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장재휘의 공방 문 앞에는 누군가 오래된 수첩을 놓고 갔다.
수첩은 모서리가 둥글게 닳아 있었고 끈으로 묶인 등에는 얇은 철도 표가 끼워져 있었다. 겉에는 이름도 번호도 없었다. 세리아는 뭔가를 발견했다고 곧바로 펼치지 않았다. 처음 보는 물건이 증거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수록 누가 어디에 놓았는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그녀는 공방 앞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을 사진으로 남기고 주인에게 보여 주었다.
재휘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이건 내가 맡아 둔 게 아니야. 하지만 표지는 알아. 옛날 화물 인수인이 쓰던 수첩이지.”
“누가 놓았을까요?”
“나는 모른다. 바로 열어 보려면 나 혼자 말고 역의 담당자를 불러.”
진혁은 공방의 낮은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유리창 밖으로 해가 떠오르자 철도 노동자들이 줄지어 출근했다. 술집 주인은 얼어붙은 물통을 난로 옆에 옮겼고, 행상은 어제 남긴 뜨거운 보리빵을 다시 데웠다. 이 도시에서 기록은 책상 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기차가 출발한 시각을 기억하는 사람, 누가 몇 개의 상자를 실었는지 기억하는 사람, 오래전 닫힌 신호탑을 지금까지 닦는 사람이 각자 작은 장부 하나씩을 품고 있었다.
소담은 역장의 입회 서명을 받아 수첩을 열었다. 앞부분에는 운송료와 배차 번호가 빼곡했다. 후반부로 갈수록 글씨가 작아졌고, 마지막 몇 장에는 평소보다 훨씬 많은 지우개 자국이 남아 있었다.
“화물 인수인 강모진.” 소담이 이름을 읽었다. “열두 해 전에 퇴직했다고 돼 있어요.”
배옥선이 수첩을 보자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모진이라면 아직 이 동네에 살아. 역에서 가까운 오래된 빵집 뒤편에.”
일행은 곧장 찾아가려 했지만 옥선이 막았다. “그 사람은 사고 얘기만 나오면 문을 닫아. 그냥 찾아가서 묻지 마. 먼저 만나도 괜찮은지 물어보자.”
그날 정오, 옥선이 돌아와 전해 준 답은 짧았다. 강모진은 소담과 카렌 두 사람만 만나겠다고 했다. 진혁과 라일은 기꺼이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세리아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열두 해 동안 묵은 두려움이 어떤 모양인지 그녀도 알고 있었다.
빵집 뒤 작은 집은 오래된 철로 침목으로 담을 세워 놓았다. 눈은 일찌감치 녹아 마당에 진흙을 남겼고, 처마에 걸린 말린 콩대가 바람에 부딪쳤다. 진혁과 라일은 골목 입구의 난간에 기대어 기다렸다.
“혹시 기억나면 알려 주세요.” 라일이 조용히 말했다. “옛날에 이 골목을 뛰어다닌 적이 있는 것 같거든요.”
“어느 날인지는 알 수 있습니까?”
“아뇨. 그게 문제예요. 내 기억은 자꾸 물건에서 시작되거든요. 얼굴보다 열쇠 구멍이 먼저 떠오르고.”
진혁은 잠시 생각하다 자신이 가진 힘을 이야기했다. “저도 그래요. 물건의 본질을 보면 너무 쉽게 답을 얻은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런데 물건이 알려 주는 게 다 진실은 아니더라고요. 누군가의 이유는 손으로 만질 수 없잖아요.”
라일이 그를 보며 웃었다. “이젠 감정사가 철학까지 팝니까?”
“철학은 돈이 안 되니까 무료입니다.”
두 사람은 짧게 웃었다. 마당 안에서는 의자가 끌리는 소리와 주전자 뚜껑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 뒤 카렌이 밖으로 나와 손짓했다. 집주인이 네 사람 모두 들어오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카렌이 집으로 들어가기 전 라일에게 먼저 물었다. “모진 씨가 당신과 닮은 아이를 기억하더라도, 그 이야기 전부를 오늘 듣고 싶습니까?”
