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완전히 돌아온 마레온의 항구에는 비린내와 빵 냄새가 함께 흘렀다. 새벽 어선들이 물고기를 내려놓으면 시장 사람들이 얼음을 갈아 상자에 채웠고, 부두의 작은 가게에서는 막 구운 빵을 진열했다. 바다 건너에서 온 상인들이 낯선 말을 주고받고, 좁은 수로의 안전등이 규칙적으로 켜졌다 꺼졌다 했다. 도시가 숨 쉬는 소리는 거대한 사건이 끝났다고 멈추지 않았다.
루멘 경매장의 정문에는 새 간판이 걸렸다. 오래된 이름은 그대로였지만 그 아래 한 줄이 추가됐다.
'모든 거래는 소유자와 당사자의 의사를 확인한 뒤 진행합니다.'
처음 이 문구를 제안했을 때 세리아는 너무 당연한 말을 굳이 간판에 써야 하느냐고 물었다. 벨라는 그 당연함이 가장 많이 빠뜨려지는 항목이었다며 찬성했다. 결국 세리아는 간판 제작비를 장부에 올리고 직접 달도록 했다. 평소라면 거창한 사훈보다 경매 수수료를 정확히 계산하라고 했을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 경매장의 새 규칙이 멋진 말로만 남지 않게 하려면 눈에 띄는 곳부터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진혁은 지하 창고에서 낡은 찻잔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눈앞에는 아무 문장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날 황실 제1경매원에서 개인 연결이 끊긴 뒤부터였다. 처음에는 잠결에 손바닥을 펴다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허전했다. 손가락이 조금 떨리는 날도 있었다.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단순히 편리한 능력인지, 자기 일부였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 사이 달라진 사실 하나는 분명했다. 물건을 판단할 때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더 많이 구하게 됐다.
“손잡이 밑을 보세요.” 윤담이 말했다. “이 찻잔은 유약은 평범하지만 바닥의 제작 인장이 희귀합니다.”
“그럼 비쌉니까?”
“그게 바로 문제예요. 희귀한 것과 좋은 가격에 팔리는 것은 다르죠.”
진혁은 웃었다. 예전에는 물건을 스치기만 해도 진가가 글씨로 떠올랐다. 지금은 제작 인장에 관한 책을 찾아야 했고, 같은 공방에서 만든 진품을 빌려와 비교해야 했다. 시험 중 놓치는 사실도 있었다. 그래도 나중에 설명할 수 있는 감정서를 만드는 방법은 오히려 더 분명해졌다.
그는 동화 두 닢짜리 연필로 작은 장부에 기록했다. '제작 연도 추정, 제조 공방 확인 중, 기능 시험 필요.' 모르는 곳에는 모른다고 썼다. 예전 같으면 부끄러웠을 빈칸이었다. 지금은 후배 감정사에게 가장 먼저 가르쳐 주는 습관이 됐다.
오전에는 왕도에서 공문이 도착했다. 에르딘의 통합 거래 및 위조 서류 관련 조사가 진행 중이며, 일부 계약은 개별 심사를 거쳐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유죄가 이미 확정된 것처럼 쓰인 줄은 없었다. 담당자는 관련자에게 의견을 제출할 기회를 주고 있었다. 사건이 끝난 뒤에도 사람들의 권리를 판단하는 일은 천천히 계속돼야 했다.
서진혁 가족의 오래된 계약서도 조사 결과를 통지받았다. 일만 금화는 가족에게 청구할 채무가 아니라 사고 시 지급하기로 한 보상 약정이라는 판단이 유지됐고, 관계인의 확인 없이 어느 한 사람이 전액을 가져갈 수 없도록 별도 보관됐다. 진혁은 그 소식을 듣고 묘하게 마음이 놓였다. 가족에 관한 기록 가운데 여전히 모르는 부분은 있었지만, 적어도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빌려 가짜 빚을 만드는 일은 막을 수 있었다. 그는 지급 대상과 기록이 최종 확인될 때까지 필요한 서류를 차근차근 제출하기로 했다.
왕국의 회신망은 하나의 거대한 주인에게 넘겨지지 않았다. 주요 지방마다 독립 접수인이 선출됐고, 안전 설비는 기술관의 감독 아래 운영됐다. 중앙 기록관은 원본 보존과 감사 업무를 담당했지만, 당사자의 대답을 대신 만들 권한은 없었다. 규칙은 아직 미완성이었고, 지역마다 비용 분담을 놓고 다툼이 생기기도 했다. 그래도 문제를 제기할 창구는 열린 채였다. 여러 사람이 그 느리고 답답한 절차를 지키고 있었다.
