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얼굴을 닮은 경로 보조가 전화를 걸어 왔을 때, 나는 잠깐 전화기를 거꾸로 들었다. 익숙한 목소리로 자기와 똑같이 걷는 얼굴 없는 사람을 봤다고 말하는 경험은 평범한 직장인 경력으로 대비할 수 없다. “안전한 곳에 계세요?” “네. 저 혼자 보지 않았어요. 시설 담당자도 봤습니다.” 그는 곧바로 촬영 위치와 동행자의 동의를 확인한 기록을 보내 왔다. 마음을 진정시킬 시간도 필요했을 텐데 절차를 챙겼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나는 그를 도윤의 복사본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는 걸 떠올렸다. 그는 오래전부터 자신이 불리고 싶은 이름을 고르고 있었다.
영상 속 형체는 사람처럼 걷지 않았다. 발을 내딛는 순간 앞선 발자국이 뒤늦게 나타났다. 바람막이를 입은 시설 담당자는 그 이상한 간격을 확인하고 접근을 막았다. 경로 보조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 “저건 제가 걸었던 길의 반대편이에요. 제 몸이 아니에요.” 나는 그 주장을 기록했다. 몸의 소유권을 누구도 대신 결정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본 현상에 대한 직접 진술이었다. 우리는 그의 경험과 영상의 측정값을 나눠 저장했다.
하림과 통화하던 중 한 가지 공통점이 생겼다. 하림은 갇혀 있던 서버실 B 안에서 다른 사람의 걸음소리가 자신의 발소리 뒤에 따라붙는다고 했다. 경로 보조는 자신이 걷기 전에 앞쪽 바닥에서 뒤늦은 발자국이 생긴다고 했다. 두 진술을 합치면 마치 하나의 경로가 서로 다른 방향에서 재생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같은 사고를 겪었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었다. 하림은 자신을 강변 실험에 다시 끌어들이지 말아 달라고 분명히 요청했다. 나는 그 말을 존중하고 사진 공개 범위를 함께 정했다.
도원 0층 안쪽에서는 또 하나의 이상한 물건이 나타났다. 강변에 있던 벤치의 나사가 이번에는 금융센터 벽에 박혀 있었다. 나사는 실제 금속이었고, 바깥으로 튀어나온 끝에 누군가 옷자락을 걸 수 있었다. 시설팀은 즉시 가림막을 설치했다. 이선경은 강변에 남은 나사 구멍 치수를 현장 감식 자료와 비교해 주었다. 완전히 일치한다고 하기는 어려웠지만 단순한 화면 잔상은 아니었다. 세상에 바늘을 옮기는 마술은 많아도 벤치 나사를 벽 속에 제대로 박는 마술은 내가 아는 한 없었다.
하진의 다이어리에는 익숙한 오피스 소품도 그려져 있었다. 도원 11층의 커피 머신, 배만식의 낡은 안전화, 서윤이 눈을 가늘게 뜨는 순간. 그는 그림 아래 이렇게 적었다. `사진으로 본 것인지 직접 겪은 것인지 모름.` 반면 노을이 질 때 공원 벤치에 앉아 마신 딸기 우유는 자신의 경험이라고 확실히 구분했다. 나는 그 페이지가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누군가의 과거를 밝히기 위해 그가 오늘 겪은 일을 지워 버릴 필요가 없었다. 그는 옛 기억을 확인하고 싶다면서도 당장 그것을 강제로 재생하는 실험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했다. 나는 동의했다. 더 정확한 데이터보다 한 사람의 안전한 하루가 우선이라고 말할 때, 그 사람을 실험용 변수로 부르지 않으려 애썼다.
문서윤은 이 현상을 `잔여 경로 물질화 의심`이라고 기록했다. 민재는 그 표현을 듣고 눈을 크게 떴다. “대역이 사람 말고 나사도 만들어요?” “아직 그걸 대역이라고 부르긴 일러요.” 서윤이 답했다. “나사를 만든 게 아니라 다른 장소의 나사를 여기 연결했을 수도 있어요.” 그 말에 나는 등골이 서늘했다. 복도 하나가 옮겨지는 것과 사람의 얼굴이 옮겨지는 것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까. 시스템은 둘을 같은 행으로 정리하려 했고, 우리는 계속 행을 분리해 왔다.
