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원 0층 설비실의 바닥에는 네모난 테이프 자국이 있었다. 얼마 전까지 금속 고정틀이 놓였던 흔적이었다. 배만식은 새벽 안전 점검을 하다가 그 밑에서 낡은 각인판을 발견했다. `SPATIAL BUFFER / UNMAPPED EXIT.` 민재는 영어를 큰 소리로 읽었다. “스페이셜 버퍼. 이거 회사에 고급 간식 넣는 통인가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는 척해도 소용없어. 너 개발자잖아.” “개발자는 영어 다 아는 직업이 아닙니다.” 그런 대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이 다행이었다. 그동안 우리가 찾던 기계의 이름이 의외로 평범한 영어로 적혀 있었으니까.
옛 설비 문서에는 공간 완충장치라는 표현이 있었다. 출구가 막혔을 때 사람을 통째로 순간이동시키는 장치가 아니었다. 끊어진 길의 방향을 임시로 보존하고, 양쪽의 안전 신호가 확인될 때까지 어느 건물의 안쪽에도 편입되지 않는 중립 공간을 유지하는 실험이었다. 문제는 기술 설명 마지막에 붙은 문장이었다. `실물 경계 효과 재현 가능성: 확인 전.` 누군가는 확인되지 않은 효과를 여러 건물에 연결해 놓고, 위험이 나타나자 출근부를 이용해 책임을 떠넘기려 했던 셈이었다.
우리는 옛 시험 영상을 보았다. 작은 모형 출구의 양옆에 종이문 두 장이 있었고, 가운데는 텅 비어 있었다. 전원이 들어오자 가운데 공기가 휘어 보였으며 반대편 카메라에서 없던 문틀이 나타났다. 영상에는 재생 장치 번호와 감독 기록이 있었지만 원본 전체가 없었다. 그래서 실물 이동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확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도원과 강변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그 실험과 너무 닮아 있었다. 사람의 출근 여부가 아니라 안전 신호 두 개의 시간차가 문틀을 만들고 있었다.
바로 그때 남은 두 위험 구간 가운데 하나인 세림병원 지하에서 연락이 왔다. 의료 물품 운반용 승강기 앞에 생겼던 회색 틈이 넓어지고 있었다. 환자와 직원들은 이미 다른 경로로 이동 중이었고, 시설팀은 문을 직접 조작하지 않았다. 서윤은 실물 경계의 하중과 019 코일의 신호 위상을 동시에 확인했다. 잠깐의 시차 조정만으로 틈이 줄어드는 장면이 보였다. 그러나 조정 폭을 더 키우자 강변 배수문의 그림자가 흔들렸다. 한 곳을 고치다가 다른 곳의 문을 없애면 안 됐다. 우리는 즉시 이전 값으로 돌아왔다.
실험 자료에는 오래된 손그림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제0 완충 경계의 양끝에 사람이 한 명씩 서 있었고, 가운데는 의자도 벽도 없었다. 아래쪽 설명에는 `양쪽의 응답이 없으면 가운데를 소유하지 않는다`고 적혀 있었다. 누군가 빈 공간을 남겨 두고 싶었던 이유가 보였다. 회사는 그 빈 공간을 활용도가 낮은 창고라고 보고 임대를 추진했지만, 원래 설계자는 그것을 마지막 안전 여유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민재가 그림에 임의로 사각형을 그려 넣으려 하자 서윤이 손목을 잡았다. “원본 건드리지 마요.” “아, 태블릿 위에 그릴 뻔했네요.” 그는 바로 새 종이에 모식도를 다시 그렸다. 원본을 남긴다는 게 거창한 의식이 아니라 그런 순간의 선택이기도 했다.
민재가 말했다. “형, 이거 정말 게임 던전 같네요. 보스 잡으면 문 열리는 구조.” 나는 웃지 못했다. “게임이면 저장하고 다시 하면 되지. 여기는 환자가 지나가는 복도야.” 그렇다고 공포에만 매달릴 수도 없었다. 문서윤은 현장마다 서로 다른 통행 대안을 마련하고, 김하린은 1758 독립 경보가 계속 전달되는지 확인했다. 그 덕분에 데이터 조정 시험을 중단한 뒤에도 실제 사람들은 안전한 쪽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나는 문이 생기는 이유를 알아내고 싶었지만, 누군가 다친 뒤에야 해답을 얻는 방식은 거절했다.