백여명은 광산으로 돌아가 자기 이름으로 작업안전위원회에 참여했다. 그는 더 이상 제32후보로 불리지 않았다. 다만 오래전 그 번호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조사는 계속됐다. 백란과 라일은 서로 다른 길을 다니며 배송 기록을 정정했다. 라일은 자기 옛 이름이 적힌 장부를 찾을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지만, 내용을 보기 전까지 누군가에게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당장 이름을 바꿀 생각도 없었다.
“라일이란 이름으로 월급 받으면 안 됩니까?” 그가 벨라에게 물었다.
“계약서에 그 이름을 직접 서명했다면 됩니다.”
“당연한 일이 이렇게 감동적일 줄이야.”
“그럼 오늘 배송비 영수증도 감동적으로 가져오세요.”
직원들이 웃었다. 루멘의 복도에는 이제 그런 웃음이 자주 들렸다. 과거 비밀스러운 경매장을 지켜보며 모두가 말을 아끼던 분위기와는 달랐다.
카렌은 검을 다시 손질하고 있었다. 그 검은 아버지 레온과 연결된 기억을 담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감정대 위에 올려 누군가에게 가치를 입증받으려 하지 않았다. 자신의 물건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동생 이안은 관련 기록을 확인하고 자신의 신원 담보 문제를 정리하는 일을 계속했다. 카렌은 이안이 직접 서명해야 하는 칸을 남겨 두었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대신 결정할 수는 없었다.
세리아는 늦은 오후 항구 끝에 있는 작은 기록실을 찾았다. 유나의 편지는 이제 별도 함에 보관돼 있었고, 공개 가능한 기술 기록만 연구자에게 열람됐다. 그날 마지막 음성의 출처와 유나의 최종 행방은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세리아는 기록실에 새로운 추적 의뢰를 맡겼지만 그것이 경매장의 일상을 잡아먹게 하지는 않았다. 유나가 좋아하던 일을 그만두지 말라고 했던 문장을 종종 떠올렸다. 사람을 찾는 마음과 지금 옆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는 마음은 함께 갈 수 있었다.
그날 점심시간 진혁은 혼자 항구 끝자락의 작은 수리공방을 찾았다. 나무 창틀과 금속 장식에 흰 먼지가 내려앉은 가게였다. 몇 달 전 화령에서 만났던 장인이 이곳에 출장 작업대를 열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작업대 위에는 부서진 경보종과 버려진 손잡이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새로 뭘 배워 보려고요?” 장인이 물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부터요. 균열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이전에 누가 어떻게 고쳤는지.”
장인은 하루 한 시간씩 견습을 받아 주겠다고 했다. 수업료는 정식으로 받겠다고 했다. 진혁은 선뜻 동의했다. 자신은 이제 몇 초 만에 수백 년의 비밀을 읽을 수 없었다. 대신 한 시간에 한 가지 원리를 배우고, 잘못한 부분을 다시 연습할 수 있었다.
공방 밖에서는 카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진혁이 손에 쥔 작은 공책을 봤다. 첫 장에는 '확신하지 못하는 물건은 반드시 질문한다'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오늘 경매에서 큰돈 벌 생각이라더니 공부부터 했네요.”
“큰돈 벌려면 틀리지 않아야죠.”
“틀릴 수 있다는 걸 먼저 알아야겠죠.”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렌의 검집에는 새로 단 작은 수리표가 매달려 있었다. 얼마 전 직접 점검을 받은 날짜와 담당자의 서명이었다. 그녀 역시 물건을 아는 사람에게 묻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둘은 말없이 항구를 따라 걸었다. 아주 오래 계속될 것 같은 평범한 오후였다.
해질 무렵 정식 소품 경매가 시작됐다. 화려한 귀빈석은 비어 있었고, 나무 의자에는 항구 상인과 견습생들이 앉았다. 벽에는 거래 절차를 적은 안내판이 걸렸다. 첫 번째 출품품은 낡은 구리 반지였다. 보석도 없고 금 도금은 거의 벗겨져 있었다. 그 반지를 들고 온 사람은 손등에 열쇠 구멍 모양 화상이 남은 최연묵이었다.
