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층에서 처음 보는 벽지를 발견했을 때, 나는 우선 색상 코드를 알아보려는 충동을 참았다. 일곱 해 동안 기업 인트라넷 화면을 보수한 인간에게 새로운 벽지는 습관적으로 디자인 변경 요청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번 벽지는 전산으로 고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손전등을 비추면 표면이 매끈해졌고, 빛을 끄면 오래된 강변 대기실의 벽처럼 거칠어졌다.
“가까이 가지 마세요.” 문서윤이 말했다. “새로운 통로라면 실물 안전을 먼저 확인해야 해요.”
우리는 출입 금지선을 새로 긋고, 진동과 온도, 공기 흐름을 따로 측정했다. 빈 문 안쪽에서는 바람이 불지 않았지만 작은 종이 조각 하나가 저절로 접혔다 펴졌다. 마치 누군가 그 종이를 매 순간 다시 그리는 듯했다.
어제 남은 문구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대신 벽 한가운데 작은 패널이 있었다.
`IN-000 / 보관 대상: 미발신 상태`.
`최초 발신 장소: 재검토 필요`.
오재현은 기록을 재검토하자는 데 동의했지만, 패널을 누르거나 내용을 덮어쓸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고 확인했다. 원본 보존의 기본은 지금 보이는 글씨를 가장 오래된 진실이라고 믿지 않는 일이었다.
김하린은 019 공공 기록에서 새 단서를 찾았다. 원래 설비도에는 외부의 019-B 수신함과 안쪽의 IN-000 발신함이 마주 보고 있었다. 그런데 도원으로 옮겨진 뒤 한쪽에 `내부/외부 반전 가능`이라는 작업 메모가 붙었다. 강변에서 바깥이던 방향이 도원에서는 안쪽으로 표시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우리가 계속 안쪽이라고 불렀던 곳이 실제로는 바깥일 수도 있다는 거군요.” 민재가 말했다.
“위치 표시가 뒤집혔을 수 있다는 거지.” 나는 대답했다. “사람이 어디 있었는지까지 뒤집히는 건 아니야.”
민재는 빠르게 수긍했다. 예전의 그라면 화면에 뜬 한 문장을 그대로 결론으로 적었을 것이다. 이제는 장비 방향과 사람의 자리를 따로 확인했다.
우리는 유선영에게 과거 17시 56분의 외부 신고 직전 무엇을 보고 들었는지 다시 물었다. 그는 새로운 증언을 요구받는 대신 자기 기록을 직접 검토하겠다고 했다. 몇 시간 뒤 보내 온 서면에는 짧은 문장 하나가 더 있었다.
`안쪽에서 경고음이 났을 때, 관측 의자에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빈자리 옆 바닥이 이미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그가 못 봤다고 생각했던 순간이었다. 이제 그가 직접 떠올린 범위에서만 추가한 진술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새 단서로 보존하되, 최초 관측자의 이름을 정하는 증거로 사용하지 않았다.
하림도 외부에서 자기 기억을 점검하고 있었다. 그는 `하림`이 옛 시험 호출명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이름을 현재의 호칭으로 쓰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그것을 존중했다. 그는 강변에 가는 대신 안전한 상담 공간에서 당시의 소리만 녹음해 보내 줬다.
두 번의 금속 충돌, 짧은 쉼, 다시 한 번의 충돌. 그 뒤 낮은 여성 목소리로 들리는 짧은 숨소리. 실제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만 오래된 설비가 경고음을 자동으로 재생하는 간격과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사람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17시 53분이라는 숫자를 다시 떠올렸다. 이제 시각과 회차 번호가 겹쳤다는 사실은 알았다. 중요한 건 그 구분이 왜 사라졌는지였다. 최도경이 가져온 오래된 수선 사진에는 원래 표식 옆에 있던 두 칸 중 한 칸이 지워져 있었다. 누군가 설명할 수 없는 사고 뒤에 장부를 정리하면서, 불편한 구분 자체를 없애 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오후에는 두 임현규가 도원 0층 밖에서 다시 만났다. 검은 셔츠의 임현규는 최초 설비 시험 기록에 자신이 참여했을 가능성을 인정했지만, 당시 어느 결재에 서명했는지는 원본 확인 전이라고 했다. 양복의 임현규는 시설 전환 과정에서 ‘원본 관측 상태를 계속 유지하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고 증언했다.
“누가 했습니까?” 내가 물었다.
“기억나지 않습니다.”
