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작품, 이어지는 이야기 · 페이루아에서 다음 페이지를 만나보세요
작품으로퇴사했더니 회사가 던전이 됐습니다 · 40화
PAYLUA ORIGINAL · 제40화

회사 밖에 있는 0층

퇴사했더니 회사가 던전이 됐습니다 · 3,646자

오프라인 책장
도원솔루션 18층 복도에 거리 이름이 떴다. 강민재가 보내 온 영상에는 원래 회의실이 있던 자리에 ‘서교동’, ‘을지로’, ‘성하금융센터 뒷길’ 같은 표지판이 떠 있었다. 도원솔루션이 서울 시내 지도 제작사가 된 걸까. 나는 그렇게 물으려다가 참았다. 지도 제작사라면 적어도 길의 소유권을 직원 고용과 혼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거리 이름이 있다는 건 다른 건물로 가는 길을 만든다는 뜻일까요?” 민재가 물었다. “실제 연결됐다고 확인하기 전까지는 표지일 뿐이야. 사람들이 따라가지 않게 해 줘.” 도원 직원들은 이미 실물 계단과 비상 대기 구역을 확보한 상태였다. 민재는 눈높이에 붙여 둔 안내판을 다시 확인하고 직원들에게 영상을 따라 걷지 말라고 알렸다. 그 일은 작은 승리였다. 거대한 화면이 사람을 속이는 밤에도 테이프와 종이로 만든 안내판이 더 믿을 만할 수 있었다. 우리 쪽 집하장에서는 제0 경계의 기록이 하나씩 돌아왔다. 남기석이 찾아낸 옛 수선 일지에는 독립 출구라는 말 대신 [고용 기록 밖의 구조 대기점]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첫 시험은 출근과 퇴사를 기록하기 위한 게 아니라, 회사 출입증이 없더라도 위험을 신고하고 피신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 기능을 공동 운영사가 가져다 쓰면서 문제가 생겼군요.” 서윤이 말했다.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어디서 어떤 변경을 승인했는지는 원본 계약을 확인해야 합니다.” 남기석이 답했다. 나는 그의 말을 적었다. 머릿속에서는 여러 생각이 지나갔다. 업무 연속성을 위해 시범 운영을 승인한 황규태, 0층에 나타난 두 임현규, 17개 건물의 계약을 묶은 미래기록관리협의회. 그중 누가 최초 안전 기능을 출근 관리로 바꿨는지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있었다. 외벽 센서들의 임시 출근 정보 전송을 막고, 각 건물의 실물 비상문과 조명 상태를 담당자들이 확인했다. 도원에서는 문서윤의 수첩에 적힌 기준과 각 시설팀의 기록을 공유했다. 병원 환자 이송은 환자 안전 절차로, 금융센터 퇴실은 시설 대피 절차로, 집하장 퇴근은 실제 사람의 이동 의사로 처리했다. [제0 경계: 신호 수신 가능] [직원 자동 배정: 중단] [외부 통행 대기: 독립 유지] “오늘 성공한 일들을 보면 우리가 굉장한 전문가 같아요.” 배 소장이 말했다. “소장님은 전문가 맞잖아요.” “자네는?” “저는 퇴사한 전문가입니다.” “세상에 제일 무서운 게 퇴사한 전문가라더니.” 우리는 피곤한 얼굴로 잠깐 웃었다. 심각한 날에는 웃는 일이 잘못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서윤은 그 시간을 막지 않았다. 사람들은 충분히 긴장했고, 쉬지 않으면 다음 판단을 틀릴 수도 있었다. 제0 경계 안쪽에는 작은 긴 의자가 하나 있었다. 반짝이는 화면이 아니라 낡은 나무 의자였다. 고윤석이 집에 가기 전에 닦아 두었다고 했다. 서림은 그 의자 옆에 물병을 놓고 떠났다. 건물 어디에도 직원 등록을 하지 않았는데, 많은 사람이 이곳을 함께 쓸 수 있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지난밤의 일을 생각했다. 오후 여섯 시 일 분, 사직서가 승인됐을 때 혼자 비상구를 볼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 문을 따라 혼자 나갔다면 지금 어떻게 됐을까. 직원들, 병원의 환자들, 금융센터의 경비원들은 어땠을까. 그러나 다시 들어온 선택이 무조건 옳았다고 자랑할 마음은 없었다. 나는 여전히 두려웠고, 어떤 순간에는 회사의 일을 또 떠맡고 있다는 느낌에 화가 났다. 남을 도운다는 이유로 자신의 삶을 끝없이 미루어야 한다면 그것도 다른 종류의 강제 출근일 것이다. 서윤이 나란히 앉았다. “지금 그만 쉬어도 돼요.” “상황이 끝나지 않았는데요?” “상황이 안 끝났다는 것과 차도윤 씨가 계속 있어야 한다는 건 다른 얘기예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회사에서는 항상 누군가 남아 있어야 했다. 그래서 주로 내가 남았다. 