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작품, 이어지는 이야기 · 페이루아에서 다음 페이지를 만나보세요
작품으로던전 경매장의 말단 직원입니다 · 70화
PAYLUA ORIGINAL · 제70화

70화. 최초의 감정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던전 경매장의 말단 직원입니다 · 5,205자

오프라인 책장
북쪽 광산에 햇살이 돌아온 날, 서진혁은 역참 마당에서 처음으로 신발을 벗었다. 지난 며칠 동안 산길을 오르내린 탓에 구두 안쪽은 굳은 흙으로 가득했다. 발뒤꿈치에는 물집이 잡혔고, 코트 소매에는 검은 광물 가루가 남았다. 그는 마당의 낮은 의자에 앉아 양말을 말렸다. 카렌은 복도 안쪽에서 마을 보존위원회에 제출할 서류를 정리했고, 라일은 어린 견습공들과 나무표를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세상을 구할 유물 찾으러 온 사람치고는 초라하네요.” 라일이 지나가며 말했다. “유물은 못 찾았어도 빚은 늘었습니다.” “그건 원래 잘하셨잖습니까.” 카렌이 문틈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둘 다 떠날 준비나 하세요. 오늘 오후 마차는 한 번뿐이에요.” 진혁은 신발을 털다 말고 웃었다. 화령의 번쩍이는 거래소에서 북쪽 폐광까지 왔는데, 그가 손에 쥔 것은 몇 장의 정식 열람 신청서와 검증되지 않은 광물 시험 결과, 그리고 무언가를 빼앗지 않았다는 기록뿐이었다. 과거의 자신이라면 이번 출장을 실패라고 했을 것이다. 지금은 조금 달랐다. 살아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해야 했던 사람을 만났고, 이름을 잃어버린 친구가 남의 이름을 훔치지 않는 걸 봤다. 그러나 아직 떠날 수 없는 일이 하나 있었다. 백여명이 요청한 최초 감정 기록의 사본을 함께 확인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기록보존원 서희는 여섯 번째 방에서 확인된 등불의 수리 표지와 일곱 번째 방에서 허가된 일부 장비 기록을 나란히 올려놓았다. 원본을 외부로 반출하지 않는 조건으로 감정사와 마을 대표가 동시에 보는 자리였다. 기록에는 세 종류의 번호가 있었다. 광부 작업조 번호, 장비 수리 번호, 도시 감정 시험의 후보 번호. 세 숫자는 서로 닮았지만 같은 체계가 아니었다. 오래전 기록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031’이라는 숫자가 장비 표에서 사람 목록으로 옮겨 적힌 흔적도 발견됐다. “그럼 제가 제31후보라는 게 단순한 착오였던 겁니까?” 진혁이 물었다. 서희는 고개를 저었다. “현재로선 그렇게 결론 낼 수 없습니다. 같은 숫자가 다른 기록에 있다는 사실만 확인된 거예요. 누군가 의도적으로 옮겼는지도 더 살펴야 합니다.” 여명은 낡은 시험 규정 사본을 펼쳤다. ‘제0호’라는 표기는 그 문서에서 두 번 등장했다. 한 번은 감정 기준을 정하는 역할, 다른 한 번은 최초 시료 검사 절차를 가리키는 것처럼 쓰여 있었다. 인명란은 비어 있었다. “내가 얼굴을 본 적 없다고 했지.” 여명이 말했다. “진짜로 누가 그 일을 맡았는지도 몰라. 몇몇 사람은 한 명의 전설적인 감정사가 모든 물건의 값을 정했다고 떠들었지만, 정작 남아 있는 문서에는 이름이 없어.” 진혁은 가볍게 웃지 못했다. 그는 속으로 자신을 부른 숫자가 특별한 운명을 뜻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세상에 하나뿐인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오래전부터 정해진 거대한 이야기가 자신을 기다리는 게 그럴듯했으니까. 그런데 실제 자료는 사람보다 무심했다. 번호는 틀릴 수 있고, 장부에는 빈칸이 있으며, 잔향은 전체 진실이 아니었다. 카렌은 진혁의 표정을 보고 조용히 말을 건넸다. “실망했어요?” “조금요.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장부 오류일 수도 있다니.” “당신이 누군지는 다른 사람이 붙인 번호가 결정하지 않잖아요.” “그런 말은 보통 멋있는 검사들이 하더군요.” 카렌은 웃으려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에게는 아버지 레온의 빈자리가 있었다. 