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성은 종이를 보고 웃지 않았다. 처음부터 부정하지도 않았다. 대신 이름 아래 찍힌 접수 날짜를 한참 바라봤다.
“이거 2016년 아니야. 2026년이네.”
“알아.” 민석이 말했다. “네가 올렸어?”
“내가 써 준 의견서가 맞아. 하지만 그때는 이게 실거래에 들어가는지 몰랐어.”
회의실 안이 조용해졌다. 서윤은 녹음기를 켜지 않았다. 아직 인터뷰가 아니었다. 두 친구 사이에서 설명해야 할 일이 생긴 순간이었다.
준성은 지난달 익일금융 협력사의 외부 검토 제안을 받았다고 했다. 지급 지연 상품의 화면 오류를 점검하는 짧은 계약이었다. 처음에는 사내에서 쓰는 데모 화면으로 설명을 들었다. 기존 기록의 책임자 이름을 가상의 관리자명으로 채워 넣는 기능이 위험할 수 있다는 의견을 남겼다.
“거기에 네 이름이 있었어?” 민석이 물었다.
“처음에는 'MINS-36'만 있었어. 그게 네 이름이란 건 나중에 알았어.”
준성은 스스로 파일을 열어 보여 주었다. 당시 계약과 의견서가 남아 있었다. 개발 기능의 승인란은 비어 있었고, 그의 검토 의견 끝에는 '실사용 금지, 원장과 분리 보관'이라는 문장이 있었다.
“이걸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
준성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
“네가 원장을 처음 보여 줬을 때, 이 이름이 익숙했어. 하지만 내가 아는 데모와 네가 겪는 일이 같다고 확신할 수 없었어. 그리고…”
“그리고?”
“네가 알면 날 의심할까 봐.”
민석의 가슴이 답답해졌다. 종이 속의 문장보다 그 마지막 말이 더 아팠다.
“네가 제대로 말했으면 같이 확인했을 거야. 우리가 지금까지 계속한 일이 그거잖아.”
준성은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내가 겁이 났어.”
세린은 둘에게 시간을 줬다. 누가 잘못했는지 그 자리에서 정할 일이 아니었다. 준성의 계약과 검토 이력은 공식 감사 자료로 제공할 수 있는 범위를 확인한 뒤 제출하기로 했다. 누군가 친구의 말을 듣고 벌써 결론을 내리지 않게 하려는 조치였다.
민석은 혼자 건물 뒤편으로 나왔다. 담벼락에는 겨울에 잎을 모두 떨군 담쟁이 덩굴이 매달려 있었다. 그는 준성이 밤마다 자신의 집에 와서 화면을 녹화하던 모습, 모르는 숫자 앞에서 머리를 싸매던 모습, 최은정의 수선집에서 어색하게 웃던 모습을 떠올렸다.
준성의 침묵은 잘못이었다. 하지만 그 잘못이 친구가 지금까지 했던 모든 일을 지우지는 않았다. 민석은 그렇게 정리하고서야 다시 회의실로 돌아갔다.
“앞으로는 내 이름이 나온 자료를 보면 바로 말해 줘.”
“응.”
“그리고 네가 모르는 것도 모른다고 해.”
“그건 자신 있다.”
민석이 입술 끝을 올렸다. 준성도 조금 웃었다. 완전히 화해한 건 아니었지만 두 사람은 다시 같은 종이를 볼 수 있었다.
하은은 준성의 검토 의견서가 회사 내부 위험 보고와 같은 문제를 지적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반려 조건이 이미 외부 검토에서도 제시됐다는 근거였다. 누가 그 경고를 무시했는지는 추가 조사가 필요했다.
두 친구는 점심을 먹으러 근처 분식집에 갔다. 민석은 김밥 한 줄만 주문했고 준성은 라면까지 시켰다. 예전 같으면 누가 미래 정보를 더 많이 알아냈는지 떠들었을 자리였다. 오늘은 김이 나는 국물을 앞에 두고도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나한테 화나지?” 준성이 물었다.
“화나. 그런데 네가 그때 의견서를 남겼다는 건 다행이야. 아무 경고도 없었다고 했으면 더 무서웠을 거야.”
“나는 네 이름이랑 연결될 때까지 기다린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냥 피한 거더라.”
민석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럼 다음번엔 피하지 마. 확인되지 않았으면 확인되지 않았다고 같이 말하면 되잖아.”
준성은 라면 국물을 한 모금 마셨다.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네가 그 첫날 백억 얘기했을 때 있잖아. 축하부터 한 것도 미안해.”
“그건 나도 축하할 뻔했어.”
둘은 동시에 웃었다. 미안한 일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잘못된 정보를 다시 알게 된 사람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둘 다 조금은 배웠다.
가게를 나올 때 준성은 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겉면에는 '누가, 언제, 왜'라고 적혀 있었다. 그동안 숨긴 것도 앞으로 알게 될 것도 먼저 적어 놓겠다고 했다. 민석은 볼펜 하나를 건넸다.
그날 오후 은행에서 1,000원 입금 건의 거래 설명이 도착했다. 2026년 11월 20일 입금은 세온기록관리의 지급이 아니라 별도의 '정산 모듈 통합 검증' 송금이었다. 송금 의뢰 법인은 익일금융과 계약한 외부 운영사였다. 상대방 명의와 관련 상세 자료는 법적으로 제공 가능한 범위에서 통지됐다.
[입금 금액: 1,000원]
[송금 목적 표시: 모듈 검증]
[수취인 동의 증빙: 확인 요청 중]
민석은 종이의 금액을 오래 바라봤다.
“은정 아주머니 돈은 아니란 거군요?”
“현재로선 별도 검증 송금이라는 설명입니다.” 세린이 답했다. “은행 기록과 계약 문서를 확인하고 최종 판단해야죠.”
“그런데 내 계좌를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요?”
“작년에 신분 확인 과정에서 제출한 계좌 정보가 목적 밖에 쓰였는지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민석은 다시 화가 났다. 돈을 보내 놓고 '받았다'는 기록을 만든 다음 권한까지 얻으려 한다면, 돈의 출처보다 먼저 따져야 할 것이 있었다. 자신이 이 검증에 참여하기로 언제 동의했는지.
그날 밤 서윤의 기사 초안 제목은 '천 원짜리 송금으로 검증한 천억 원짜리 권리'였다. 그녀는 오랫동안 제목을 들여다보다 조금 바꿨다.
'동의 없는 시험 송금, 누가 누구의 권리를 확인했나.'
민석은 바뀐 제목이 더 좋다고 했다. 거액보다 핵심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다.
밤 열한 시, 원장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운영 검토 의견: 박준성]
[최종 적용 승인: 다른 계정]
[승인 시각: 2026년 11월 6일 22:04]
그 아래에는 숫자만 적힌 식별자가 있었다.
[승인자 계정: 050-C]
민석은 처음으로 원장을 보며 준성보다 다른 사람을 떠올렸다. 050-C는 2016년 반환 확인 문서의 열람 제한 항목이었다. 그런데 누군가 그 항목 이름을 계정으로 쓰고 있었다.
보관 문서의 비밀이 아니라, 비밀을 열 수 있는 권한을 훔쳤다는 의심이 들었다.
제7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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