나는 화를 내지 않았다. 기억이 없다는 진술도 기록이었다. 대신 두 사람에게 자동으로 하나의 결재자를 만들지 않겠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둘은 각각의 진술을 남긴 뒤 서로 다른 길로 떠났다.
오승필은 0층 등록이 보류됐다는 이유로 손실 산정서를 제출했다. 그는 장래 운영 이익까지 피해액에 포함하려 했다. 오재현은 아직 존재가 확정되지 않은 상업 시설의 예상 이익을 실제 구조 비용과 섞지 말라고 정식 회신했다. 문태수는 오래된 서식 변경 과정에 협조하겠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관여 범위 밖의 결재를 타인에게 떠넘기지 않겠다고 했다. 우리가 대적할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었고, 여기서 모든 책임이 한 번에 해결되는 일도 없었다.
그날 저녁 실물 점검 결과가 나왔다. 강변의 네모 문틀은 더 커지지 않았다. 세림병원 복도는 임시 안전 구획 안에서 안정됐고, 공공 신고 회선은 인사 서버와 분리된 채 작동했다. 공간 변형을 완전히 끝낸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오늘 하루 실제 길로 퇴근할 수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하진은 내게 메시지를 보냈다. `저도 오늘은 집에 가겠습니다. 어디가 집인지는 제가 정하겠습니다.` 나는 짧게 답했다. `그래. 내 이름 말고 네 이름으로.`
혼자 남은 나는 전당포나 사무실이 아니라 편의점 앞의 낡은 의자에 앉았다. 도원솔루션에 있던 시절에는 업무가 끝난 뒤에도 새 장애가 뜨면 내 전화부터 울렸다. 지금도 전화는 울렸지만, 적어도 누구의 안전을 위해 응답하고 있는지는 스스로 고를 수 있었다.
그때 서윤에게서 마지막 통화가 왔다. “도윤 씨, IN-000 원문을 열 수 있게 된 건 아닙니다. 다만 외부 검수 기록과 두 발신 위치를 비교한 결과가 나왔어요.”
“어떤 결과요?”
“원본에서 `IN`은 실내가 아니었어요. **중계가 끝나지 않은 방향**을 가리켰습니다. 밖과 안이 정해지기 전에 경고를 임시로 보관한 자리였던 거예요.”
나는 일어나 도원으로 향하지 않았다. 대신 보안 화면을 열어 서윤이 읽어 준 공개 가능한 부분만 확인했다.
`IN-000 / 최초 미발신 신고`.
`실제 사람의 음성 여부: 확인 전`.
`원래 용도: 어느 쪽도 수신 완료를 말할 수 없을 때 남기는 안전 신호`.
`현장 재구성 금지 조건: 관측 대상의 현재 위치가 확인되지 않은 경우`.
마지막 문장은 그동안 봤던 기록 중 가장 중요했다. 관측 대상의 현재 위치를 모른다면 옛 공간을 불러오지 말아야 했다. 그런데 누군가 그 금지 조건을 제거하고, 비어 있는 위치를 과거 사진으로 계속 채워 왔던 것이다.
우리가 마주한 0층의 정체를 모두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제 공간 중첩을 멈추기 위해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지에 관한 방향은 생겼다. 출입 기록이나 직원 이름이 아니라, **실제 사람이 현재 어디에 있는지**와 그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길이었다.
그런데 0층의 외부 화면 한구석에서 새로운 창이 열렸다. 누군가 오래된 보존 금지 조건을 다시 해제하려고 했다.
`원본 관측 대상: 아직 위치를 확인하지 못한 사람 1명`.
`관측 기록 재생 요청자: 현재 도원솔루션 승인권자 아님`.
`최종 승인 대기: 019 최초 원본 보관자`.
그 아래에는 얼굴도 서명도 없는 카드가 떠 있었다.
**`복원할 대상은 사람인가, 사람이 있었던 공간인가?`**
선택지는 두 개뿐이었다. 나는 둘 중 아무것도 누르지 않았다. 대신 서윤에게 연락했다.
“우리가 이 질문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다시 누군가를 위험에 빠뜨릴 거예요.”
“그럼 다음엔 뭘 해야 하죠?”
“질문을 바꿔야죠. **그 사람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직접 확인할 방법부터 찾읍시다.**”
내일은 원본 보관자의 행방을 찾아야 했다. 오늘은 일단 내가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먼저였다. 퇴사 후 처음으로, 그 선택을 누군가의 허락 없이 내릴 수 있었다.
제160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