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열 시, 내 사무실로 등기가 왔다.
발신인은 온새문서지원의 협력업체로 적혀 있었다. 문서 봉투에는 내 이름이 또박또박 인쇄돼 있었다. 나는 먼저 배송 기록과 발신처를 확인했다. 그날은 2027년 3월 5일이었다.
내용은 단순했다. ‘과거 자료 수령 및 검토 완료 확인서.’ 하단에는 서진혁이라는 글자가 인쇄돼 있고 옆에 서명란이 있었다. 옛 보험금 조사와 관련된 회사 내부 자료가 모두 전달됐음을 인정한다는 문구였다.
나는 첫 줄을 읽고 곧바로 펜을 놓았다.
“누가 이걸 보냈습니까?” 배송을 담당한 직원에게 물었다.
“저는 배달만 합니다.”
“알겠습니다. 서명은 수령 사실에 대한 것만 하겠습니다.”
내가 서명한 것은 택배를 받았다는 배송 확인이었다. 봉투 안에 든 문서를 검토했다거나 그 내용이 맞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차이가 이번 문서의 핵심이었다.
나는 수신 확인이 사실인지도 확인하기 전에 오선영에게 연락했다. 그녀는 봉투와 문서의 보존 방법을 알려주고 발신처 확인에 나섰다.
“이번에는 네 이름을 썼네.”
“네.”
“서명했어?”
“배송 확인만요. 내용 확인서는 하지 않았습니다.”
“잘했어.”
나는 전화를 끊고 문서를 다시 읽었다. 놀랍도록 익숙한 문구였다. 2025년 8월 25일의 서류를 둘러싼 ‘미교부 책임 이관 금지’ 경고와 정확히 반대되는 뜻을 담고 있었다. 전달받지 않은 자료까지 모두 받았다고 인정하라는 요구였다.
그런데 오늘의 상대는 그 요구를 숨기지도 않았다. 내 이름을 인쇄한 확인서를 당당하게 보내왔다. 내가 당황해서 서명하거나, 서명하지 않은 채 침묵하면 어느 쪽이든 다음 장면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나는 봉투를 책상 위에 놓고 작은 자로 가장자리를 쟀다. 증거를 훼손할 행동은 하지 않았다. 배송 확인 화면의 사본과 봉투 안 확인서를 나란히 놓았다. 한쪽에는 물건을 받았다는 뜻으로 내 서명이 있었고, 다른 한쪽은 그 서명을 원했다.
내가 두 가지를 혼동했다면 상대는 얼마나 쉽게 일을 끝냈을까. 그 생각이 들자 화보다 먼저 부끄러움이 올라왔다. 지난 수개월 동안 다른 사람들의 수신 확인을 검증한다고 말해놓고, 정작 내 이름이 적힌 서류 앞에서는 펜을 들 뻔했던 것이다.
사무실에 온 박혜림은 봉투를 보자마자 표정이 굳었다.
“저도 비슷한 걸 받았어요. 예전에.”
그녀가 꺼낸 것은 몇 달 전 회사가 보낸 수령 확인 요청이었다. 당시 그녀는 자료를 받지도 못했는데 기한 내 회신을 하지 않으면 동의한 것으로 처리될 수 있다는 문구를 보고 겁이 났다고 했다. 상담 담당자는 그 문구만으로 법적 동의가 확정되는 건 아니라고 설명해줬지만, 그때 그녀는 이미 면접을 한 번 놓쳤다.
“이런 종이는 왜 받는 사람만 무서워해야 하죠?”
나는 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에는 서 조사관님이 무서워해도 괜찮아요. 대신 그걸 빨리 다른 사람 이름으로 돌리진 마세요.”
그 말은 이상할 정도로 오래 남았다. 나는 그녀에게 내가 아직 아무도 지목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럼 잘하고 계신 거예요.”
그녀는 스스로 갖고 온 서류를 다시 가방에 넣었다. 이번에는 내가 그 기록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녀의 피해는 이미 별도로 정리되고 있었다. 내 사건을 설명하려고 그 사람이 자신의 자료를 계속 보여줄 필요는 없었다.
