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벨 기록방의 문 위에는 작은 종이 하나가 걸려 있었다.
[금일 정상 영업. 드래곤 방문 시에도 예약 순서 준수.]
태오는 문장을 적고 나서 잠깐 고민했다. 드래곤 방문 시에도, 라는 단서를 굳이 넣을 필요가 있을까. 그는 이 문장이 자신의 기록방을 지나치게 유명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이미 동네 아이들은 그를 ‘용에게 전세금 받은 아저씨’라고 불렀다. 사실을 숨기는 것보다 순서를 정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리네아가 출근길에 간판을 보고 웃었다.
“아저씨는 조금 억울하겠어요.”
“무슨 아저씨요?”
“용에게 전세금 받은 아저씨.”
“저는 그냥 계약대로 돌려받은 건데요.”
“그렇죠. 하지만 계약대로 돈을 받는 일이 전설이 되어 버렸잖아요.”
태오는 한숨을 쉬다가 결국 웃었다.
그날은 일곱 해 묵은 감시 기록과 계정 47의 제한 현물 검증 결과를 시 기록국에 공식 인계하는 날이었다. 태오가 오래 갖고 있던 자료 가운데 허가된 사본은 정리해 넘기고, 개인정보가 있는 원본은 각 당사자 또는 지정 보존기관으로 돌려보냈다. 자신이 맡을 이유가 없는 문서까지 평생 갖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자기 보증금 문제는 이미 끝나 있었다. 최초 300금화는 여러 차례에 걸쳐 실제로 전액 반환받았다. 그 이후로 오늘까지 태오 명의의 추가 원금 지급도, 새로운 미환급 원금도 없었다.
“좀 시원섭섭하군요.” 토른이 말했다.
“왜요?”
“용의 금고에 네 돈이 있는 줄 알았는데, 결국 용이 다른 재산을 팔아 갚았잖나.”
“그게 가장 정확한 결말이죠.”
“세상엔 더 멋진 마법이 많거늘.”
태오는 미소 지었다.
“남의 돈을 제때 돌려주는 마법이 있다면 제일 먼저 보급해야겠습니다.”
토른은 크게 웃었다.
***
시 기록국에는 소피와 헤스, 로벤이 먼저 와 있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서류를 가지고 있었다. 소피는 재통지 후 직접 받은 문서와 자기 계약의 지급 현황을 대조하고 있었다. 헤스는 빵집의 영업 시간을 피해 상담 일정을 정하려 했다. 로벤은 마차 운행과 늙은 로지의 먹이값을 적은 작은 수첩을 들고 있었다.
세 사람에게 오늘 새 금화가 지급된 것은 아니었다. 현재까지 확인된 실제 일부 반환액은 소피 35금화, 헤스 22금화, 로벤 20금화였다. 다른 세입자들의 지급과 잔여 원금은 각각 별도로 확인해야 했다. 발카스가 예치한 240금화는 독립 보전 계좌에 있었고, 오늘까지 개인들에게 실제로 지급된 돈으로 바꿔 적을 수 없었다.
“앞으로도 오래 기다려야 할까요?” 소피가 물었다.
마르셀이 계약별 검토 일정표를 보여 주었다. 확인된 자료에 따라 독립 청구를 진행하는 순서와 연락 창구가 적혀 있었다. 의뢰인은 자신의 정보를 누구에게 공개할지도 직접 선택할 수 있었다.
“보전 자금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진전입니다.” 마르셀이 말했다. “하지만 실제 지급 날짜와 금액은 계약과 권리 관계를 확인해 따로 안내하겠습니다.”
소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계획이랑 실제 지급을 구분해서 적어 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태오는 그녀의 목소리가 전보다 또렷하다고 느꼈다. 다른 사람들이 대신 설명하던 문제를 이제는 스스로 물을 수 있었다.
***
다렌 코르도 기록국에 왔다. 그는 자신의 신원 대조 결과와 현재 자필 진술을 한 파일에 묶었다. 일곱 해 전 수령증 서명의 최종 진위는 여전히 독립 감정 대상으로 남았지만, 오늘의 다렌 코르는 자기 이름으로 질문할 수 있었다.
“이건 이제 내가 직접 가지고 가겠소.”
“좋습니다.” 태오가 말했다.
“다렌 베스의 이름도 섞어 쓰지 않도록 부탁했소.”
“등록관이 두 사람의 파일을 따로 관리하기로 했습니다.”
코르는 잠깐 눈을 감았다.
“오래 걸렸군.”
“네.”
“그래도 내가 기다린 게 헛되지는 않았소.”
아델 마린이 그의 옆에서 미소 지었다. 두 사람은 문해교실 수업이 끝나면 작은 여행을 갈 생각이라고 했다. 코르는 자신이 어릴 적 살던 마을의 표지판을 이번에는 직접 읽어 보고 싶다고 했다.
