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지 말아 주세요.’
그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겁이 났다. 누군가가 도와 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 사람은 문을 열지 말라고 했다. 문을 여는 일이 내 역할이라고 믿어 온 사람에게 그 말은 꽤 어려운 부탁이었다.
그렇지만 어려운 부탁이라고 해서 무시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다음 날 오전 회의에서 미확인 주체의 문장을 그대로 읽었다. 이름을 모른다는 사실도, 경로 09에 연결돼 있다는 사실도 설명했다. 하지만 ‘한정호가 틀림없다’는 식의 추측은 붙이지 않았다.
남 형사가 말했다.
“정식 신원 확인 없이 문을 열지 않는 데는 동의합니다. 다만 누군가가 그 문장을 대신 보냈을 가능성도 검토해야 합니다.”
“맞아요.” 서아가 대답했다. “발신 경로가 당사자 확인용이라고 해도, 구태형이 부속 규정을 고쳐 놓았잖아요. 그 창이 정말 보호되는지 검증해야 해요.”
우리는 세 갈래 증거를 모으기로 했다. 문장을 보낸 순간의 장비 상태, 그 문장이 도착한 독립된 기록, 그리고 그 주체가 다시 말할 수 있는지 여부. 같은 서버가 만든 세 개의 사본이라면 독립된 증거라고 부를 수 없다는 점도 확인했다.
아직 부족했다.
그러나 오늘 해결해야 할 더 시급한 일이 있었다. 퇴근망 시범 사업장이 점점 늘고 있었다. 일부는 공식 중지 요청을 받아들였지만, 다른 곳에서는 직원들이 자기 기록이 바뀌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나는 권수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산 직원들 중 본인 기록을 확인해 보신 분이 얼마나 돼요?”
“스물여덟 명이요. 전부 저희가 부탁한 건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직접 확인한 분들도 있어요.”
“자료를 받아 주실 수 있겠어요?”
“전부 모아서 보내 드리면 되나요?”
“아니요. 원하지 않는 사람 자료는 받지 마세요. 근무 내용과 기억 이야기는 민감하니까요. 각자 본인 기록을 보관할 수 있도록 안내문부터 만들죠.”
수진은 잠시 조용했다가 말했다.
“다들 누군가 대신 해결해 주기만 기다리고 있었어요. 자기 기록을 자기 손에 쥘 수 있다면 좋겠네요.”
우리는 현장용 한 장짜리 안내를 만들었다. 본인이 확인할 수 있는 출퇴근 자료를 안전하게 보존할 것. 전자 기록이 이상하면 종이 근무표나 동료의 진술처럼 독립된 자료를 함께 확인할 것. 기억 보관에 동의하지 않았다면 그 사실을 남길 것. 건강 이상이 있으면 관련 기관의 도움을 받을 것. 그리고 누구도 개인정보나 사진을 단체 채팅방에 무단 공개하지 말 것.
아주 평범한 내용이었다. 초능력과 기억 보관국을 설명하는 문장은 없었다. 그런 문장을 넣었다면 사람들은 안내문을 읽기도 전에 장난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대전의 박도윤도 동료들과 상의해 수기 기록을 준비했다. 그는 원래 사내 전산 시스템을 불신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현장 설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자동 기록이 없으면 밤샘 작업의 피로가 더 커진다는 사실도 알았다.
“기계를 없애자는 게 아닙니다.” 그가 말했다. “잘못 기록됐으면 고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나는 그 말을 회의록 첫 줄에 적었다.
수진은 안내문을 회람하기 전에 직원 대표 몇 사람에게 먼저 읽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중 한 사람은 휴대전화 화면을 잘 다루지 못하는 고령 직원이었고, 다른 사람은 한국어 안내가 어려운 외국인 노동자였다. 같은 글씨를 보여 주더라도 모든 사람이 같은 속도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용어가 너무 어렵네요.” 직원이 말했다. “잔여 근무 감각이라는 게 대체 뭔데요?”