하지만 지금은 시설 당직자와 구조대, 임시 대기 공간을 돕는 시민들이 교대 절차를 만들고 있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말이 조금씩 틀린 말이 되고 있었다. “한 시간 쉬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서윤이 씩 웃었다. “승인합니다.” “승인권자도 아닌데요?” “그냥 응원이라고 생각하세요.” 우리는 웃으며 일어났다. 휴대전화에는 미래의 내 이름을 단 메시지가 다시 들어와 있었다. 이번에는 경고가 아니라 짧은 질문이었다. [너는 정말 퇴사했니?] 나는 화면을 보다가 답장을 쓰지 않았다. 그 메시지가 진짜 내일의 나에게서 온 건지, 구형 시험이 만들어 낸 문장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질문 자체에는 대답할 수 있었다. “그래. 난 퇴사했어.” 서윤이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회사 메일에 답하는 건 아닙니다. 제 말로 확인한 거죠.” 그때 서지완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미래 출근부 마지막 장을 다시 보여 줬다. 반대로 움직이던 그의 그림자는 실내 조명이 바뀐 뒤에도 똑같이 이상했다. 정체를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오늘은 더 이상 누군가를 자동 입사시키는 오류가 생기지 않았다. “새 문장이 나왔어요.” 지완이 말했다. 나는 영상을 가까이 봤다. [제0 경계 임시 복구 완료] [제0 경계 바깥: 설계자 확인 필요] “설계자라니요. 시설의 최초 설계자를 찾으라는 뜻일까요?” “아직 확인할 수 없습니다.” 내가 말했다. “건물 전체 설계자인지, 0층 통로를 만든 사람인지도 모르니까요.” 그때 이름 없는 아이가 민재를 통해 새 그림을 보냈다. 이번에는 열일곱 개의 문이 아니라, 열린 문 하나와 그 바깥에 서 있는 사람의 뒷모습만 그려져 있었다. 사람의 얼굴은 없었다. 그림 위에는 아이가 직접 쓴 듯한 문장이 있었다. [문을 그린 사람이 문을 만든 건 아니야.] 나는 소리 내어 읽었다. 그 말이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인지 아이의 생각인지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 제0 경계 설계 기록을 찾으라는 시스템의 문장과 묘하게 맞물렸다. “그림 보여 준 걸 고맙다고 전해 줘.” 내가 말했다. “그리고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민재가 대답했다. “알겠어요. 아이는 지금 자겠다고 합니다.” “잘됐네.” 화면이 꺼진 뒤에도 나는 잠시 서 있었다. 건물 바깥의 0층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일부 길에는 여전히 정체 모를 회색 선이 남아 있었고, 공동 운영사의 진짜 책임자는 규명되지 않았다. 하지만 제0 경계에서는 이름 없이도 도움을 청할 수 있었고, 그 신호가 누군가의 강제 출근 승낙으로 쓰이지 않게 막아 냈다. 나는 마지막으로 시설 장부를 확인했다. ‘독립 출구 18’이라는 말은 이제 임시 안내로 남고, 실제 기능은 ‘제0 구조 대기’로 별도 기록됐다. 그 아래 아직 아무도 채우지 않은 항목이 있었다. [제0 경계 최초 설계 회의 참석자: 확인되지 않음] [원본 보관 장소: 도원솔루션 0층, 폐쇄된 회의실] 서윤이 내 옆에서 숨을 골랐다. “그 회의실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아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 회사 0층에는 이미 가짜 사장이 두 명 있었다. 이제 회의실까지 나타난다니. 퇴사한 사람을 꼭 다시 회의에 참석시키려는 집념 하나는 세계 최고였다. “모릅니다.” 나는 말했다. “하지만 다음에 들어간다면 의제부터 확인할 겁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회사 밖의 벤치에 앉았다. 벤치에 앉는 데는 출입증도, 사번도, 미래의 내 허락도 필요하지 않았다.

PAYLUA 소설 본문은 인쇄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제40화 끝

읽은 위치는 이 브라우저에 저장되며 로그인 중에는 계정에도 동기화됩니다.
READER DISCUSSION

제40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해 주세요.로그인회원가입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