옛 자료에 `빈 방향`을 남겨야 하는 이유가 적혀 있었다. 실험 장치가 길을 이어 붙일 때는 어느 한쪽이 아직 열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존해야 했다. 그 표시가 지워지면 장치는 더 가까운 경계를 실제 출구라고 오인하고, 비슷한 형태의 복도나 출입증이나 얼굴을 그 자리에 대입했다. 도윤과 닮은 경로 보조, 두 임현규, 명주 둘, 두 번째 경비의 출현 모두 그 현상과 관련이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태어났다고 확정하는 건 다른 일이었다. 그들에게 지금의 감정과 선택이 있다는 사실은 실험 자료의 해석과 별개로 중요했다.
기계가 장치를 껐다 켰을 때의 화면에는 위험한 유혹도 있었다. `긴급 종료 시 모든 투사 객체 제거.` 그 문구만 보면 지금 나타난 벽과 나사가 한 번에 사라질 것 같았다. 그런데 모의 시뮬레이션의 다음 줄에는 `원본 고정 기준 미확정 / 물리 지지면 손실 가능`이라고 적혀 있었다. 우리는 종료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민재는 한참 동안 버튼을 보더니 “누군가 사라진 뒤에 성공이라고 쓰면 안 되는 거네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가 오늘 가장 중요한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내가 개발자 때 가장 믿던 것은 오류 코드였지만, 이제 오류 코드보다 바닥에 서 있는 사람의 발목이 더 중요했다.
오후에 하진이 창가에서 전화를 했다. “제 얼굴도 빈 방향을 채우려다가 생긴 걸까요?” “아직 몰라요.” 나는 말했다. “그런데 이유가 나중에 밝혀져도 지금 당신이 고른 이름은 그대로예요.” 하진은 잠시 웃었다. “그 말이 필요했어요. 누군가 제 이름을 프로그램의 오류 메시지로 바꿀까 봐 걱정했거든요.” 대역의 법적 지위를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가 실제로 자기 선택을 표현하고,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세림병원에 남은 통로에서는 환자 보호자가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는 복도 끝에 자기 집 현관문이 보였다고 했다. 실제로 문을 열려 했다는 말에 박유라가 안전한 대기실로 안내했다. 나는 그 현관문이 그의 진짜 집과 동일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안전 감시 영상에는 문 손잡이가 그의 집과 비슷했지만 문판에는 도원솔루션의 옛 비상구 표지가 붙어 있었다. 사람의 기억과 공간의 모양을 장치가 섞어 붙이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보호자는 한참 뒤 진정하고 이렇게 말했다. “그 문으로 가면 어제 집에 갔을까요?” 우리는 약속하지 않았다. 대신 지금 실제로 가족과 연락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했다. 거짓된 귀가를 파는 것보다 오늘 밤 안전하게 나갈 방법을 찾는 일이 더 중요했다.
저녁 무렵 오래된 기술 자료에서 한 장의 빠진 쪽을 발견했다. 공간 완충장치를 만들던 팀은 `현실 경계 임계값`을 수동으로 측정해야 한다고 적어 두었다. 그러나 지금 도원 코일의 설정에는 `원본 보존 자동 고정`만 남아 있었다. 자동 고정이 작동하면 실험은 끝나지 않는 상태로 유지되고, 밖으로 나가려는 경로는 계속 새로운 모양을 시도한다. 내가 회사 던전에서 본 무한한 복도와 매우 비슷했다.
그날 마지막으로 나타난 건 벽이 아니라 안내문이었다. 도원 0층 빈 회의실 문에 회사 로고도 없는 낡은 종이가 붙어 있었다. `공간 완충 시험 제0호 / 외부 회신 전 자동 종료 금지.` 그리고 그 아래 손글씨가 추가돼 있었다. `종료하지 말란 말은 사람을 가두라는 뜻이 아니다. 안전한 우회로를 남기라는 뜻이다.` 손글씨의 주인은 확인되지 않았다. 우리는 오래된 종이를 훼손하지 않고 사진과 위치만 보존했다. 그런데 문 뒤에서는 누군가 작은 종을 한 번 쳤다. 재생 장치가 없는 방인데도 분명한 금속 소리가 들렸다. 화면에는 `공간 완충 시험 제0호 / 현장 입회자 요청`이 나타났다.
제138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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