“기억나나?” 그가 물었다.
진혁은 순간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 봤을 때는 쓰레기라고 적었습니다.”
“그때는 자네가 뭘 볼 수 있었지.”
“지금은 많이 못 봅니다.”
“그런데 그때보다 더 오래 물건을 들여다보는군.”
진혁은 반지를 검사대에 올렸다. 반지의 재질과 손상된 부분, 마법적 잔류 신호가 있는지 외부 기술관의 도움을 받아 확인했다. 처음에 보았던 고대 봉인의 잔류 기억과 지금 물건이 가진 법적 소유권은 별개의 문제였다. 최연묵은 자신의 소유권을 증명하는 옛 접수 기록을 제출했다. 반지를 경매에 올린 이유도 기록됐다. 그는 반지 자체를 팔고 싶었고, 그 물건에 얽힌 다른 사람의 권리까지 넘길 생각은 없었다.
경매인이 시작가를 물었다. 진혁은 반지의 상태를 설명한 뒤 잠시 망설였다.
“동화 두 닢.”
객석에서 작은 웃음이 났다. 그 가격은 몇 달 전 처음 반지를 보았을 때 적었던 표면 가치와 같았다. 그러나 지금의 두 닢은 무시하는 숫자가 아니었다. 재료와 수리 가능성, 소유권 범위를 확인한 뒤 붙인 출발점이었다. 누군가 더 높은 가치를 인정한다면 정식 입찰로 거래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동화 세 닢!” 한 노인이 외쳤다.
“다섯 닢.” 수리공이 손을 들었다.
최연묵은 웃으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반지는 특별히 비싸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의 경매가 끝나자 누구도 자기 이름을 빼앗기지 않았고, 누구의 거절도 밀려나지 않았다. 소박한 물건 하나가 정당하게 팔린 것뿐이었다. 진혁은 그 사실이 오래전 금화 백 닢짜리 입찰보다 더 기쁘다는 것을 깨달았다.
경매가 끝나고 세리아가 그를 불렀다. 작은 봉투 하나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이번 달 월급이야.”
진혁은 봉투를 확인했다. 기본급 외에 정식 감정사 수당이 붙어 있었고, 지출 공제 내역도 상세히 적혀 있었다.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사장님, 숫자가 잘못된 것 같은데요?”
“적게 들어왔어?”
“아니요. 너무 정상이라서요.”
“회사 회계가 정상적인 게 그렇게 놀라워?”
“제가 여기 처음 왔을 때는 휴가가 있다는 사실도 몰랐으니까요.”
세리아는 피곤한 얼굴로 웃었다. “그래. 그동안 너무 심했지. 다음 달에도 정상적으로 줄 테니까 이번 달 것부터 잘 받아.”
진혁은 봉투를 손에 들었다. 가장 비싼 유물을 팔아 얻은 돈이 아니었다. 똑바로 일하고, 배운 만큼 책임지고, 서로의 권리를 확인하며 번 첫 정식 감정사 월급이었다. 그는 낡은 장갑을 벗어 책상 옆에 올려 두었다. 한때 그 장갑으로 왕국의 모든 물건의 본질을 보려 했었다. 지금은 알았다. 모든 것을 보는 능력이 없어도 눈을 뜨고 물어볼 수 있다는 것을.
밖에서는 항구의 저녁 종이 울렸다. 카렌은 문밖에서 기다리다가 그가 나오자 함께 걸었다. 둘은 내일 있을 항구 유물 감정회 이야기를 했다. 저평가된 부품이 잔뜩 나온다는 소문에 진혁의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또 쓰레기 사러 가는 겁니까?” 카렌이 물었다.
“쓰레긴지 아닌지 봐야 알죠.”
“이번에도 세상을 구할 생각이에요?”
“아니요.” 진혁은 잠깐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그냥 좋은 물건을 제값에 사고 싶습니다.”
그는 웃었다. 항구의 바람이 장갑을 스치고 지나갔다. 내일도 경매장은 열릴 것이다. 누군가는 값싼 물건을 가져올 것이고, 누군가는 그 물건에 자기만의 의미를 붙일 것이다. 서진혁에게는 아직 모르는 것이 많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 배울 수 있었다.
그것이 말단 직원으로 시작한 한 감정사가 오래도록 지키고 싶은 일이었다.
제20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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