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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마왕성에 취업했더니 내가 제일 무섭단다 · 128화
PAYLUA ORIGINAL · 제128화

128화. 편지를 안 받겠다는 사람에게

마왕성에 취업했더니 내가 제일 무섭단다 · 6,122자

오프라인 책장
마왕성에서 가장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은 '네가 누구냐'가 아니다. '누구를 대신해서 왔느냐'다. 우리는 그 질문 때문에 왕국 병사와도 싸웠고, 천계 서기관과도 말다툼했고, 심지어 마왕의 출입증도 반려했다. 덕분에 이제 제르칸은 문을 지날 때마다 괜히 자신의 이름을 크게 외친다. 누가 보면 성문을 통과할 때 왕의 권력을 증명하는 의식이라도 치르는 줄 알겠다. 그날 오후, 중립 공관에서 특별한 통신이 왔다. "옛 봉인 검수품 보존 책임자 측에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아레인이 말했다. "누가 연락했습니까?" "보존 기록의 지정 대리 창구입니다. 개인 신원은 공개할 수 없고, 접촉 사실 자체가 수취인의 현재 생존이나 의사를 보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그쪽에서 묻더군요. 왜 지금 다시 그 우편을 찾는지." 나는 잠시 생각했다. "오래된 계약에서 누군가 다른 사람의 침묵을 동의로 바꾸고 있는지 조사하기 때문이라고 전해 주세요. 편지 내용이 무엇인지 묻거나 작성자를 찾는 건 우선 목적이 아니라고요." "그다음은요?" "이 일 때문에 당사자 정보가 노출될 위험이 있다면 공개 조사에서는 제외하겠다고요. 다만 제도 오류를 수정할 수 있는 비식별 자료는 검토하고 싶다고 해 주세요." 아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통신을 마친 뒤에도 나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누군가 오래된 봉투를 보존하려는 선택을 했다는 사실은 조금씩 드러났지만, 그 사람이 왜 그랬는지, 지금 그 선택을 유지하고 싶은지는 알 수 없었다. 피코가 내 옆에서 물었다. "답장이 오면 어떻게 할 거예요?" "받아야지. 하지만 답장이 안 올 수도 있겠지." "그럼 계속 기다려요?" "기다리는 동안 다른 문제는 고쳐야 해." 녀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윤 님은 답장 안 하면 슬프지 않아요?" 나는 미소를 지었다. "슬프지. 그런데 내가 슬프다고 누군가 대답해야 할 의무가 생기는 건 아니잖아." 피코는 잠시 생각하다가 자기 사탕주머니를 닫았다. "제가 사탕 하나 드릴까요?" "오늘은 괜찮아." "그래도 받아요." "피코야." 녀석이 바로 멈췄다. 곧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은 듯 눈을 깜박였다. "아. 거절했으면 안 줘야죠." "그래."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녀석에게 고마웠다. 누군가 걱정해 줄 때마다 권리의 철학을 강의할 필요는 없다. 가끔은 그냥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 된다. 그날 저녁 공동 시범 창구에는 낯선 손님이 왔다. 망토를 깊이 눌러쓴 여성 마법사였다. 그녀는 얼굴 공개를 원하지 않았고, 본명을 쓰지 않아도 되는지부터 물었다. "사례 접수에는 비식별 번호를 발급할 수 있습니다. 다만 공식 처분에는 권한 있는 기관을 통한 확인이 필요할 수 있어요." "지금은 상담만 받고 싶습니다." "그럼 상담 범위에서만 진행하죠." 그녀는 오래전에 빚 보증을 부탁받았다고 했다. 대피소에서 쓰러진 이웃의 물품을 대신 받아 줬을 뿐인데, 나중에는 그 이웃의 장기 대출 계약 보증인으로 표시돼 있었다. 그런 계약을 한 적이 없었지만 수정하려면 이웃의 현재 소재를 먼저 공개해야 한다는 안내를 받았다고 했다.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 아시나요?" 나는 물었다. 그녀는 손을 꽉 쥐었다. "알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누구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아요." "그러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데 그러면 제 빚을 고칠 수 없다는 거잖아요." 나는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이 경우 자신에게 붙은 부당한 보증 기록을 정정하는 문제와 타인의 소재를 공개하는 문제를 분리해야 했다. "일단 귀하가 직접 보증 계약에 서명했는지부터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주소 없이도 본인 행위에 관한 기록은 검토할 방법이 있을지 법무 담당자에게 요청하겠습니다." 그녀는 긴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나는 사건 번호를 발급하고 그녀가 희망하는 연락 방법을 선택하도록 했다. 이 자리에서는 이름을 묻지 않았다. 