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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사라질 사람의 이름이 보인다 · 200화
PAYLUA ORIGINAL · 제200화

200화. 이름이 남아 있는 세계

사라질 사람의 이름이 보인다 · 2,712자

오프라인 책장
봄이 왔다. 서람시의 오래된 대피소는 철거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영웅 기념관이 되지도 않았다. 시는 시민들과 유족의 의견을 받아 안전 보강을 마친 일부 공간만 기록 교육 장소로 남겼다. 이름을 공개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자리는 빈칸으로 보존되었다. 그 빈칸에는 삭제 표시 대신 작은 문장이 적혔다. ‘본인의 선택을 기다리는 자리.’ 열세 번째 의자는 그곳에 놓이지 않았다. 정민서는 누군가 자신을 또다시 전시된 아이로 기억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의자는 수장고에 보관됐고, 설명에는 그 의자가 한 사람의 소유물이라기보다 기다림을 위한 임시 자리였다는 사실만 남았다. 그날 기록실 개관식에는 많은 사람이 오지 않았다. 병원 야간 청소원 임미정은 쉬는 날을 맞춰 찾아왔고, 기억관의 서유림이라는 이름으로 한동안 알려졌던 여은은 자신이 고른 현재 이름으로 방명록에 서명했다. 윤소라는 작은 녹음기를 가져와 아이들에게 오래된 소리와 현재의 목소리를 구분하는 법을 가르쳤다. 오윤정은 아버지의 명찰 복제본을 전시 담당자에게 건넸다. 원본은 가족의 동의에 따라 별도 보존 중이었다. 복제본 아래에는 한 문장이 있었다. ‘누군가 남았다면, 완료하지 않는다.’ 한지수는 조금 늦게 도착했다. 검은 모자를 쓰고 있었지만 얼굴을 숨기려는 몸짓은 없었다. 그녀는 그날의 수첩을 들고 오지 않았다. 대신 손에 작은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오늘은 그냥 구경하러 왔어요.” 지수가 말했다. “좋네요.” 현우가 웃었다. “오늘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지수는 오세준의 기록 앞에 꽃 한 송이를 놓았다. 잠시 고개를 숙였지만 울지는 않았다.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일은 반드시 슬픔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현우는 여은과 함께 복도 끝의 문 앞에 섰다. 스무 해 전에는 열릴 수 있을지조차 몰랐던 문이었다. 지금은 점검을 거친 뒤 안전한 시간에만 열도록 관리되고 있었다. 문에는 전자 자물쇠와 함께 사람이 직접 돌릴 수 있는 손잡이가 있었다. “당신은 요즘에도 이름이 보이나요?” 여은이 물었다. “가끔요.” “붉게요?” “그럴 때도 있고요. 그런데 예전처럼 그 숫자만 보고 뛰지는 않아요.” 여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래요. 어떤 날은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가끔 다시 보이면, 먼저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적어요. 그리고 당사자에게 물어요.” 현우는 오랜 시간 붙들고 있던 질문을 떠올렸다. 붉은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 처음부터 세상에 있던 경고였을까, 사람이 만든 기록에 얽혀 나타난 이상 현상이었을까. 백도윤의 수첩은 컴퓨터가 연결되기 전에도 붉은 이름이 보였다고 증언했고, 여은이 어린 시절 남긴 종이 역시 사고 이전의 시간을 가리켰다. 동시에 두 사람의 관찰은 모두 기억과 시각에 의존했다. 원인을 밝힐 결정적인 증거는 없었다. 다만 현우는 자신에게 그 글씨가 무엇을 요구하는지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숫자가 어떤 결말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아직 누군가의 대답을 들어야 한다고 알려 주는 것. 때로는 그 대답이 구조를 청하는 소리였고, 때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겠다는 선택이었다. “모든 붉은 이름이 사라지면 좋겠어요.” 여은이 말했다. “그러게요. 하지만 꼭 그래야만 우리가 사람들을 볼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복도 반대편에서 아이들이 시끄럽게 웃었다. 학교 견학을 온 학생들이었다. 한 아이가 안전 안내 표지판의 빈칸을 가리키며 선생님에게 물었다. “여기는 왜 이름을 안 써요?” 선생님이 설명하기 전에 지수가 아이 곁에 앉았다. “누가 대신 정하면 안 되는 이름도 있거든. 말하고 싶은 날에 말할 수 있게 남겨 둔 거야.”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방명록으로 달려갔다. 자기 이름을 동그랗게 적고, 마지막 글자에 작은 별을 붙였다. 그날 오후 현우는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랐다. 창밖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스무 해 전의 비와는 다른, 햇빛이 비치는 봄비였다. 휴대전화에는 가은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열두 지역의 자동 대리 승인은 모두 폐기됐습니다. 남은 개별 복구는 계속 진행 중입니다. 오늘은 쉬세요.’ 현우는 짧게 답장을 보냈다. ‘네. 고생하셨습니다.’ 버스가 신호등 앞에 멈췄다. 건너편 정류장에서 한 노인이 서류 봉투를 떨어뜨렸다. 바람에 종이가 흩어졌고, 사람들은 제각기 급한 걸음으로 지나갔다. 현우는 노인의 머리 위를 보았다. 아무런 숫자도, 붉은 글씨도 없었다. 그런데 노인은 종이를 주우려다 허리를 펴지 못하고 난처하게 웃었다. 현우는 다음 정류장에서 내렸다. 횡단보도의 신호를 기다렸다가 노인에게 다가갔다. “제가 도와드려도 될까요?”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아, 고마워요. 바람이 갑자기 불어서.” 현우는 흩어진 종이를 한 장씩 주웠다. 마지막 종이를 건네려는 순간, 노인이 먼저 이름을 말했다. “나는 김명자예요.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서.” 현우는 미소 지었다. “이현우입니다.” 노인은 서류를 품에 넣고 천천히 길을 건넜다. 현우는 그 뒷모습을 한참 지켜봤다. 한때 그에게 이름은 누구를 잃을지 알려 주는 경고였다. 이제는 누군가가 스스로를 소개하며 건네는 말이기도 했다. 버스 정류장 위로 비가 그쳤다. 현우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오늘 아무 이름도 붉게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특별한 기적처럼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다만 한 사람의 이름을, 그 사람이 직접 말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평범한 하루였다. 그리고 그 평범한 하루가 계속되도록 하는 것이, 그가 앞으로 선택할 삶이었다. — 완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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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0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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