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아침, 임소율이 내 사무실 문을 열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대신 두꺼운 서류철과 작은 보냉가방을 들고 있었다. 손에 들린 서류철의 모서리는 여러 번 열고 닫아서 닳아 있었다.
“먹을 걸 좀 가져왔어요. 지난번에 제가 전화 끊어서 죄송하기도 하고.”
“그럴 상황이었습니다.”
“그래도 오늘은 얘기를 끝까지 하고 싶어요.”
2027년 2월 16일. 임소율은 비용 귀속 재검토 절차에서 나온 새로운 질문지를 보여주었다. 회사는 2025년 당시 임소율이 제출한 신고 원본과 이후 정산 승인 여부를 별도로 확인하겠다고 했다. ‘신고 철회’라는 잘못된 표현은 정정됐지만, 돈이 어디로 이동했고 누가 최종 책임을 지는지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제 이름은 나왔는데 제 말은 없어요.”
그녀가 가리킨 표에는 날짜와 상태값만 있었다. ‘이관’, ‘종결’, ‘승인 대기’. 사람이 무엇을 주장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이 표는 진행 상태를 보여주려고 만든 겁니다.”
“그래서요? 제 말이 필요 없다는 뜻이에요?”
“그 뜻은 아닙니다. 상태값이 신고의 내용까지 대신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녀는 한참 서류를 넘기다가 2025년 8월 22일에 적었다는 수기 메모를 꺼냈다. 종이에는 날짜, 전달 대상, ‘철회 아님’이라는 짧은 글씨가 있었다. 원본인지 나중에 만든 사본인지 검증이 필요했지만, 그 문장은 그녀가 지금까지 일관되게 주장해온 내용이었다.
“그때 제가 누구한테 말했는지 이제 기억났어요.”
“누굽니까?”
“배정우 과장요. 저한테 확인을 강요하지 말라고 했어요. 과장님은 자기는 확인을 요구한 적 없다고 했고요.”
나는 배정우의 메모 후보에 적힌 문장을 떠올렸다. ‘내가 부탁한 건 확인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말이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사건을 가리킨다고 단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확인할 새로운 경로가 생겼다.
“그 대화를 경찰에 진술하셨습니까?”
“일부분만요. 정확한 표현은 자신이 없어서요.”
“그럼 지금도 기억나는 부분과 추측한 부분을 나눠 전달하세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 무렵 선영에게서 연락이 왔다. 2025년 경고 하향 뒤 다음 단계로 넘어간 문서 중 일부에, 다른 부서가 이미 반송 처리한 항목이 포함돼 있었단다. 그 문서에는 배정우의 이름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반송한 것은 거래 전체가 아니라 ‘확인 근거 부족’이라는 검토 의견이었다.
“그럼 배정우도 문제를 알고 있었을 수 있겠군요.”
“가능성이 있어. 다만 그 문서의 수신이 실제로 확인됐는지는 아직이야.”
나는 ‘배정우가 수사를 돕다가 살해됐다’는 문장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렇게 쓰기에는 사망 원인도, 동기도, 마지막 행적도 모른다. 누군가 그를 죽였다는 사실조차 결론이 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오후 두 시, 박혜림에게서 재취업 상담 결과가 왔다. 새로운 면접 기회가 하나 생겼지만 회사는 이전 경력 증빙의 모든 정정본을 요구했다. 그녀는 두 달 동안 모은 자료를 다시 정리해야 했다.
“아직도 그 일로 시간을 쓰는 게 싫어요.”
“필요한 문서 목록을 같이 정리해 드릴까요?”
“아뇨. 이제 제가 어떤 게 틀렸는지 구별할 수 있어요.”
그녀는 단호했다. 나는 그녀가 마침내 수사에서 벗어나 자기 삶을 결정하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실이 밝혀지는 것과 피해자가 회복하는 것은 다른 시간표로 움직인다.
그날 오후 회사 법무지원 담당자 백이준에게서 공식 설명회 안내가 전달됐다. 참석은 강제되지 않았고, 당사자와 대리인은 자료를 열람한 후 의견을 제출할 수 있었다. 나는 무심코 ‘도움이 되겠네요’라고 적으려다가 멈췄다. 회사가 설명회를 연다고 책임을 인정하는 건 아니었다.
임소율은 안내문을 읽고 나서 말했다.
“그 사람들 설명하는 동안 제가 들었던 손해도 말할 수 있나요?”
“절차에서 허용하는 범위로 의견을 내실 수 있을 겁니다. 필요하면 변호인과 상의하세요.”
그녀는 서류를 접었다. “한 번은 제 이름이 먼저 적혀 있어서 죽을 뻔했고, 이번에는 제 이름이 먼저 적혀 있어서 돈까지 물어내야 할 뻔했네요.”
