소와 게시 시각, 보이는 설명문을 보존하도록 했다. 같은 파일이라는 주장은 실제 바이트를 대조하기 전에는 하지 말자고 했다.
“기사는 써도 될까요?” 한유리가 물었다.
“쓰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유언이라는 말은 쓰면 안 되겠죠.”
“그건 당연하죠. 그런데 왜 누군가 이런 걸 유언이라고 부르고 싶어 할까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죽은 사람이 남긴 말이라는 꼬리표가 붙으면 살아 있는 사람들은 반박하기 어려워진다. 그게 이유일 수도 있었다.
오후 네 시, 임소율이 연락했다. 회사에서 비용 귀속 재심사 회의 날짜를 잡았다는 것이다. 한편 그녀가 과거 신고를 철회했다는 잘못된 기록은 일부 거래처 전산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정정 공문이 발송됐는데 왜 고쳐지지 않았을까.
“수신만 하고 담당자가 조치 완료를 누르지 않았대요.” 그녀가 말했다. “이제는 정말 누구 말을 믿어야 하죠?”
“원래 신고 내용을 고친 기관과 거래처가 같은 곳이 아닙니다. 각 기록을 따로 확인해야 합니다.”
“그 말이 맞는 건 알아요. 그런데 제 인생은 하나인데 기록은 왜 이렇게 여러 개인 거죠?”
나는 그 질문을 오래 품었다. 사건기록이 사람을 여러 조각으로 나눌 때 악인은 그 조각 사이를 걷는다. 한 기관의 정정이 다른 기관에 닿지 않는 시간을 골라, 거짓 문서를 다시 보낸다.
그날 오후, 임소율은 자신에게도 같은 파일이 왔다고 말했다. 이메일 제목은 ‘확인 요청’이었다. 본문에는 짧은 링크 하나가 붙어 있었고, 링크를 열면 자신의 동의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열어보셨습니까?”
“아니요. 누가 보냈는지부터 확인했어요. 제 전 직장과 이름이 비슷했지만 주소 끝부분이 달랐어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어깨의 힘을 풀었다. 반년 전이었다면 그녀는 겁에 질려 링크를 열었을지도 모른다. 위험한 일을 겪은 사람이 조심스러워졌다는 사실이 기쁘면서도 슬펐다.
“이 링크로 계정 정보를 입력하게 하려는 건지 아직 모릅니다. 회사 공식 창구를 통해 사실을 확인해 주세요. 원문은 삭제하지 말고요.”
“처음에는 제가 무서워서 남들 시키는 대로 했어요. 지금은 확인하고 나서 움직여요.”
그녀가 말했다. “그런데 조사관님, 겁이 안 나는 건 아니에요.”
“알아요.”
“저를 죽이겠다는 메일을 받은 날보다, 누가 제 이름으로 서명했다는 걸 알았을 때 더 무서웠어요. 살아 있는 동안 제가 안 한 일을 계속 했다고 적을 수도 있잖아요.”
나는 쉽게 위로하지 못했다. 살인 예고는 수사가 끝나면 멈출지 몰라도 잘못 복사된 기록은 훨씬 오래 남는다. 임소율에게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약속이 아니라, 자신의 서명을 누가 사용했는지 끝까지 확인할 수 있는 절차였다.
저녁에 선영이 보낸 문자에는 새로운 단서가 있었다. 음성의 배경에서 두 차례 짧은 신호음이 관찰됐다는 것. 감정 담당자는 그 소리가 사람의 휴대전화인지, 안내 방송의 일부인지, 녹음 중 삽입된 효과인지 알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그 불확실함을 보고 별표를 그렸다.
그때 백이준에게서 답장이 왔다. ‘2025년 구형 보류 처리 교육자료에 유사한 문장 존재. 정확한 녹음 원본 및 사용 시기 확인 필요.’
나는 모니터를 오래 바라봤다. 우리가 범인의 마지막 말을 듣고 있다고 생각했던 파일이, 누군가 오래된 교육자료에서 잘라낸 안내일 수 있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발신자는 죽음의 순간을 기록한 사람이 아니라, 죽음의 순간인 척 보이게 자료를 고른 사람이었다.
“이건 발신자의 실수 아닐까요?” 한유리가 물었다.
“아니면 일부러 우리가 교육자료를 찾게 한 걸지도 모릅니다.”
“항상 그렇게 의심하면 영원히 못 끝내요.”
“그러니까 그 의도는 나중에 찾고, 우선 원본이 같은지 보죠.”
내가 말을 끝내자 휴대전화가 울렸다. 배은정이었다. 누군가 동생의 목소리라며 파일을 보내왔다는 것이다. 그녀는 파일을 열지 않고 경찰에 전달했다고 했다.
“제가 이걸 들어야 하나요?” 그녀가 물었다.
“그럴 의무는 없습니다.”
“동생의 목소리라면요?”
“수사팀이 확인할 겁니다. 누가 보냈는지 모르는 파일을 유족이 먼저 증명할 책임은 없어요.”
수화기 너머에서 길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날 밤 나는 2025년 교육자료의 존재를 노트에 적었다. ‘음성 내용의 출처 후보.’ 그 아래에는 ‘화자 불명, 녹음 시각 불명, 최초 배포자 불명’이라고 썼다. 범인에게 가까워졌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 내게 기대시킨 잘못된 확신에서 멀어졌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자정 전에 한유리가 기사 제목을 보내왔다. ‘죽은 사람의 유언이 아니라, 출처를 확인해야 할 십칠 초.’ 나는 그 제목을 보고 처음으로 웃었다.
메일은 그날 다시 오지 않았다. 그러나 음성이 퍼진 게시물에는 새 댓글 하나가 달렸다. ‘안내 음성이었으면 왜 0216이라고 저장했을까?’
나는 그 질문을 보존했다. 옳은 질문이었다. 답을 아는 척하는 사람만 아니라면.
제171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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