태오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 모든 사건의 가장 좋은 결말이 금화여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돈을 못 받은 이들의 청구가 남아 있다는 사실도 잊을 수 없었다. 그는 서로 다른 결말을 서로 다르게 기록했다.
***
정식 인계 자리에는 태오가 만든 작은 설명표도 함께 놓였다. 원본의 보존 위치, 열람을 허가할 기관, 당사자가 직접 확인할 부분,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한 부분을 서로 다른 칸으로 나눈 표였다. 기록국 직원은 표를 펼쳐 보더니 말했다.
“이건 다음 담당자가 일하기 편하겠군요.”
“제가 처음 조사할 때 가장 필요했던 거였습니다.” 태오가 대답했다.
직원은 마지막 칸을 가리켰다.
“여긴 왜 비어 있지 않고 ‘미확정’이라고 적었습니까?”
“비어 있으면 누군가 이미 확인한 줄 알거나, 단순히 빠뜨린 줄 알 수 있거든요. 미확정이라는 말은 아직 검증해야 한다는 뜻이니까요.”
세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다만 이 표 자체가 공식 판결은 아니니 작성자와 범위를 함께 남기겠습니다.”
“물론입니다.”
태오는 기쁜 마음으로 서명했다. 이번 서명은 누군가의 돈을 돌려받았다는 영수증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권리를 대신 행사한다는 위임장도 아니었다. 자신이 어떤 자료를 어떤 조건으로 정리했는지 설명하는 업무 기록이었다.
그는 그 차이가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는 모든 문서가 돈을 찾기 위한 도구였다. 지금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질문을 남기기 위한 도구이기도 했다.
***
새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로벤의 마차와 마주쳤다. 로지는 천천히 걸었고 바퀴는 빗물 고인 돌길을 지나갔다. 태오는 손을 흔들었다.
“어디 다녀오십니까?”
“소포를 하나 배달하고 돌아가는 길이오.”
“이번에는 수령 확인을 받으셨겠네요.”
로벤은 크게 웃었다.
“상대가 직접 받았소. 내가 왜 그렇게 적었는지도 이제 알겠군.”
그는 잠시 태오를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너는 이제 그 용에게 돈 받으러 산에 갈 일이 없겠구나.”
“네. 제 돈은 다 받았습니다.”
“그럼 가끔은 경치 보러 오시오. 산에는 문서 말고도 좋은 게 많으니까.”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 동굴을 처음 찾아가던 날에는 풍경을 볼 정신이 없었다. 언젠가 리네아와 함께 금고가 아닌 산의 나무와 바람을 보러 갈 수 있을 것이다.
로벤은 모자를 들어 인사하고 마차를 몰았다. 태오는 그가 천천히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야기가 끝난다는 것은 사람들이 더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들이 각자의 길을 다시 걸어갈 수 있게 된다는 뜻이었다.
***
오후에는 발카스가 나타났다. 기록방 문에 적힌 대기표 안내를 보고 그는 잠시 멈췄다.
“드래곤 방문 시에도 예약 순서 준수라니.”
“네.” 태오가 대답했다.
“나는 예약했느냐?”
“바렌 씨가 어제 하셨습니다.”
“그럼 왜 내가 직접 모르는 것이냐?”
“이제는 업무 요청서를 끝까지 읽으셔야죠.”
발카스는 잠시 그를 노려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아주 작은 책자를 꺼냈다. 처음에는 태오가 또 새로운 비용 청구서인가 하고 긴장했다. 책자 표지에는 뜻밖의 제목이 적혀 있었다.
[임대차 계약의 필수 고지와 반환 절차 안내.]
“이게 뭡니까?”
“내가 관리하는 주택의 직원들에게 읽게 하려고 만들었다. 계약서에서 숨겨서는 안 되는 사실과, 세입자가 나갈 때 확인해야 할 일을 정리했지.”
태오는 첫 장을 펼쳤다. 소유자가 드래곤일 수 있다는 사실을 계약 전에 고지할 것. 보증금 원금과 수리비 분쟁을 함부로 상계하지 말 것. 계정이나 금고의 처분 제한과 임대인의 계약상 반환 의무를 혼동하지 말 것. 지급 예정과 실지급을 구분할 것. 반환 기한을 지킬 것.
“맨 앞부터 이렇게 쓰셨습니까?”
“바렌이 문장으로 다듬었다.”
“드래곤 님이 승인하셨고요?”
“끝까지 읽고 승인했다.”
태오는 책자를 덮었다.
“이제 정말 무섭네요.”
“또 무엇이 무섭다는 것이냐!”
“처음부터 이 책을 만드셨다면 제 인생이 달라졌을 테니까요.”
발카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게 말이다.”
그 대답에는 오래전 동굴에서 들었던 어떤 위협보다 큰 무게가 있었다.
***
저녁 식사 자리는 성대하지 않았다. 헤스가 구운 빵과 소피가 가져온 과일, 로벤이 선물한 작은 말 장식, 아델의 학생들이 그린 그림이 식탁에 놓였다. 토른은 의자 네 개를 더 만들었다며 가져왔고, 리네아는 손님들의 외투를 걸어 줄 고리를 준비했다.