아버지가 남긴 검과 오래된 봉인 기록은 여전히 완전히 설명되지 않았다. 그러나 진혁이 스스로를 숫자로만 판단하는 것을 보자 자신이 왜 이 길을 함께 걷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당신은 경매장에서 맨날 손해 본다고 투덜대지만, 정작 사람을 팔려는 놈들한테는 한 번도 흥정하지 않았어요.” 진혁은 한참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다 작게 말했다. “그건 흥정할 물건이 아니니까요.” 진혁의 눈에는 세리아가 있는 루멘 경매장의 긴 복도가 떠올랐다. 처음 그곳에 들어갔을 때는 건물 자체가 살아 있다는 생각조차 못 했다. 감정대에 올려진 물건은 언제나 고철이거나 마법이 깃든 유물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이제는 물건이 아니라 사람의 권리와 도시의 안전까지 서로 얽혀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됐다. “저는 원래 이런 일을 하려던 게 아니었어요.” 진혁이 불쑥 말했다. 카렌이 물었다. “그럼 어떤 일을 하려고 했어요?” “일찍 출근해서 물건 몇 개 보고, 월급 받고, 가끔 숨은 보물 하나 발견해서 돈 좀 벌고요.” “지금도 물건은 많이 보고 있잖아요.” “그렇죠. 다만 물건보다 서류가 더 많을 줄은 몰랐습니다.” 카렌은 웃었다. “제가 당신한테 바라는 건 세상을 다 구하라는 게 아니에요.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하고, 위험할 때 혼자 달려가지 않는 거예요.” 진혁은 그녀를 잠깐 바라봤다. 카렌의 머리카락에는 먼지가 묻어 있었고, 갑옷의 팔꿈치에는 광산 길에서 긁힌 흔적이 있었다. 그가 평소처럼 농담으로 넘기려 할 때, 카렌이 먼저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저는 함께 가기로 했으니까요.” 진혁은 뒤늦게 시선을 피했다. “그런 말씀을 하시면 제가 정산서에 동행 수당을 따로 적어야 할 것 같은데.” “적기만 해 보세요.” 둘이 웃는 사이, 창고 밖에서는 서희가 오래된 문서를 보존 상자에 넣고 있었다. 어떤 관계도 한 번의 서명으로 완성되지는 않았다. 누군가 옆에 서 있겠다고 말하고, 그 말을 다시 지키는 시간이 쌓여야 했다. 오후가 되어 공제조합의 조사 보고서가 나왔다. 최박이 다친 수문 사고는 낡은 차수벽의 파손과 수문 조작 이력의 불일치가 겹쳤다. 수문 조작을 지시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확인되지 않았고, 최박의 서명을 흉내 낸 문서는 별도 수사의 대상이 됐다. 북쪽 광산 입구는 정밀 점검을 끝낼 때까지 다시 봉쇄하기로 했다. 진혁 일행이 더 깊이 들어가 비밀을 뒤지는 선택지는 당분간 사라졌다. 그 결과를 들은 라일은 불만스럽게 입을 비죽 내밀었다. “저 안에 분명 더 많은 게 있을 텐데.” “있겠죠.” 진혁이 말했다. “하지만 그걸 보려고 구조대까지 불러야 한다면 지금은 볼 때가 아닙니다.” “예전에는 당신이 먼저 달려들었는데요.” “예전에는 회사에서 잘리고 싶지 않았고, 지금은 죽고 싶지 않거든요.” 라일은 작게 웃었다. 진혁의 농담이 늘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다시 일할 수 있도록 남겨 두는 일도 모험의 일부라는 사실을 그도 배우고 있었다. 세리아에게 보낼 마지막 보고서에는 숫자가 많았다. 광산 출입료, 숙박비, 안전 장비 대여료, 도면 열람 수수료, 시료 연구 계약의 예상 비용. 어느 하나도 세계를 뒤집을 만한 액수는 아니었다. 그런데 펌프용 진동 저감 소재로 쓸 수 있는 시료가 발견됐다는 문장을 쓰는 순간, 진혁의 얼굴이 밝아졌다. 마레온의 미란과 화령의 소연이 함께 시험할 수 있는 구체적인 재료 후보였다. 그는 기술적 조건을 자세히 적었다. 고습 조건에서 성능 재검증 필요, 균열 누적 위험 있음, 시료 소유권과 대여 조건 분리, 실제 방벽 부품 적용 전 시험 필수. 불확실한 정보까지 기록한 보고서였다. 답장은 늦은 저녁에 왔다. ‘조건 확인. 모라 출력 증가 금지 유지. 화령 장인들과 별도 샘플 시험 협의. 돌아오면 직접 설명하라. — 세리아.’ 짧은 글 뒤에 작은 문장이 하나 더 있었다. ‘무사한 것이 가장 큰 수익이다.’ 