수진은 그 말을 그대로 내게 전했다. 나는 안내문에서 그 표현을 지웠다. 대신 ‘퇴근 버튼과 별개로 기억이나 개인 기록을 보관한다는 설명을 들은 적이 있는지 확인하세요’라고 고쳤다.
또 다른 직원은 이런 질문을 했다.
“기록을 모으다가 회사에서 문제 삼으면요?”
나는 대답을 멈췄다. 내가 그 사람의 회사 생활을 대신 책임질 수는 없었다. 우리는 본인 기록과 정식 문의 방법을 구분해 안내하고, 공개되지 않아야 할 개인정보를 지키도록 문장을 보완했다. 남 형사는 신고 과정에서 어떤 자료가 필요한지 별도로 설명했다.
안내문은 거듭 고쳐졌다. 처음에는 한 장이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마지막에는 큰 글씨의 짧은 버전과 자세한 설명을 담은 버전이 따로 생겼다. 현장에서는 바로 읽을 수 있는 문장이 필요했다.
그날 저녁 수진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사람들이 이제야 자기가 뭘 물어봐도 되는지 알겠대요.”
“뭐라고 물었는데요?”
“제일 많이 나온 건 이거예요. ‘동의 안 하면 오늘 퇴근 못 하나요?’”
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좋은 서비스를 만들었다면 제일 먼저 답해야 할 질문이었다. 그런데 이 시스템은 마지막까지 그 대답을 숨기고 있었다.
“퇴근은 기억 보관 동의와 다른 일이라고 꼭 적어 주세요.”
“이미 제일 위에 적었어요.”
수진의 목소리에는 작지만 분명한 자신감이 담겨 있었다.
그날 오후, 한시우가 가져온 시험 장치로 ‘본인 거부’ 기능의 표시 방식을 비교했다. 관리자용 화면에는 거부 버튼이 숨겨져 있었고 직원용 화면에는 아예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는 안전한 시험 환경에서 그 기능을 활성화한 뒤 다음 조건을 점검했다.
거부해도 근무 시간은 유지되는가. 급여 기록을 삭제하지 않는가. 그 사람의 기억을 다른 사람에게 청구하지 않는가. 다시 동의할 때마다 원래 내용을 읽을 수 있는가.
첫 시험은 실패했다. 거부는 받아들였지만 퇴근 처리가 취소되면서 초과 근무 시간이 0이 됐다.
“이건 거부권이 아니라 벌칙이잖아.” 유나가 말했다.
두 번째 시험은 다른 부분에서 실패했다. 본인이 거부하자 장치가 팀장의 계정으로 대리 승인 요청을 보냈다. 팀장이 모르는 상태에서 ‘기한 경과 승인’이 붙는 구조였다.
“정말 집요하네요.” 내가 중얼거렸다.
세 번째 시험에서야 직원의 거부와 근태 확인을 분리하는 방법을 찾았다. 원래 프로그램의 거부 키 0,1,1을 연결한 뒤, 퇴근 확인은 그대로 두고 기억 보관 동의만 ‘거부’로 남길 수 있었다. 팀장의 대리 승인도 생성되지 않았다.
모의 장치에 녹색 불이 켜졌다.
[근태 기록 유지.]
[기억 정산: 거부.]
[대리 승인: 금지.]
나는 손바닥을 폈다. 이번에는 무언가를 빼앗아 온 기분이 아니었다. 원래 사람에게 있었어야 할 선택지를 다시 보이게 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한시우는 곧바로 전국 배포를 제안하지 않았다.
“시험 장치와 실제 장비는 다릅니다. 다른 버전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오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 현장에서 사용할 사람들의 설명도 필요합니다.”