오후 늦게 배은정도 메시지를 보냈다. 동생의 이름을 사칭한 기록이 또 돌아다닌다고 했다. 나는 선영에게 해당 사실을 전달했다. 유족이 직접 인터넷 게시물과 싸우지 않아도 되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바람만으로 이미 퍼진 글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날 저녁 나는 문서를 정리한 뒤 한 통의 편지를 썼다. 실제 발송하지는 않았다. ‘제가 확인한 것은 물건의 도착뿐입니다. 그 안의 진술이 사실인지, 내용에 동의하는지는 별도의 절차가 필요합니다.’ 너무 평범한 문장이었다. 그런데 이 문장을 정확하게 쓰기 위해 우리는 반년 가까운 시간을 보냈다.
오후 한 시, 발신처에 적힌 협력업체는 그 서류를 발송하지 않았다고 공식 답변했다. 다만 협력업체의 과거 양식과 비슷한 문구가 사용됐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누군가가 기존 파일을 재사용했을 가능성이 생겼다.
“이제 상대가 사문서를 위조했을 가능성도 있겠네요.” 내가 말했다.
“가능성은 있지. 정확히 어떤 문서를 누가 만들었는지는 확인해야 하고.” 선영이 답했다.
나는 문서에 찍힌 등록번호를 살폈다. 2025년 서류에 사용되던 코드와 자릿수가 같았지만 중간의 분류 문자가 달랐다. 원래 자료 수령증에 붙는 번호가 아니라, 수령 확인 양식을 시험할 때 쓰는 식별자로 보였다. 그 의미는 업체 검토를 받아야 했다.
오후 세 시, 정민규가 전화했다. 그는 봉투의 발신처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회사에 보낸 질의 내용 일부를 나에게 설명했다. 이번에는 보호 대상의 이름을 빼고 답변용 수신 창구를 따로 지정했다고 했다.
“제가 제대로 했는지 자꾸 묻게 됩니다.”
“확인이 필요하면 해야죠. 하지만 저한테 비공개 내용을 알려주시면 안 됩니다.”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맞네요. 또 시작할 뻔했어요.”
“이번에는 멈췄습니다.”
그는 조용히 웃고 전화를 끊었다. 누군가의 실수 하나를 되돌리는 데는 때로 그렇게 짧은 대화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 멈춤이 이미 생긴 피해를 없애주는 것은 아니었다.
저녁에 한유리가 나를 찾았다. 그녀는 내가 받은 등기 사실을 알고 있었다. 누군가 익명의 제보를 기자에게 보냈기 때문이었다. 봉투의 수신인과 문서 제목이 적힌 사진이 붙어 있었다.
“제가 벌써 서명한 걸로 기사를 쓰라는 연락이 왔어요.”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알아요. 그래서 물으러 왔죠.”
우리는 배송 서명과 문서 인수 서명의 차이를 설명하는 문장을 함께 확인했다. 그녀는 내 설명을 그대로 기사에 쓰지 않고 업체 확인을 기다리기로 했다.
“상대가 제가 서명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려고 이걸 보냈다면요?” 내가 물었다.
“그럼 확인했겠죠. 그런데 그 사실이 어떤 계획에 필요한지는 아직 모르잖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밤에는 내 서명과 비슷한 글씨가 들어간 이미지가 인터넷에 올라왔다. 그것은 배송 확인용 전자서명의 작은 사진을 확대해 문서 확인서 위에 붙여놓은 듯했다. 정확한 감정은 필요했지만 적어도 내가 검토 완료 확인서에 직접 서명한 적은 없었다.
나는 한순간 화가 났다. 마침내 내 이름이 사람들을 조종하는 문서에 완전히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그 화를 이용해 누군가를 비난하는 글을 먼저 올리지는 않았다. 선영이 원본을 보존하고 업체와 배송 절차 기록을 공식적으로 확인 중이었다.
익명 발신자에게서 메일이 왔다.
‘이제 서 조사관님도 확인 완료자가 되셨군요.’
나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 메일의 원본 헤더와 수신 시각을 보존했다. 예전 같았다면 상대의 도발이 내 행동을 정했을 것이다. 이번에는 이미 한유리와 선영, 협력업체가 각자의 확인 절차를 밟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선영이 문자를 보냈다.
‘확인서에 붙은 서명은 배송 화면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정황 확보. 작성자는 아직 확인 중.’
나는 처음으로 이 사건에서 서명란이 비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반가워하지 않았다. 누군가 채운 서명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거짓말일 수 있다는 걸 배웠으니까.
문서의 맨 끝에 적힌 접수 시각을 다시 읽었다. 9시 43분.
이번에도 같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숫자가 나를 움직이지 못했다.
제129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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