진혁은 전신을 읽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벨라가 봤다면 회계상 수익이 아니라고 항의했을 문장이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마차 출발을 한 시간 남겨 둔 때, 백여명이 역참으로 찾아왔다. 그녀는 낡은 장갑을 끼고 있었고, 전날보다 얼굴이 조금 밝아 보였다. 서희와 함께 사망 등록 정정 신청을 접수했으며, 이후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본인 확인 기록을 보존하기로 했다고 했다. “내가 제32후보인지 아닌지 자네가 증명할 필요는 없어. 다만 오래된 감정사가 실제로 어떤 값을 남겼는지 알고 싶으면 이것을 보게.” 여명은 종이 대신 작은 구리 명판의 탁본을 내밀었다. 명판은 등불 안쪽에 있던 얇은 판이라고 했다. 소유권을 확인한 뒤, 보존위원회가 공개 가능한 기계 표지만 탁본으로 복제하도록 허락한 것이었다. 탁본의 윗줄에는 ‘제0호 감정 기록 관리인’이라는 글씨가 있었다. 그 아래에는 문장 하나가 남았다. ‘물건의 값보다 먼저, 거절한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라.’ 진혁은 그 문장을 여러 번 읽었다. 특별한 주문도, 감정 능력을 강화하는 비법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지난 몇 달 동안 어렵게 깨달은 원칙과 같았다. 그는 탁본을 접어 수첩 사이에 넣었다. “이것도 경매에 내놓으실 겁니까?” 라일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안 내놓습니다.” “아까운걸요. 제0호 감정사의 물건이라면 돈이 될 텐데.” “그러니까 더더욱요.” 마차 바퀴가 자갈길을 굴렀다. 마을 뒤의 산은 저녁빛 속에서 점점 작아졌다. 옛 선로에는 아무 열차도 달리지 않았지만, 선로 옆의 작은 집들은 여전히 불을 밝히고 있었다. 누군가는 저녁밥을 짓고 누군가는 삐걱이는 문을 고쳤다. 진혁은 그 광경을 오래 바라봤다. 마차가 첫 굽이를 돌 때, 라일이 수첩을 하나 내밀었다. 어느새 그는 진혁이 적어 둔 비용과 증거 목록을 별도로 정리해 놓았다. “왜 이걸 다 옮겨 적었습니까?” “다음에 또 누가 우리 이름을 훔치려고 하면 기록부터 보여 주려고요. 이번엔 훔친 게 아니라 정식으로 베낀 겁니다.” “칭찬해 드려야겠네요.” “금화로 해 주세요.” “그럼 취소하겠습니다.” 둘이 웃는 동안 카렌은 창가에서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그녀의 어깨에는 지난 며칠의 피로가 쌓여 있었다. 진혁은 말없이 자신의 외투를 그녀 쪽으로 조금 당겨 바람을 막아 주었다. 카렌은 눈을 뜨지 않은 채 작게 말했다. “고마워요.” “잠들지 마세요. 정산서 확인해 주셔야 합니다.” “정말 분위기 깨는 데는 천재네요.” 그들이 화령의 첫 역참에 도착했을 때, 새로운 전신 한 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발신인은 윤담이었다. 칠성 경매원의 내부 조사 과정에서 처음 보는 출품 번호가 발견됐다는 것이다. ‘출품 예정: 봉인된 최초 감정서. 출품자 비공개. 소유권 확인 중. 출품 요건 충족 전 경매 진행 불가.’ 전신 아래에는 누군가 추가로 쓴 짧은 문구가 있었다. ‘서진혁에게만 사전 감정 요청. 당신의 감정 결과가 곧 당신의 값이 될 것이다.’ 진혁은 외투 속 손바닥을 꽉 쥐었다. 이번에 돌아가면 또 다른 경매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한 가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감정해야 할 물건과, 결코 낙찰시켜서는 안 되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을.

PAYLUA 소설 본문은 인쇄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제70화 끝

읽은 위치는 이 브라우저에 저장되며 로그인 중에는 계정에도 동기화됩니다.
READER DISCUSSION

제70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해 주세요.로그인회원가입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