상담 종료 뒤에도 그녀의 사례를 우리에게 편리한 예시로 외부에 공개하지 않겠다고 설명했다. 루시아가 문 앞에서 그녀를 배웅했다. 마법사는 잠깐 멈추더니 말했다. "기사가 문을 지키는 곳에서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나요?" "오늘은 아무도 끌고 가지 않아요." 루시아가 대답했다. "정말요?" "누구도 대신 결정하지 않는 곳이니까."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옛 한국어 우편의 수신인에게도 이런 창구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누군가 비밀을 얘기하지 않아도 자기 권리를 지킬 수 있었다면. 익명 상담이 끝난 뒤, 나는 법무 담당자에게 가상의 사례를 만들어 보여 줬다. 사연을 그대로 복사하는 대신 개인 정보와 배경을 모두 바꾼 시험 문제였다. "A가 B의 물품을 긴급 인계받았다. 그런데 시스템에는 A가 B의 장기 대출 보증인이 됐다고 표시된다. A는 그 기록을 정정하고 싶지만 B의 소재는 공개하고 싶지 않다." 라델은 팔짱을 낀 채 한참 생각했다. "A가 실제로 보증 계약에 서명했는지부터 확인해야겠군요. B의 주소는 그 판단과 별개일 수 있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현행 조회 화면에서는 B의 현재 주소가 없으면 정정 신청 자체가 열리지 않습니다." "이건 절차상 문제네요." 우리는 법률 용어를 놓고 한참 의견을 나눴다. 라델은 왕국의 보증 제도가 모든 계약에서 동일하게 적용되는 게 아니므로 자료별로 판단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동의했다. 다만 정정 신청을 시작하려면 타인의 소재를 반드시 공개해야 한다는 요구가 모든 경우에 타당한지 검토해야 했다. "신청을 열어 주는 것과 정정 결론을 내리는 것은 다르니까요." 내가 말했다. "맞습니다.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건 당사자에게 불필요한 정보를 요구하지 않고도 심사가 시작되는 통로겠군요." 라델은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그런데 왜 한도윤 씨는 그렇게 타인의 주소에 민감합니까?" 나는 천계 제7서고의 문을 떠올렸다. 돌아갈 수 있다는 말 한마디에 한국으로 가는 길이 열릴 것 같았던 순간. 그리고 내 이름이 쓰인 문서가 내 허락 없이 떠돌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기분. "제 이름이 적힌 종이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걸 보니까요. 어디로 가고 싶고, 누구를 만나고 싶은지 제가 직접 결정하고 싶어졌습니다." 라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예전에 당신을 쫓았지요." "예. 제 지명수배도 아직 완전히 안 풀렸습니다." "그건... 계속 확인 중입니다." "기한이 언제인지도 알려 주세요." 라델은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가 편지를 찾는 일만큼이나 그 문제도 오래 걸렸다. 나는 상담실로 돌아오는 길에 작은 물품 보관함을 하나 주문했다. 신고자가 적은 종이를 직접 가져가거나 원치 않으면 폐기 방식에 관해 선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상담 내용을 무작정 다 보관하는 게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내 옛 습관을 조금 고쳐야 했다. 피코는 보관함을 보더니 신기한 듯 물었다. "여긴 뭘 넣어요?" "당사자가 맡기기로 한 자료만." "그럼 제가 맡기는 건요?" "네 물건도 네가 원하면 맡길 수 있지." 녀석은 잠시 생각하더니 자기 사탕주머니를 내밀었다. "오늘은 아껴 먹고 싶어요." 나는 웃으며 봉투를 받아 보관함에 넣었다. 피코는 맡긴 시각과 찾을 수 있는 방법을 물어봤고, 나는 담당자 확인 없이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겠다고 설명했다. "제가 안 오면요?" "정해 둔 기간이 지나면 다시 연락할지, 계속 보관할지 네가 고른 규칙대로 처리할 거야." "그럼 내일 찾으러 올게요." "그래." 녀석은 다섯 걸음도 못 가 돌아왔다. "한 개만 미리 먹으면 안 돼요?" "네 사탕이니까 네가 결정하면 돼." 피코는 한참 고민하다가 도로 나갔다. 나는 녀석이 얼마나 버틸지 궁금했지만 열쇠는 그대로 둔 채 책상으로 돌아왔다. 오후에 중립 공관에서 정책 담당자 둘이 찾아왔다. 그들은 편지 발송 상태를 공개하면 투명성이 높아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수취인 추적이 가능한 수준의 정보 공개는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럼 국민이 절차를 믿을 방법이 없잖습니까?" "총건수, 처리기준, 보류 사유의 범주, 독립 감사 결과는 공개할 수 있습니다. 개인 이름과 주소를 모두 공개해야만 투명한 건 아니에요." 한 담당자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게 하면 비밀이 너무 많아지지 않나요?" 나는 공문철을 펼쳤다. "비밀과 보호는 다릅니다. 