라일은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누구였는지 알고 싶었지만, 그 답이 사람들에게 상처를 줬을 가능성도 두려웠다. 시간이 지나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필요한 만큼만요. 나머지는 나중에 들어도 괜찮습니다.”
그 말에 카렌은 문을 열었다. 그는 기억을 빨리 되찾기 위해 서둘러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래 살아남은 자신을 이해할 시간을 누릴 권리도 있었다.
강모진은 머리가 거의 새하얀 노인이었다. 양손은 무릎 위에 놓았지만 오른쪽 손가락 두 개가 잘 굽혀지지 않았다. 작은 벽난로 앞에는 뜨개질하던 파란 목도리가 놓여 있었고, 탁자에는 찻잔 세 개가 이미 비어 있었다. 그는 진혁이 들어오자 얼굴부터 살폈다.
“새 감정사라고?”
“네. 서진혁입니다.”
“내가 젊을 때는 감정사가 물건만 보고 사람은 보지 않았지. 그런데 너희는 사람부터 묻는구나.”
노인은 오래전 일을 차분히 설명했다. 제9반송구의 기록은 본래 하나의 물건을 수취인에게 보내는 명세서가 아니었다. 장치를 이용해 이름이나 기억이 빼앗긴 사람에게, 그 계약을 거절하거나 다시 확인할 방법을 돌려주는 반환 절차였다. 한서겸은 그 절차가 작동하도록 분류기를 만들었고, 유나는 기록의 소유자가 사람임을 확인하는 검수에 참여했다.
“그런데 왜 실패했습니까?” 카렌이 물었다.
“실패했다고 적힌 건 나중 일이야. 내가 본 건 멈춘 장치와 서로 다른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뿐이었어. 그날 사람들은 왕도에서 온 이들이 뭐라고 하는지 들으려고 기다렸지.”
모진은 주전자 손잡이를 두 손으로 잡았다. 그의 손가락이 오래전 사고 때 굳었다는 사실을 카렌은 그제야 알았다. 그는 사고를 막으려다가 뜨거운 증기 배관에 손을 댔다고 했다.
“한서겸은 사람의 거절을 기록에서 지우지 말자고 했어. 그 말 때문에 여러 사람이 불편해했지. 계약이 완성됐다고 적어야 받을 돈이 생기는 사람들도 있었으니까.”
“한서겸은 그날 사라졌습니까?” 세리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 눈앞에서 사라진 건 아니야. 남쪽 열차가 늦었고, 나는 환승 서류를 들고 신호탑 아래로 갔지. 그때 검은 외투의 여자가 어린아이를 데리고 오더구나.”
라일이 숨을 멈췄다.
“아이가 봉투를 들고 있었습니까?”
“그래. 아이가 이름을 말하려고 했는데 여자가 먼저 고개를 저었어.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자기가 누구인지는 나중에, 안전할 때 말해도 된다고 했지.”
모진은 서랍에서 작은 천 조각을 꺼냈다. 거기에는 검은 실로 여섯 갈래 별이 수놓아져 있었다. 어제 우편함에서 본 표식과 비슷했다.
“그 여자가 아이 손을 감싸려고 썼던 천이야. 떨어져 있기에 돌려주려 했는데 찾을 수 없었어.”
라일은 천을 받지 않았다. 그는 손이 떨릴까 봐 무릎 아래로 감췄다.
“왜 지금까지 가지고 계셨어요?”
“돌려줄 날이 오길 기다린 거지. 그날 못 돌려준 물건이 하나 더 있어.”
모진은 서랍 안쪽에서 얇은 나무판을 꺼냈다. 판에는 화물 번호가 적혀 있었지만 우측 끝은 부러져 있었다. 표면에는 탁자에 긁힌 자국과 세모난 낙인이 남아 있었다.
“서고에서 찾는 상자는 북쪽으로 가지 않았어. 신호탑 아래의 반송 대기 통로로 내려갔지. 내가 봤어. 다만 누가 가져갔는지는 말할 수 없어.”
“기억이 안 나십니까?” 카렌이 물었다.
“기억이 나. 하지만 그 사람이 아직 살아 있다면 먼저 허락을 구하고 싶어.”