발카스도 초대받았다. 그는 인간 모습으로 들어왔지만 마당에 세워 둔 거대한 석재 화분을 보자 의기양양해졌다.
“보아라. 내가 준 것이 저렇게 자랐다.”
“배수구를 뚫고 물을 알맞게 준 덕분이죠.” 태오가 말했다.
“선물에 대한 감사가 부족하군.”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사람이 직접 들 수 있는 크기의 화분을 부탁드립니다.”
드래곤은 낮게 웃었다.
식탁에서는 지난 사건 이야기가 조금씩 나왔다. 어떤 사람은 왕실 기록국의 정정 결정이 도움이 됐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아직 기다려야 할 원금 때문에 답답하다고 했다. 모두 옳은 이야기였다. 태오는 어떤 말도 억지로 밝게 마무리하지 않았다.
소피의 아이가 발카스에게 물었다.
“아저씨, 이제 편지가 오면 직접 보여 줘요?”
발카스는 의자를 조금 낮췄다.
“그래야 한다. 편지가 도착했다고 적는 것과 네가 읽는 것은 다르니까.”
“그럼 돈은요?”
“약속한 때에 돌려줘야지.”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기억하세요.”
발카스는 잠시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러고는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마.”
***
손님들이 돌아간 뒤 태오는 서재에서 마지막 연속성 장부를 펼쳤다. 첫 줄에는 오래전 적었던 자신의 300금화가 있었다. 그 아래에는 확인된 지급 내역이 차례로 이어졌다. 이제 마지막 줄에는 분명하게 적을 수 있었다.
[김태오. 원금 전액 실제 반환. 잔액 0.]
다음 장에는 남은 사건을 전문기관과 당사자에게 인계한 목록이 있었다. 계정 47의 제한 현물 대조에서 96금화가 확인됐지만 개인별 배분 권리는 미확정이었다. E-47/4 외부 결제 지시의 실제 지급 증빙은 발견되지 않았다. 47-C 계열 감시 확인표식의 인계 경로는 대조됐으나 그것이 금고를 여는 열쇠나 다른 사람의 권리를 대신 행사하는 허가는 아니었다. 잘못된 통지 완료 색인은 공식 정정 절차에 들어갔고, 각 세입자의 나머지 청구는 계속 살아 있었다.
태오는 그 목록을 적은 뒤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한 권의 장부로 모든 사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제는 장부가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게 아니라 사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리네아가 서재 문을 두드렸다.
“아직 일해요?”
“오늘은 마지막 정리만요.”
“마지막이라니, 기록방 문 닫을 건 아니죠?”
“그럴 리가요. 내일도 손님이 예약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안도한 듯 웃었다.
“그럼 서재 문만 닫아요.”
태오는 펜을 놓았다.
***
밤에는 둘이 마당의 화분 옆에 앉았다. 태오가 가져온 한국의 멈춘 손목시계는 이제 서재 유리 상자 안에 있었고, 리네아의 바다 조약돌은 그 옆에 놓여 있었다. 두 물건은 서로 다른 출발점을 지녔지만 같은 집에 있었다.
“당신은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거예요?” 리네아가 물었다.
태오는 잠시 생각했다. 먼 나라의 기억과 지금 사는 도시의 냄새가 동시에 떠올랐다.
“가족들에게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하고 싶겠죠. 하지만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도 제 삶입니다.”
“그럼 지금은 어디가 집이에요?”
태오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당신이 기다리는 곳이요.”
리네아가 잠깐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울 것 같으니까.”
“그럼 안 하겠습니다.”
“아니요. 한 번만 더 해 줘요.”
태오는 웃었다. 그는 그녀를 품에 안고 조용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
멀리 검은 산맥에서는 달빛이 오래된 바위를 비추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아직 모든 비밀을 밝히지 못한 금고가 있었고, 파벨시에는 자기 이름으로 돈을 돌려받으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내일 어떤 일을 겪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더는 잘못된 한 줄 때문에 말을 시작할 기회조차 빼앗기지 않도록 기록이 바뀌고 있었다.
태오는 처음 드래곤에게 찾아갔던 날의 계약서를 떠올렸다.
그때 그가 바랐던 것은 거창한 모험이 아니었다. 제때 돌려받을 보증금과, 안심하고 잠들 수 있는 집이었다.
첫 번째는 오래 걸려서야 얻었다.
두 번째는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찾아왔다.
리네아가 그의 어깨에 기대어 속삭였다.
“내일 아침에는 뭐부터 할 거예요?”
“아침밥 먹고, 손님 장부를 정리하고, 저녁에 돌아오겠습니다.”
“좋네요.”
“그리고 당신이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차를 끓이겠습니다.”
“그건 꼭 지켜요.”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에게서 전세금을 받는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함께 사는 이야기는 내일 아침에도 계속될 것이다.
— 완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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