나는 처음 받은 살인 예고문을 떠올렸다. 피해자 임소율. 용의자 배정우. 참고인 서진혁. 그 문서는 세 사람의 역할을 정해놓고 시작했다. 우리는 한동안 그 역할대로 움직였다.
오후 다섯 시, 정민규가 임소율 신고 관련 정정 통지의 도달 확인서를 가져왔다. 이번에는 수신 담당자 개인의 이름과 확인 날짜까지 확보했다. 예전 같으면 메일을 보냈다는 사실에 만족했을 것이다. 이제 그는 상대가 실제로 받았는지까지 확인했다.
“이러다 정정 확인만 하다 하루가 다 가겠어요.” 내가 농담하자 민규가 진지하게 답했다.
“한 번 덜 확인해서 혜림 씨 일이 어떻게 됐는지 알잖아요.”
나는 웃음을 거뒀다.
오후 다섯 시가 지나자 임소율은 다시 내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다. 회신기한을 착각해서 다음 날까지 의견서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문서에는 영업일 기준으로 표기돼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서둘러 법률 판단을 내리지 않고 안내문에 적힌 기관과 담당자를 다시 확인하라고 했다. 그동안 우리는 기한을 잘못 읽은 사람들이 어떻게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지 수없이 봤다.
“이런 것까지 누군가 일부러 어렵게 만든 걸까요?”
“절차가 복잡한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겁니다. 하지만 그걸 이용해서 누군가 당신을 서두르게 할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믿지 말라는 거예요?”
“아뇨. 확인 가능한 방법을 남겨두자는 겁니다.”
그녀는 안내문 하단에 있던 공식 문의처로 연락해 기한과 제출 형식을 확인했다. 통화 후에는 담당자 성명과 날짜를 적었다. 사소한 행동이었지만 누군가 나중에 ‘당신은 제때 제출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더라도 대응할 근거가 생겼다.
나는 그 과정이 지난 11월의 첫 사건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때 내가 그녀에게 경찰의 보호를 받으라고 했을 때 임소율은 어머니가 쓰러졌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 전화의 출처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보호 장소를 떠났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녀가 스스로 확인했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 도망치던 사람에서 자신의 문서를 지키는 사람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날 저녁 김주하에게서 간단한 메시지가 왔다. ‘계약 심사는 아직 보류예요. 하지만 이번에는 이유를 서면으로 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 말에 기뻤지만 섣불리 축하하지 않았다. 서면으로 이유를 받는다고 계약이 연장되는 건 아니다. 다만 상대가 나중에 말을 바꾸더라도 남는 기록이 생긴다.
박혜림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과거 경력을 증명하느라 자신을 계속 의심하는 시선과 마주해야 했다. 임소율의 기록이 바로잡힌다고 박혜림의 불이익이 자동으로 지워지지는 않는다. 피해는 서로 연결됐지만 회복은 각자 다른 경로를 걸어야 했다.
밤 여덟 시, 오선영에게 질문했다. “선배. 왜 우리는 아직도 이 사람들의 생활에 시간을 쓰고 있습니까? 범인을 찾는 자료만 봐도 모자란데.”
선영은 짧게 대답했다.
“범인을 잡으려는 이유가 그 사람들이 다시 살 수 있게 하려는 거 아니야?”
나는 말문이 막혔다. 한때 나는 사건 해결을 기록 하나로 생각했다. 검거, 송치, 종결. 그런데 그 기록 뒤에 남는 사람들의 시간은 아무 문서도 대신 살아주지 않았다.
그날 저녁, 한유리는 박혜림이 허락한 범위에서 취업 피해를 다루는 기사를 준비했다. 회사 이름과 면접 담당자의 발언을 싣지 않기로 했다. 손해를 증명하자고 또 다른 사람에게 소송 위험을 떠안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밤 열 시, 선영이 한 장의 자료를 전해주었다. 2025년 8월 25일 ‘확인 근거 부족’ 의견을 남긴 검토자에게 시스템이 재확인을 요청한 흔적이었다. 표시된 수신 계정은 배정우 명의였지만, 실제 읽었는지는 미확정이었다.
자료 하단에는 짧은 주석이 있었다.
‘반송 의견은 확인 완료로 대체되지 않는다.’
나는 임소율의 메모를 생각했다. ‘철회 아님.’ 배정우에게 남은 주석을 생각했다. ‘확인 완료가 아님.’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자기에게 떠넘겨진 확인을 거절한다는 말. 그리고 그 말이 기록에서 지워졌을 때, 남는 것은 누군가에게 유리한 ‘완료’ 한 글자였다.
나는 두 문구를 옆에 적었다. 그중 하나를 없애려고 누군가 사람을 죽였다고 할 근거는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 그런 문구가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 했다는 정황은 점점 선명해졌다.
제11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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