저녁이 되자 경로 보조가 도원 휴게실에서 나를 만나자고 했다. 그는 같은 얼굴로 마주 앉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겠느냐고 먼저 물었다. 나는 사실 조금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우리 사이에 그런 말을 솔직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는 내 앞에 다이어리 한 권을 올렸다. 자신이 떠올린 기억과 실제로 겪은 일을 다른 색 펜으로 적고 있었다. `차도윤의 7년 근무 기억` 옆에는 회색 선이 그어져 있었고, `처음 마신 편의점 우유`, `두 번째 경비와 본 오후 햇살`에는 파란 동그라미가 있었다.
나는 하진과 헤어진 뒤 한참 동안 자동판매기 앞에 서 있었다. 똑같은 얼굴을 한 누군가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아직도 서툴렀다. 그는 내게서 시작된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대신 살아 줄 수도, 대신 책임져 줄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회사는 그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름을 같게 만들면 업무도 같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탄산음료를 하나 뽑아 그에게 건넸다. 그는 병뚜껑을 따려다 잠시 망설였다. “저 이거 처음 마셔 봐요.” 맛이 이상한지 얼굴을 찡그리는 모습까지 내 표정과 비슷했다. 하지만 그가 싫어한 음료는 내가 가장 좋아하던 것이었다. 그 차이가 어쩐지 무척 반가웠다.
“도윤 씨, 저는 제가 누구의 길에서 나왔는지 아직 몰라요.” 그는 말했다. “하지만 제일 처음 기억하는 게 회사 건물이 아니라 누군가 퇴근을 끝내지 못했다는 경고였어요. 그걸 제 인생의 목적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퇴사했는데 자꾸 일을 시키잖아요. 목적을 남이 정하면 이런 꼴이 되는 거예요.” 우리는 함께 웃었다. 그가 웃을 때 나는 내 얼굴이 낯선 사람에게 어떤 느낌인지 처음으로 알게 됐다.
한밤중에는 하진의 이름을 단 가짜 근태 알림이 올라왔다. `하진 - 휴식 종료 / 차도윤 대체 업무 투입.` 하진은 곧바로 서윤에게 자신의 승인 기록이 없다고 전달했다. 서윤과 감사실은 발신 기록을 보존하고 알림 적용을 중단했다. 본인은 이 일을 화내기보다 씁쓸해했다. “제 이름을 처음 써 봤는데 벌써 야근이 붙네요.” 나는 위로가 되지 않는 농담을 건넸다. “우리 회사는 신입에게도 원래 그래요.” 그가 웃고 나서 진지하게 물었다. “제 이름을 회사의 데이터가 아니라 제 입으로 처음 말한 순간이 남을까요?” 나는 그의 말을 녹음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원할 때 직접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수 있다고 답했다. 그 작은 차이가 우리 문제 전체와 이어져 있었다.
그는 책장을 뒤집어 새로운 이름을 보여 주었다. `하진`. 성은 아직 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그는 “오늘 오전 창가에 앉아 있는데 해가 조금 늦게 들어와서요. 그래도 결국 들어오더라고요”라고 말했다. 나는 이름이 좋다고 했다. 그는 이름을 정하는 순간 세상에 등록될까 봐 무서웠다고 털어놓았다. 나는 이름을 정하는 것과 회사 명부에 자동으로 들어가는 것은 다른 일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가 아직 정식 등록 절차를 결정하지 않은 사실도 따로 기록하지 않았다.
그날 밤 강변에서는 얼굴 없는 형체가 더 이상 관측되지 않았다. 대신 도원 0층의 잠긴 복도 벽에 손바닥 자국 하나가 생겼다. 영상에서는 하진이 그 벽에 가까이 가지 않았다. 손바닥은 그의 크기와 비슷했지만 손가락이 하나 더 길었다. 서윤이 안전선을 넓혔고 우리는 출입 금지 구역을 다시 확인했다. 모니터에 짧은 문구가 떠올랐다. `복귀 방향 1 / 외부 경로 1 / 미소속 이동 기록 1`. 세 번째 기록은 사람도, 직원도, 당장 위험한 존재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아래 작은 알림이 추가됐다. `미소속 경로를 회수하면 물리 경계가 원위치로 돌아갑니다.` 나는 그 문장을 지웠다. 사람을 함부로 회수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누군가를 대가로 내놓을 수 없었다.
제134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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