비공개 결정을 누가 검토하는지, 어떤 절차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지를 공개하면 됩니다. 한 사람의 주소를 구경거리로 내놓는 것보다 그 편이 더 책임 있는 방식입니다." 아레인은 내 말에 동의하며 외부 감사의 범위를 설명했다. 공개할 수 없는 원본도 적법한 권한을 가진 독립 검토자가 확인하고, 검토 결과만 비식별로 보고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논의 끝에 그들은 시범 지침에 '비공개 결정에 대한 독립 재검토 신청' 항목을 넣기로 했다. 누군가 숨기고 싶은 정보가 있다고 해서 모든 조사에서 빠질 수는 없고, 반대로 조사한다는 이유로 모든 정보를 공개할 수도 없다. 나는 두 문제를 나란히 적었다. 피코가 오후 늦게 보관함으로 돌아왔다. 녀석은 자기가 맡긴 사탕주머니를 찾겠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어제 맡기셨죠?" 내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오늘이잖아요!" "본인 확인 완료. 물품 반환합니다." 피코는 주머니를 받아 들고 활짝 웃었다. "이거 좋은 제도네요." 나는 녀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응. 맡겨 놓았다고 남의 물건이 되는 게 아니니까."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자 이상하게 마음이 시큰했다. 누군가 보존고에 남긴 한국어 편지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그것을 찾았다고 해서 그 편지가 우리의 물건이 된 것은 아니었다. 라델이 돌아가기 전 나에게 한 가지를 약속했다. "지명수배 취소 절차도 담당자별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무조건 다음 결재를 기다리라는 말은 이제 그만해야겠군요." "그렇게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마왕성에서 이렇게 오래 일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몰랐습니다. 원래는 대답을 잘못하면 바로 죽는 회사인 줄 알았는데요." 라델이 웃었다. "실제로는 어떤가요?" "월급날만 잘 챙기면 꽤 괜찮습니다." 나는 창밖의 검은 탑을 바라봤다. 처음 왔을 땐 무서웠던 곳이 이제는 돌아와 쉬는 집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더 잘못된 일을 그냥 두고 싶지 않았다. 밤늦게 키엔이 연락해 왔다. 0003 구형 규격의 공개 가능한 부분을 확보했다는 내용이었다. 규격서는 원래 세 가지 기능을 서로 분리하고 있었다. 접수한 사람, 물건을 인계받은 사람, 최종 동의한 사람. 통합 조회 시스템에서 세 기능을 하나의 상태로 요약하면서 문제가 생긴 것으로 보였다. "실제 통합 작업 기록은요?" 내가 물었다. "사고 조사 때 봉인됐던 검토 페이지가 남아 있어. 지금은 공개 범위 확인 중이네." "봉인됐다는 이유가 있습니까?" "구형 시스템을 관리하던 직원들의 개인정보와 현재 계약자 정보가 섞여 있어서야." 나는 이해했다. 원인을 찾는다고 무작정 공개할 수는 없다. 잘못된 시스템을 고치는 동안 엉뚱한 사람의 생계를 망쳐서는 안 되니까. 다음 날 아침까지 기다리겠다고 말하고 통신을 끊었다. 그런데 몇 분 뒤 아레인에게서 새로운 전송이 왔다. [보존 책임자 측이 제한된 범위의 의사표시를 전달함.] 내 손이 잠시 멈췄다. 아레인이 이어서 읽었다. [원문 내용 공개에 동의하지 않음. 그러나 당시 발송 보류 상태와 그 사유가 제도 개선 목적의 비식별 조사에 사용되는 것에는 동의함.] 나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봤다. 대답이었다. 우리가 궁금해하는 모든 것을 말해 주는 대답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일을 해도 되는지 분명하게 알려 주는 대답이었다. "이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내가 말했다. "작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아레인이 물었다. "아니요. 제가 바라는 방식 그대로예요." 통신을 끊고 나는 새 접수 대장을 펼쳤다. 맨 위에 이렇게 적었다. [원문 비공개 유지. 보류 처리의 제도적 타당성만 검토.] 피코가 내 옆으로 다가와 글을 읽었다. "그럼 그 편지는 못 보겠네요." "응. 아직은." "근데 우리도 뭘 할 수 있는지 알게 됐죠?" "바로 그거야." 피코는 씩 웃었다. "오늘은 거절을 잘 받아서 성공한 날이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다. 가끔은 열지 않은 봉투가 우리가 가장 잘 처리한 서류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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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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