남 형사는 자료 보존 및 감독 절차를 논의하겠다고 했다. 안전한 순서를 만드는 일은 중요했지만, 그 순서를 아무에게나 강제로 적용할 권한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모의 시험에서 거부권이 작동했다는 소식은 현장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그렇다고 내일 바로 모든 장비가 안전해진 것은 아니었다. 다른 버전에는 같은 숨은 규칙이 없을 수도 있고, 중앙 서버가 거부를 무시하도록 구성돼 있을 수도 있었다.
강문석은 작은 흰 종이에 시험 결과를 적었다.
‘모의 계정에서만 확인. 실 사용자 동의 및 현장 안전 확인 전 배포 금지.’
그 종이를 보며 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성공 화면을 캡처해 팀 채팅방에 올리고 끝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성공 범위를 분명히 적는 사람이 더 믿음직스러웠다.
서아가 말했다.
“아직 미확인 주체의 거절이 남아 있어. 이 사람은 외부 보행 시험을 신청한 아이와 다른 사람일 수도 있어.”
“알아요.”
“어쩌면 예전에 누군가 그 사람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가 큰일이 났을 수도 있고.”
“그것도 가능성이죠. 확실한 건 지금 문을 열지 말라고 했다는 사실뿐이에요.”
유나가 따뜻한 차를 가져왔다. 우리는 말을 멈추고 각자 종이컵을 잡았다. 종이 위에는 아직 낯선 이름과 숫자들이 많았다. 그래도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버튼을 누르는 사람이 적어도 셋은 더 생겼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문득 어린 시우가 처음 밖에 나와 자신의 발자국을 보고 웃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아이는 나가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에 나왔다. 지금의 열네 번째 사람은 나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두 사람에게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공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날 밤, 경로 09에 다시 한 문장만 보냈다.
‘문을 열지 않겠습니다. 대신 지금 있는 곳이 위험한지 알고 싶습니다.’
답은 오래 걸렸다.
‘내 쪽보다 밖에 있는 열세 사람이 먼저 위험합니다.’
처음 온 답은 짧았지만 그 무게를 무시할 수 없었다. 밖에 있는 열세 사람이 먼저 위험하다는 말은, 이 사람이 자기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거나 적어도 그렇게 믿고 있다는 뜻이었다. 우리는 어느 쪽인지 확인하지 못했다.
나는 질문을 한 번 더 쓰려다 손을 멈췄다. 서기관은 하루에 허용되는 확인 질문은 하나뿐이라고 했다. 오늘 우리가 쓸 수 있는 기회는 이미 사용했다. 질문을 더 보내려면 누군가 다른 사람의 권한을 빌리거나 규칙을 바꿔야 했다.
그런 선택은 하지 않았다. 대신 이 답변이 의미하는 최소한의 사실만 적었다. ‘미기명 주체가 외부 열세 사람을 먼저 보호해 달라고 요청함.’ 그 사람의 이름, 나이, 과거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불완전한 답을 완전한 증명처럼 취급하지 않는 것도 존중이었다.
곧이어 두 번째 문장이 나타났다.
‘문 앞에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내가 남긴 서명을 쓴 사람입니다.’
나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문 너머의 사람은 이름을 알려 주지 않았다. 그런 대답도 받아들여야 했다. 그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아직 몰랐지만, 모른다는 사실이 허락 없이 문을 열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나는 오늘 받은 두 문장을 내 수첩뿐 아니라 서기관의 별도 기록에도 남겼다. 언젠가 당사자가 그 기록을 확인하고 싶다면, 자신이 실제로 한 말과 남이 대신 붙인 말을 구별할 수 있어야 했다.
서아는 조용히 기록을 읽더니 마지막 줄 아래에 공백을 하나 남겼다. 나는 왜 빈칸을 두느냐고 묻지 않았다. 나중에 그 사람이 직접 하고 싶은 말을 쓸 자리였다.
누군가가 한 사람의 이름만 훔친 것이 아니었다. 오래된 거부의 기록을 승인처럼 바꾸어 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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