카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 있는 증인의 이름을 진술 도중 억지로 끌어내는 일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었다. 증언이 외부로 흘러가면 그 사람이 다시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모진은 사고가 나던 날의 운송 방식을 자세히 설명했다. 북쪽 승강장에 도착한 물품은 사람이 직접 붙인 납인을 검수한 뒤 분류기로 보내졌다. 그 과정에서 주소가 정확하지 않은 것은 반송 대기선으로 돌아왔고, 거절된 거래에 관한 기록은 특별한 인영을 찍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사고 이후 담당자가 바뀌면서 반송 대기선에 있던 모든 물품이 임시 보관품으로 재분류됐다. 그때부터 누가 동의를 철회했는지 찾기 어려워졌다고 했다.
“한서겸이 부탁한 건 사람을 살리는 방법을 기록에 남기라는 거였소. 그런데 나는 그때 다른 일에 쫓겨 그 말을 끝까지 듣지 못했지.”
“그게 어르신 잘못은 아니잖아요.” 진혁이 말했다.
“그렇게 말해 주는 건 고맙네. 하지만 내 말도 기록에 남겨 줘. 내가 모른 채 넘긴 일이 있다면 그것도 밝혀야 하니까.”
카렌은 진술서 마지막에 자발적인 증언이라는 문장을 넣었다. 증인은 언제든 자신이 직접 확인하지 못한 부분을 수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모진은 느린 손으로 서명을 했다. 오른손이 잘 굽혀지지 않아 이름 끝 획이 조금 흔들렸다.
라일은 모진이 건넨 천 조각을 손에 쥐고 한참 바라봤다. 여섯 갈래 별 아래에는 아주 가느다란 파란 실이 하나 더 엮여 있었다. 오래된 천을 손끝으로 만지자 귓가에 어린아이의 울음이 스치는 것 같았다. 그는 그것을 기억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다만 천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자신의 주머니 깊숙한 곳에 넣었다.
밖에서 기다리던 진혁은 빵집 주인에게 몇 개의 빵을 샀다. 모진이 아침마다 오래된 딱딱한 빵을 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가게 주인은 따뜻한 빵을 하나 더 얹었다. “그 노인은 옛날부터 아이들을 위해 빵을 남겨 두는 사람이었어. 오늘은 누군가 그분에게도 빵을 남겨 줘야지.” 진혁은 작은 고마움이 기록보다 오래 남을 때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집을 나올 무렵 모진은 진혁을 불렀다.
“감정사. 물건의 값은 알 수 있겠지. 그런데 누군가 돌려받지 못한 권리에도 값이 있다고 생각하나?”
진혁은 한참 고민했다.
“값을 매기면 누가 살 수 있다고 생각할까 봐 두렵습니다. 그래서 그것만큼은 값을 적지 않으려 합니다.”
모진은 처음으로 웃었다. “그럼 네 장부에는 빈칸을 남겨 둬라. 열두 해 전에 우리가 못한 일이 그거였으니까.”
세리아는 유나의 이름이 나온 뒤 조용해졌다. 진혁이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내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난 그 애가 모든 일을 내게 말해 주지 않았다는 게 서운했던 거야.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나도 그 애에게 모든 걸 물어보지 않았어.” 두 사람은 말없이 걸었다. 세리아의 가슴속에서는 오래 묵은 후회가 조금씩 다른 모양으로 바뀌고 있었다. 과거의 누군가가 자신에게 비밀을 남겼다는 사실보다, 그 사람이 무엇을 지키려 했는지 알아내는 일이 더 중요해지고 있었다.
그날 저녁, 소담이 옛 반송 터널의 도면을 가져왔다. 터널은 안전 문제로 폐쇄되었지만 사람 크기의 통로가 하나 더 있었다. 진혁은 내려가자고 서두르지 않았다. 역장의 승인과 구조 장비를 먼저 준비해야 했다.
하지만 도면 아래의 날짜를 발견하자 그는 멈칫했다. 터널의 폐쇄 명령이 내려진 것은 사고 다음 날이 아니라, 사고가 나기 **사흘 전**이었다.
제12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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